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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도 위에서

《현대이상심리학》을 다시 펼치며

by 마음 자서전

나의 오래된 독서노트를 펼치던 날이었다. 빛바랜 노트에서 ‘2000.9.12.’라는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스무 해가 훌쩍 넘은 시간의 결이 그 페이지에 그대로 스며 있었다. 그날 나는 분명 권석만의 《현대이상심리학》을 읽었고, ‘이상심리’라는 다소 낯선 단어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노트를 넘기는 손끝이 문득 멈췄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알고 싶었을까.

무엇이 나를 이 두툼한 책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오랜 세월 책장에 잠들어 있던 그 물음이

지금의 나를 다시 그 책 앞으로 데려왔다.


나는 조용히 책을 다시 펼쳤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단어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문장들. 인간의 고통, 부적응, 마음의 균열…

책 속의 문장이 아닌, 내가 살아온 날들의 내면을 건드리는 언어들.


1. 마음이 흔들릴 때 – 이상심리의 시작에 대하여

책은 말하고 있었다. 이상심리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특수한 상태가 아니라고.

그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잠시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는 마음의 기울기라고.

어쩌면 이상심리는 고장이라기보다

“더는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는 마음의 작은 신호일 것이다.

우리는 그 신호를 종종 무시하거나 견딘다. 그러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오래 버티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안, 우울, 두려움, 무기력… 그것들은 모두 마음이 내미는 작은 깃발이다.

“이제는 잠시 멈춰 나를 돌아봐 달라”고.


2. 마음을 지키는 법 – 예방이라는 부드러운 이름

예방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뭔가 큰 결심이나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책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첫째, 몸을 돌보는 일이 마음을 지키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열 시간의 독서를 했어도 한 시간의 산책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둘째,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이름 붙이는 것.

“나는 지금 불안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불안은 조금 작아진다. 감정은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방향을 잃지 않는다.

셋째, 혼자 버티지 않는 것.

마음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은 때로 위로의 말 한마디, 함께 걸어주는 발걸음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3. 회복의 다른 이름 – 치유

책은 치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치유는 완전히 멀쩡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고.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고, 조용한 글쓰기와 독서가 그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치유의 방식은 다르지만, 치유의 본질은 같다.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이 믿음을 마음 한편에 되살리는 일이다.

나 역시 많은 시간을 돌이켜보면 타인의 손이 아니라

내 안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나를 치유해 온 적이 많았다.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언제나 진실했고, 언제나 나를 지키고 있었다.


4. 다시 독서노트를 덮으며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오래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한 지점에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의 나는 ‘이상심리’라는 말 뒤편에 인간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바람을 적어두었다. 오늘의 나는 그 바람을 다시 읽으며 마음의 지도를 조금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상심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며,

때로는 마음의 성장 과정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필연이다.

나는 노트를 덮으며 천천히 마음속으로 이렇게 적어두었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흔들리지만, 흔들리기 때문에 더 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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