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산(러시아 고속철도, 러시아어로 '매'라는 뜻)을 타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지하철 투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들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으며 모스크바와 아쉽게 안녕했다. 하지만 조만간 다시 이곳을 찾아올 거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비록 4시간이었지만, 시베리아 횡단의 느낌을 만끽하고자 열차 자리는 창가 쪽으로 예약해두었다. 러시아 여행하는 내내 들으려고 담아둔 노래들을 플레이시키고 종이와 펜을 들었다. 1시간 정도 달리니 날이 흐려졌고, 2시간 정도 달리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계속해서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과 그 나무들 사이로 떨어지는 비를 한참 쳐다보다가 시인지 뭔지 모를 문장을 끄적이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나름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하느라 긴장한 건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앓기 시작했다.
갑자기 열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거렸다. 모스크바만큼이나 볼 것이 넘쳐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런 컨디션은 재앙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호텔 근처 슈퍼에서 도시락 라면을 사 와 맛있게 먹고 뜨거운 차를 연신 마셨다. 그리고 비상 감기약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은 뒤 내리 잤다. 다행히 그다음 날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어 계획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에르미타주와 여름궁전,
이 두 곳만 보면 된다는 여유로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들은 어떤 루트와 목적지 없이 마음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걸어 다녔다. 한참 걷다가 다리 아프면 (노선도 모르는) 아무 버스나 집어 탔다가 내렸다.
어딘가를 찾다가 길을 잃으면 그렇게 불안하고 답답하더니, 자의적으로 길을 잃으니 그 자체만으로 재미있었다.
나그네의 안식처 에르미타주. 이곳을 글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냥 직접 가서 봐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나름대로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카테리나 대제의 컬렉션을 보고 있으니 이 정도는 돼야 뭘 모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규모와 품격에 완벽하게 압도당했다.
내가 러시아로 떠난 건 5월의 첫째 주.
러시아의 주요 기념일 중 하나인 전승기념일(5월 9일)을 앞둔 때였다. 그 덕에 거리를 걷다가 (꽤 자주) 그날을 위한 행사 리허설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내가 진짜 러시아에 왔구나 실감하게 되었고, 막연히 품고 있던 러시아 다움을 매번 넋 놓고 보게 되었다.
넵스키대로에서 피의 사원을 향해 걷다가 러시아 뮤지션들의 다양한 버스킹을 보았다.
여행지에서 듣는 음악은 모르는 노래여도 굉장한 위로가 된다. 특히 혼자 다닐 때 더욱더그러한 것 같다.
이 버스커들은 연주하는 음악도 좋았지만 그들의 표정 때문에 한참을 그 앞에 있었다. (연주하는 내내)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나의 결핍을 진지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건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러시아는 마침 월드컵 준비도 한창이었다. 대회 시작 전이었지만, 공식 기념품 매장이 있어 러시아를 떠나는 마지막 날여기서 축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선물을 샀다.
점원은 귀여운 대학생이었는데 내가 질문할 때마다
(자기가 지금 영어를 공부하는 중이라며) 좀 전에 영어로 어떻게 표현한 거냐고내 질문을 다시 되물어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역에서 3일권 티켓을 구입할 때 역무원과 three days라는 단어조차 의사소통이 안됐을 정도로(이 때도 뒤에 서있던 대학생 도움으로 겨우 구입) 호텔 밖에서 누군가와 말을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대화가 되는 친구를 만나 신이 나서 한참을 떠들어댔다.
그 학생은 월드컵 기간 내내 그곳에서 일할 거라고 했다. 서로 영어로 대화하며 회화 실력을 쌓아보자고 페이스북 아이디까지 받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국에 돌아와 검색을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