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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디자인 기업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나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을 읽고

by 피부치

디지털 전환의 거대한 물결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초기 플랫폼 경제가 개인에게 새로운 참여의 기회를 열어주었다면, 이제는 고성능 도구와 AI로 무장한 개인이 기업과 직접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 월 수십만 원만 내면 기업 수준의 결과물을 내는 '프로슈머'용 AI 서비스들이 등장하면서, 과거에는 거대 조직만이 가능했던 일들을 이제는 빠르고 기민한 개인이 해내고 있다. ‘느린 거인’이 ‘빠른 개인’에게 추월당하는 시대의 서막이다.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서 기존 산업의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AI 에이전트가 24시간 다국어로 고객을 응대하고 최적의 상품을 추천하면서, 여행사, 부동산, 보험 등 정보를 중개하고 대행해 주던 서비스 기반의 에이전시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들의 몰락은 우리에게 명확한 신호를 보낸다. 단순 중개나 정형화된 프로세스 대행의 가치는 AI에 의해 ‘제로(0)’에 수렴할 것이라는 경고다.

이 거대한 파도는 마침내 디자인 산업의 문 앞까지 밀려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에 머물던 생성형 AI는 이제 우리 곁에 현실로 다가왔다. 미드저니(Midjourney)는 몇 초 만에 감탄을 자아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챗GPT와 같은 언어 모델은 막힘없이 시안 설명을 작성한다. 디자인 업계는 전례 없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과 일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바야흐로 ‘AI에 의한 디자인의 종말’과 ‘AI를 통한 디자인의 부흥’이라는 갈림길에 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변화는 위기이자 기회다. 다만 이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다. AI 시대에 디자인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과 완전히 작별하고, 조직의 본질적인 가치를 재정의해야만 한다. 그 핵심은 바로 ‘스타일러(Styler)’에서 ‘씽커(Thinker)’로의 진화에 있다.

‘스타일러’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과거 디자인 기업의 주된 경쟁력은 '스타일링', 즉 심미적으로 뛰어난 결과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숙련된 디자이너들은 트렌드를 익히고, 툴을 능숙하게 다루며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냈다. 기업은 더 많은 디자이너를 고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했다.

하지만 AI는 바로 이 '스타일러'의 영역을 무너뜨리고 있다. AI는 인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수많은 시안을 생성하며, 이제 그 품질마저 전문가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행 에이전시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단순 대행과 생산에 머무는 에이전시의 역할은 AI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일의 가치가 상향 평준화되면서, 단순히 ‘손’의 역할을 하던 디자인 기업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씽커’만이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

그렇다면 디자인 기업은 어디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가? 해답은 AI 알고리즘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AI, 특히 머신러닝 모델은 명확하게 정의된 문제와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통계적 패턴을 찾아 최적의 결과물을 도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 즉 AI가 작동하기 이전 단계와 그 결과물을 해석하는 단계에 인간 디자이너의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있다.

AI는 주어진 목표 함수(Objective Function)를 최적화하는 데는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다.

1. 올바른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AI는 'A안과 B안 중 어떤 것이 더 클릭률이 높을까?'와 같이 정의된 문제를 푸는 데는 탁월하다. 하지만 '우리의 비즈니스 목표를 위해 지금 클릭률을 높이는 것이 과연 최선인가?' 혹은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우리가 풀어야 할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와 같이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고 올바른 문제를 정의하는 일은 AI의 영역이 아니다. 이는 복잡한 비즈니스 생태계와 시장의 질적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고차원적 의사결정이기 때문이다.

2. 데이터 너머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 AI는 사용자의 클릭 기록, 구매 패턴 등 정량화된 데이터(Quantitative Data)를 분석하는 데는 강력하다. 그러나 사용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데이터로 드러나지 않는 불편함이나 잠재된 욕구는 무엇인지와 같은 정성적 통찰(Qualitative Insight)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사용자와의 깊은 공감과 관찰을 통해 '말하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것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역량이다.

3. 과거에 없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 AI의 예측과 생성은 철저히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한다. 따라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브랜드의 철학을 담은 독창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미래는 과거 데이터의 연장선이 아니며, 때로는 직관과 가치 판단에 기반한 과감한 도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AI의 본질적 한계는 역설적으로 미래 디자이너의 역할을 더욱 명확하게 정의해 준다. AI 시대의 디자인 기업과 디자이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 씽커’로 거듭나야 한다.

20251003_101442.png AI 시대, 디자이너의 역할


문제 정의자(Problem Definer):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 뒤에 숨은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AI가 풀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문제지’를 만들어내는 역할.
전략적 파트너(Strategic Partner): 디자인을 비즈니스 혁신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 시장과 사용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
경험 설계자(Experience Designer): 단순히 보기 좋은 결과물을 넘어,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조합하여 사용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인 경험을 설계하는 역할.


AI는 위협이 아닌, 가장 강력한 도구다

궁극적으로 AI는 디자인 씽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씽커는 AI를 활용해 아이디어 구상과 시안 제작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절약된 시간을 오롯이 문제 정의와 전략 수립이라는 본질적인 업무에 쏟을 수 있다. 즉, AI는 디자이너의 ‘손’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AI가 불러온 거대한 파도 앞에서 수많은 디자인 기업이 표류하고 있다. 과거의 지도에 의존해 '스타일러'의 섬에 머무르려는 기업은 결국 침몰할 것이다. 그러나 AI라는 새로운 돛을 달고 '씽커'라는 미지의 대륙을 향해 과감히 항해를 시작하는 기업만이 다가오는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의 열쇠는 AI와의 경쟁이 아닌, AI를 지렛대로 삼아 인간 고유의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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