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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Jul 23. 2024

음악행위자의 관계성

#디오니소스로봇:리부트


이 글은 공연감상문이 아니다. 최근 내 삶에서 굉장한 화두를 가졌던 음악 행위자의 포지셔닝에 관한 고민이다. 무엇보다 나를 설득시키기 위한 글이므로 꽤나 주관적임을 밝힌다. 음악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굉장했으므로 여러 분들이 해 주실 것 같다.


그러려면 최근 나의 음악적 행동반경을 밝힐 수밖에 없다. 먼저 굿 현지조사를 위해 실제 강신무당 인터뷰를 진행중이고 지역의 법사님들을 추적 중이다. 아시다시피 사운드베쓰힐링에 관심이 있어 싱잉볼을 연주하고 최근엔 스와미 아룬이 진행하는 멀티 사운드베쓰 힐러 자격 과정을 다녀왔다. 여전히 음악치료 세션을 진행 중이고 가끔 극장 공연을 보러 간다. 사실 굿 조사를 벌인 후로 극장 공연이 시시해진 건 사실이다. 뭔가 흉내내고 있다는 인상을 자꾸 받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음악행위자는 무당-사운드힐러-음악치료사-예술가-음악기술자이다. 순서에는 위계가 없으며 좌우로 좀 더 연관성 있는 걸 묶었을 뿐이다. 무당은 계주와, 힐러는 힐리와, 치료사는 내담자와, 예술가와 음악기술자는 관객과 관계성을 가진다. 앞의 3종은 직접 접촉을 하며 라포 형성을 기반으로 한다. 뒤의 2종은 직접 접촉이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음반이나 매체를 통한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음악 기술자도 (나쁜 의미라기보다)고도로 완성된 기술은 어떤 경외심을 갖게 한다. 어쨋든 이들은 음악 행위를 통해 교감하고 감흥을 나눈다.


멀티사운드 힐링은 말은 좀 거창하지만 힐러의 음악행위를 통해 신체 및 마음을 증진시키는 일을 말한다. 그 악기가 싱잉볼이 될수도 공이 될수도 북이 될 수도 아니면 그 전부가 될 수도 있다. 소리샤워를 통해 뇌의 상태를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끌어올리고 결국 명상의 상태로 인도하는게 원리다. 바닥에 누워 힐러가 나의 이마에 아로마오일을 바르고 샤먼드럼을 내 몸을 둘러 쳤을 때 나는 바람을 느꼈다. 약간의 의심은 무거웠던 몸이 가뿐해지면서 믿음으로 바뀌었다. 이런 행위를, 과거에는 무당이 하지 않았을까?


그는 힐러가 굳이 음악의 구조를 음악가처럼 파악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힐리의 건강상태를 의식하고 좋게 해주려는 목적이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무당-치료사도 일정 부분 통한다.


반면 현대극장의 예술가는 관객과 이 정도의 접촉은 하지 않는다. 예술가에게 관객은 불특정다수이고 굳이 그들의 사정을 알 필요 없다. 관객 역시 자신의 심신상태를 알리는 건 불편하다. 조명이 완벽히 드러찬 극장에서는 철저히 분리된다. 관객은 음악행위에 그저 제3자인 구경꾼이다. 소설로 치면 액자식 구성이다. 그리고 실은 그런 극장문법에 따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다.  공간은 여러 상황을 지배하고, 관객이 객석에 앉는 순간 모든 건 귀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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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대의 예술가는 마치 제사장 같았다. 극장의 모든 소리를 통제하고 조합하고 춤을 추고 뿌려댔다. 그는 국립청관 시절 우리에게 ‘뮤지킹’이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같은 책을 읽게 했는데, 그걸 본인이 무대에서 온전히 실천하려 한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을 잃지 않고 여전히 추구하는 예술세계가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또 연주자들의 기싸움이 아주 볼만 했다.  물론 국악아해들이 자꾸 물러서긴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몰입했다. 그럼에도 문을 나서며 개운치 않은 이유는 뭘까.


소설이나 그림책은 순서는 다르더라도 기승전결이 있고 그 작품 자체에 완결성이 있다. 책을 덮고 이야기의 완결을 나름 이해했을 때 비로소 여운이 생긴다. 이제 독자는 생각해본다. 나는 이 메세지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미술 역시 관찰자가 감상을 통해 감흥을 느끼는데 차이가 있다면 감흥을 느끼기까지의 시간을 감상자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은 보자마자 압도하기도 하며 어떤 작품은 찬찬히 들여다보며 곱씹어가며 감흥을 얻는다.


무대공연은 찰나의 멋진 장면에 대한 충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면들이 꿰어지며 설계자가 숨겨둔 메세지를 알아채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극장 내에서 그것이 어느정도 해결되어야 한다.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극장 문을 나서며 작품에 대한 인지와 감정이 추스러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삶이 끼어들 여운이 생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기승승승승-끝?으로 느껴진다. 몰아치는 기싸움 끝에서 관객이 꿸 수 있는 메세지는 무엇이었던가. 감정을 휘저어 놓고 다독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 공간에서 제일 개운한 사람은 소리를 쏟아낸 무대 위 연주자 또는 설계자이지 않을까. 마치 발신자는 있지만 수신자는 없는 기분이다.


힐러가 치는 멀티 공 연주와 예술가가 업라이트 피아노를 말렛으로 둘러치는 연주 자체에서는 전혀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힐러는 아주 구체적인 수신자 힐리를 위해 치는 것이고 예술가는 불특정 다수의 수신자 관객을 위해 치는 것이다. 이 차이는 힐러는 굉장히 깊지만 좁은 범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고, 예술가는 수신에 완전 성공하면 다수의 팬층을 확보하며 주체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뜻이다. 실패하면 쇼가 되고.


또한 무당, 힐러, 치료사가 음악행위를 통해 발신하면, 계주에겐 무감을 서게 하고 힐리에겐 대화를, 내담자와 상담을 통해 수신이 잘 되었는지 확인한다. 부족한 점은 추스르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관객에겐 직접 물어볼 수 없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고. 그렇기때문에 설계하기를 극장 안에서 완결된 형태로 마무리를 지어 관객이 다음 문을 열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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