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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Aug 18. 2016

엄마, 난 돈 먹는 하마야

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2.8.19. 수 맑음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 선영 - 이슬의 친구

선영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왔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약간 춥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는 길에 아주머니 들께서 집 앞에 나와계시면서 슬이를 보더니 머리핀 꽂았다고들 하자 슬이가 그 아주머니들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어 대는 거다. 그러자 아주머니들도 손을 같이 흔들자 슬인 박수를 마구 쳐댔다.


오후에 아빠가 출근을 하셔서 엄마랑 슬이랑 같이 밖을 나섰다. 아빠는 출근을 하시고 슬이와 엄만 은행에 들렀다. 슬이 앞으로 조그마한 적금을 만들었다. 이젠 슬이 통장도 생긴 거다. 

슬인 구멍이 있는 나무토막에 볼펜을 집어넣었다 뺐다 하면서 놀고 있다. 아침에는 뚜껑을 가지고 그 구멍에 넣으면서 놀자 아빠가 슬이를 칭찬해 주었단다.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놀다가 부엌 바닥으로 떨어뜨리자 옆에 있는 부채 손잡이를 거꾸로 잡고는 그 열쇠를 잡으려고 엎드려서 계속 시도를 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면서 슬이가 머리를 쓴다고 칭찬을 했단다.


노트 속에 있는 엄마 지갑을 꺼내서 종이돈은 구겼다 뺐다 다기 집어넣다 하면서 흐트러 놓는다. 전화카드, 주민등록증까지 꺼내서 이리저리 만져본다. 종이돈이 빳빳하니까 구기기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2016.8.18 목요일 숨 막히게 더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어릴 땐 마냥 내가 잘될 줄 알았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화려하게 돈도 많이 벌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하면서 살 줄 믿었다.


우리 집에서 일하시는 분 중에 명문대를 나온 분이 있었는데,

나는 어릴 때 왜 저렇게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나이 먹고 아르바이트라니"라며 못된 소리를 속으로 했었다.


사촌언니가 공무원을 8년 준비하다가 결혼을 했을 땐,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하나. 이젠 취직하긴 글렀네."라며 비하했었다.


사촌오빠가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했었다.


그런데 삶은 참 힘들고 어렵고 아이러니한 것 같다.

꼭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만 잘 사는 건 줄로 알았던 내가, 사회에 나가면 금방 성공하고 원하는 일로 돈을 많이 벌줄 알았던 내가, 절대 저 사람들처럼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내가,

어느새 삶에 타협점을 찾고 있으니.


예전엔 '이게 하고 싶다' '저게 하고 싶다' 분명했었는데  이젠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곳은 취업이 안되고, 급한 데로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싫은 일을 하다가 금방 회사를 관둬버리고.

빚은 많고 하고 싶은 건 모르겠고 내가 무엇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의문이 들 뿐이다.


가끔 엄마에게 내가 물었다.

"엄마는 어떻게 50년을 살았어?"라고.


엄마는 그러면,

"글쎄 살다 보니 벌써 50년을 살았네"하지.


난 늘 생각한다. 나도 엄마처럼 남편을 만들고, 아이를 만들고, 집을 가지고, 그냥이 아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뛰고 걷고 이야기하며 차곡차곡 나만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다 보면 나도 '글쎄 살다 보니 50년을 살았네, 60년을 살았네, 70년을 살았네'할 수 있을 것 같다. 차곡차곡 쌓이는 적금처럼 지금 이 힘든 시기도 인생의 경험처럼 쌓여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나이를 많이 먹고도 당당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8년 동안 미친 듯이 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하고 싶은 일보다 더 소중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길.


나는 내 미래가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엄마의 돈 먹는 하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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