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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 가게에서 협박전화가 왔다

2025년 6월 23일의 기록

by Kyle Lee

“여보세요?”


“000 씨 되시죠?”


“네 맞습니다.”


“네, 예전에 방문하셨던 마사지 가게 사장입니다.”


“네? 어디시라고요?”


저녁 무렵, 미역국을 끓이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010으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어느 업체의 연락을 받기로 되어있었던 나는 의심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상대는 특이한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데도 소리가 너무 울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몇 번을 실례지만 누구신지를 되물어도 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소리가 너무 울려요? 그럼, 잘 들어보세요. 예전에 방문하셨던 마사지 가게 사장님입니다. 스웨디스 마사지 가게. 들리십니까?”


“네.”


이번에는 들렸다. 스웨디시가 뭐지? 확실한 건 내가 기다리던 업체는 아니었다. 내가 기다리는 전화는 에티오피아 커피 원두와 바텀리스 포터필터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또는 그녀)가 할 이야기는 적어도 북유럽을 떠올리는 아로마향 가득한 마사지에 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수빈 씨 마사지 가게 사장인데요. 스웨디시 마사지 사장인데, 안 들리십니까?”


다시 소리가 울린다. 수빈이가 누구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기억났다. 내가 보는 네이버 웹툰 [일렉시드]에 나오는 캐릭터 중 하나의 이름이 수빈이다. 피어싱이 눈에 띄는 보이시한 매력의 여자 캐릭터. 상대를 꽁꽁 얼려버리는 초능력을 가진 그녀가 내가 아는 유일한 수빈이다. 수빈이가 마사지를 한다고? 수빈이는 아직 고등학생일 텐데. 너무 심각한 불법이다. 사장님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번호는 010인데 통화 퀄리티는 카카오톡 전화보다 못하다. 16년 전 외국에서 스카이프로 통화하던 때가 떠오른다. 확신이 선다. 피싱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뭐라고요. 이 보세….”


전화를 끊자 마음의 평화가 온다. 이런 피싱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연변 사투리인지 경상도 사투리인지가 섞인 특이한 억양의 삼십 대쯤 된 것 같아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정극 연기자 같은 구석이 있었다. 지지직 거리는 노이즈와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시궁창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어두운 하수구에 숨어 상한 음식물 쓰레기 조각이 흘러나오길 기다리는 새앙쥐의 노란 두 눈동자를 상상했다.


지잉. 몇 분 후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같은 번호다. 거실에서는 배고프다고 울고 있는 막내에게 아내가 젖을 물리고 있었다. 미역국이 다 끓으면 슬슬 첫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 저녁을 먹여야 한다. 수빈이고 스웨디시고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수신 거절 버튼을 누르고 차단을 건다.


“누구예요?”


아내가 묻는다. 내가 벙찐 표정으로 대답한다.


“스웨디시 마사지 사장이래. 수빈이가 뭐 어쩌고 하던데.”


“그게 뭐야?”


“피싱인가 봐요.”


미역국이 끓는다. 불을 내리고 주섬 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언젠가 국제적인 피싱 범죄조직과 관련된 뉴스를 본 기억이 났다. 태국이었던가? 어디 연예인이 외국에 갔다가 범죄조직에 납치 감금되어 강요에 의해 피싱 일을 해야 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납치되어 억지로 사기꾼의 목소리 역할을 한다는 것 같았다.


오늘 내게 전화를 건 남자는 어느 쪽일까? 어딘가 여행을 갔다 낯선 곳에서 납치되어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손에 쥔 대본대로 앵무새처럼 읊는 쪽일까? 그게 아니면 인생 한탕 제대로 하기 위해 대본을 쓰고 공항이나 항구에서 어수룩해 보이는 여행객을 꼬드겨 차에 태워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쪽일까?


“근데 마사지가 무슨 피싱인데요?”


아내가 묻는다. 나는 적당하면서도 적절한 설명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한다.


“마사지 가게에서 성매매 했지? 돈 내놔. 이렇게 협박하는 피싱이겠죠.”


아내가 씩 웃으며 말한다.


“마사지는 개뿔. 그런데 갈 돈이 어딨어.”


아이 둘 잘 먹여 키우기도 벅차다. 이렇게 빠듯한 살림이라니. 협박도 여유가 있어야 통하는 세상이다. 우리 같은 소시민은 스미싱도 피해 간다. 우리 통장 털어봐야 너네 인건비라도 나오겠냐.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아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딘가 거기엔 자존심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마사지, 그까짓 것 얼마나 한다고!(그런데, 마사지 얼마나 하나요?)


아내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이 전화를 받고 찔리고 무서워서 도와달라고 했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아내가 말한다.


“궁금할 것 같아요. 대체 그럴 돈이 어디서 났지?”


뜨끔, 가시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이다. 내 방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지갑에는 지금까지 알뜰살뜰 모아 온 현금 백만 원이 있다. 언제나 죽으라는 법은 없고, 없는 살림에도 어떻게든 짜고 또 짜내서 뽑아먹을 구석은 있는 법이라서….


이 일기를 보면 아내는 내 방 서랍을 열어볼까?


상관없다.


그거, 어차피 우리 올 하반기에 이사 갈 때 이사 비용으로 보태야 돼.


이렇게 빠듯한 살림이라니. 애나 데리러 가야겠다.


미역국이 맛있게 잘 되었다. 뭉텅이로 넣은 소고기가 고소하고 진한 맛을 잘 내줬다.


두 아이, 잘 먹여 키우기도 참 벅찬데.


그래서, 너무 행복한 하루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을 조금 찾아보니 이런 피싱이 꽤 흔하게 퍼져있는 모양이다. 레퍼토리가 꽤 정형화되어있는 것 같다. 당신이 가게에서 만났던 아가씨(마사지사)가 사정이 어려워 가게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당신 영상이 찍혔다. 이게 퍼지는 걸 막으려면 돈을 내놔라. 뭐 이런 흐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모르쇠로 나오면 본격적인 협박이 시작된다고 한다. 지금 이 상황이 장난 같냐. 주변에 다 퍼지면 당신 얼굴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냐. 상황 벌어져 봐야 정신 차릴 거냐. 뭐 그런 식으로.


속는 사람이 속을 짓을 했으니 자업자득이네 뭐네하고 의견이 갈리는 지점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 그냥 사기꾼들 다 뒈졌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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