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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지 Dec 19. 2016

렘브란트의 결정

내가 하고 싶은 것.

 17세기 수많은 다른 작가들 중 대부분은 본인과 가족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다른 돈벌이 수단과 그림 그리는 것을 병행했다. 그래서 평생 몇 작품을 못 남기고 잊힌 화가들도 많다. 당시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생계유지를 위하여 대중(의뢰자, 당시 귀족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 대표주자로 초상화로 이름을 떨친 렘브란트가 있었다.

전성기의 렘브란트



렘브란트는 귀족들의 입맛에 맞는 초상화를 그리는데 탁월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나이 30대에 이미 전성기를 맞이하고 본인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을 모았다. 그 삶에 젖어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은 냉정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대중에게 바로 외면당했다. 렘브란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내면을 담아낸 리얼리티에 기반한 그림이지만 당시 의뢰자들은 핀 조명 아래 미화된 모습만을 담은 초상화를 원했다. 결국 렘브란트는 본인의 리얼리티를 살린 단체 초상화 'the nightwatch(야간순찰)'을 발표하고 의뢰자가 끊겼다.


야간순찰(night watch, 1642), 363×437cm,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대원들’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단체 초상화는 마치 오늘날의 졸업사진처럼, 모든 사람들이 가지런하게 서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데 렘브란트는 대원들의 성격과 장면의 사실감을 살려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끝으로 의뢰자가 끊긴 렘브란트는 이후 본인 얼굴만 그리기 시작해 자화상을 무려 100여 점 정도 남기고 역사의 저편으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말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그는 정말 불행했을까? 최소한 그의 삶은 영국 국립 박물관에 남길 수 있었고 사실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그림도 기능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없으니 화가의 손을 빌려 사진을 찍듯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대중의 입맛에만 맞춰 살아갔지만 잊힌 수많은 작가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능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능직들은 물론 수요공급 논리에 따라서 비싼 값을 받고, 그림을 그릴 기회가 많아질 수는 있지만 그 그림이 그 의뢰자 말고 그림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모든 걸 떠나서 과연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시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인정받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그들은 행복했을까?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고흐의 그림은 고흐가 살아있는 동안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 점 한 점이 의미 있는 그림으로 남아있다. 렘브란트 또한 그 당시에 대중에게 외면당했지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에도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렘브란트는 나아가 대중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그리며 부와 명예를 다 누려보고 나서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용기 있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확률이 높을 수는 있지만 나의 행복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생각하기 쉽다. 시대와 대중이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한다면 고민의 여지가 없다. 금상첨화다. 그냥 즐겁게 하면 된다. 그런데 대중과 내가 추구하는 것이 달랐을 때가 문제가 된다.


그런데 심리학에서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은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정의 주체가 나에게 있느냐 남에게 있느냐로 결정된다고 한다. 후회와 미련이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과가 안 좋더라도 자기 스스로 원해서 한 결정은 나쁜 결과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남들이 원하는 결정을 하면 결과가 매우 좋을지라도 시간이 지나서 못해 본 것에 대한 후회가 남아서라고 한다.
 
행복이란 뭘까 일반적인 추세와 내가 하고 싶고 꿈꾸는 것이 만약 불일치한다면, 어떤 선택을 해도 모두가 행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힘들어도 분명 선택의 순간은 마주해야 하고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그러다 보면 최소한 내가 행복한 결정에 가까이 갈 수 있진 않을까? 단지 나의 행복을 선택할 용기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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