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 장애
나는 젊었을 때 대기업에 다녔다. 사람들 눈에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서초구에서도 손꼽히던 동네, 서래마을에서 살았다. 그때의 나는 안정된 일상에서, 앞으로도 비슷한 삶이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결로 꺾인다. 잘나가던 친구가 시작한 사업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내 삶이 다른 길로 접어들 줄은 몰랐다. 친구는 갑자기 폐암 진단을 받았고, 사업은 하루아침에 멈추었다. 그때 나는 은퇴 후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평택 농촌으로 내려갔다. 생활의 무게도, 마음의 무게도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들은 학교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환경이 바뀌고, 학업에서도 뒤처지는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어느 날, 아들의 책상을 사러 가구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중학교에 여러 동아리가 있으니까, 너에게 잘 맞는 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니?”
며칠 후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나 플루트를 배우고 싶어.”
그 말이 낯설게 들렸다. 평택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아들이 플루트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학교 밴드부 애들? 나중에 나이트클럽이나 그런 데서 일하게 돼요.”
편견에 가득 찬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 말들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직접 학교를 찾아갔다. 담임 선생님은 뜻밖에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제 딸에게 플루트를 배우게 해요. 그리고 밴드부 선생님이 새로 오셔서 분위기가 정말 좋아졌어요.”
곧 밴드부 선생님이 오셨고, 그분의 전공이 마침 플루트였다.
“제가 고1까지는 충분히 지도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맡겨보시죠.”
그 한마디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었다.
나는 25만 원짜리 플루트를 사주었다. 그 뒤부터 아들의 생활은 바뀌었다. 밤 10시면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 나 끝났어요.”
차를 몰고 학교에 가보면, 텅 빈 밴드부에 아들 혼자 있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오직 집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아들은 악기를 학교에 두고 다녔는데, 어느 날 플루트가 사라졌다. 도난이었다. 나는 아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좋은 악기, 100만 원짜리 플루트를 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말했다.
“이제부턴, 인표는 전문가에게 배워야 해요.”
선생님이 소개한 사람은, 그에게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제가 고등학생 때였어요. 입시를 앞둔 어느날 학생 하나가 연습실에서 저를 몇 번 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더군요. ‘선생님, 시험이 내일인데… 플루트를 빌릴 수 있을까요?’
제 악기는 고가였지만, 그냥 빌려줬습니다. ‘열심히 해서 꼭 붙으세요.’라고 말하고요. 그 학생은 합격했고,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분이 지금 KBS 교향악단 플루트 수석이에요.”
그 수석 연주자에게 아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았다. 아들은 더욱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나 6개월쯤 지나던 때였다.
“인표 아버님이시죠? 인표가 연주 중에 입술을 떨어요. 한 달 정도는 연습을 쉬고 운동을 하게 해주세요.”
입술을 떠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갔다.
“그건 ‘틱’이라는 겁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나는 그때 생전 처음 ‘틱장애’를 들었다. 틱은 감정이나 스트레스가 신체의 특정 근육 움직임으로 튀어나오는 신경학적 증상이라는 사실을 훗날 알았다. 아이들은 특히 예민한 시기에, 압박을 받을 때 이런 증상이 악화되기도 한다.
“치료 방법은요?”
“약물치료가 있고, 수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을 먹어도, 수술을 해도 완치는 어렵습니다.”
냉정한 대답이었다.
아들은 약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친구들과 축구하며 온몸을 움직이고 뛰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선생님께 갔지만, 결과는 같았다.
“여전히 입술을 떨어요. 플루트는 어렵겠습니다. 클라리넷이나, 다른 악기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아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단호히 말했다.
“나는 플루트가 좋아요. 대학교엘 못가도 괜찮아요. 나 혼자 할래요.”
그 뒤로 아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연습했다. 고3이 되었고, 입시를 앞둔 어느 날 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엄마… 나도 대학교 가고 싶어.”
누구보다 현실의 벽을 잘 알고 있었던 아이였기에, 그 눈물은 더 깊었다.
그때 또 학교에서 악기가 도난당했다. 선생님은 말했다.
“이제는 연주용 악기를 사주셔야 합니다.”
나는 500만 원짜리 악기를 사주었다. 연주용 중에서도 저렴한 악기였지만, 아들은 그 악기를 쥐고 다시 일어섰다.
결국 아들은 혼자의 힘으로 틱을 이겨내며 서울의 S 대학에 합격했다. 방학 중에는 악기 수리점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알바를 마치는 날 사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졸업하면 우리 샵으로 와라.”
그분은 Y대 음대를 나온 전문가였다.
졸업 후 아들은 그곳에서 4년을 일하다가 미국의 악기회사에 스카우트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아들과 나는 틱장애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아들은 플루트를 불 때 틱이 남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막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고쳐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품고 이겨낸’ 것이다.
나는 안다.
누구보다 강하게, 누구보다 뜨겁게, 자신만의 호흡으로 인생의 리듬을 다시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용기가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