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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일기(3)명절과 자기결정이론

며느리지만 행복한 명절

by 교사맘

시댁은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고, 명절에 한 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전부다. (이것부터가 일단 좋은 상황이다.) 결혼 초반에는 명절 때 전을 한, 두 가지 부쳐서 가져오라셔서 그대로 했는데, 어머님께서 “나 70 되면 명절 모임 너희 집에서 하자.”라고 70세가 되기 3~4년 전부터 말씀하시며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셨다.


실제로 70세가 되실 무렵 한, 두 번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진 후, 형님(남편의 누나)이 나서서 “요즘에 명절을 집에서 치르는 거 너무 힘들다. 우리 외식하면 좋겠다.”라고 제안을 해주셨다. 막상 형님은 시댁에서 어마어마한 명절상을 치르느라 고생이 너무 많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버님이 명절 때 외식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하셨다. 어머님을 시켜서 명절만은 우리 집에서 모였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엄마, 아빠 생일은 다 밖에서 외식하고 명절만 너희 집에서 하자. 니가 수고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버님은 ‘명절에 집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식사를 간소하게 하더라도 식사 후 느긋하게 앉아서 다 같이 대화를 하는 시간이 너무 좋으셨던 것이다. 아버님은 음식이 중요하신 건 아니고, 명절에 모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구나. 오케이. 접수 완료.


12인분의 명절 상을 준비를 위한 나만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메뉴를 바꾸지 않는다. 어차피 일 년에 두 번 차리는 상이다. 매번 같으면 어떠랴.

음식을 직접 만드는 정성은 잠시 접어두고, 가능하다면 자본의 힘을 빌린다. 직접 만드느라 힘들고 스트레스받느니 쉽게 준비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는 게 낫다.


명절상을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내 삼성 노트에는 ‘명절’ 폴더가 생겼다. 기록하고 체계화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명절 음식 준비에서도 나타난다. 해마다 장을 볼 때 모자랄까 봐 많은 음식을 사는 데, 어떤 건 아예 내놓지도 못했다는 둥, 어떤 음식은 가족들이 좋아해서 싹 비웠다는 둥 다양하게 메모를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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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폴더의 기록들


<자기결정이론>

유명한 심리 이론 중 ‘자기결정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The Self-Determination Theory, Edward L. Deci)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명절 식사가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작은 이벤트이다.


1. 자율성 충족 - 메뉴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명절 음식을 차리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차리는 재미를 누린다. 즉, 메뉴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

1월 1일에 하는 떡국 모임을 했을 때 어머니께서 “내가 친구들한테 며느리가 차려주는 떡국 먹으러 간다고 자랑했어~ 작년에 떡국 드시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반찬이나 요리는 아무것도 없고) 진짜 떡국만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웃었지~ 그래도 친구들은 너무 부럽다고 하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씀이 “떡국 말고 다른 것도 차려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주도하고 초대하는 모임이 아닌가? 그다음부터는 “어머님, 아버님~ 떡국만 있는 떡국 모임에 오세요~”라고 웃으면서 강조하고 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치킨을 주문해서 곁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명절상을 위해 아기였던 막내를 등에 업고, 직접 새우만두를 빚은 적도 있다. 그게 너무 맛있어 보이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모두 음식에 대해서는 “맛있다”, “뭐 이렇게 많이 차렸냐” 같은 말씀 외에는 하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2. 유능감 충족 - 12인분 명절상 정도는 거뜬히 차린다.

삼성노트를 보면서 명절상차림은 더욱 쉬워지고 있다. 전은 냉동전에 계란물 한 번 더 입혀서 데운다. 생태탕은 광장시장에서 사 오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치킨과 족발을 배달시키면 그것만 해도 몇 접시가 가득 찬다. 어머님을 위해 생선을 굽는다. 샐러드용으로 손질된 채소를 사서 접시에 예쁘게 담는다. 처음에는 형님이 본인 집에서 설을 하고, 우리 집에서 추석을 하는 등 나눠서 하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명절은 우리 집에서 하겠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형님이 시댁에서 고생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친정에 와서는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상 차리기가 이렇게 쉬운데 말이다. 상을 차려놓고 “웬만한 건 자본의 힘으로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다 같이 웃고 즐겁게 한 끼 식사를 한다.


3. 관계성 충족 - 남편과 함께 준비하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누린다.

명절 음식 준비는 내가 주도하되 남편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 있다. 메뉴가 늘 같으니 남편도 이제 척척이다. 따뜻한 흰쌀밥 짓기, 생태탕 끓이기 등은 남편이 도맡아한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어른들끼리만 이야기하지 않고 조카들도 함께 나눌만한 대화가 많아지고 있다. 아이들은 사촌들과 즐겁게 보드게임도 하고,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공유하기도 한다. 부모님이 교회에서 받고 계신 교육에 대해 들으며, 그 연세에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에 감탄한다. 교회 걱정을 한바탕 늘어놓으며 교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가족이 더 가까워지고, 서로 위하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이게 명절의 본질 아닐까.


시댁 식구들이 가고 나면 또 비슷한 과정으로 친정 식구 모임을 준비한다. 오빠가 있지만, 친정 모임도 우리 집에서 나와 남편이 모두 준비한다. 어차피 엄마가 우리 집과 가까이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올해 추석도 참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26살에 결혼을 했는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결정한 결혼이었기에 꽤 어렸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전 처음 남편의 가족을 만났을 때, 다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뿐이었지 시댁의 문화나 시부모님의 성품에 대해 판단할 어떤 기준도 없었고, 내가 판단할 만한 영역이라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 가족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정 욕구가 강했던 나는 신혼 때 (아마도 관성적으로) 시부모님께도 인정을 받으려 했을 것 같다. 시부모님께 칭찬받는 며느리가 되려는 생각을 안 했을 리 없다. 결혼 후 10년 정도는 시부모님 생신상을 차려서 시댁 가족을 모두 초대했고, 떡국 모임과 어버이날 상도 여러 번 차렸다.


시부모님은 늘 그런 나를 주변에 자랑한다고 하시면서도 “너무 잘하려고 애쓸 것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생긴대로만 해.”,”너랑 나랑은 적당히 잘 지내자.” 등의 말씀을 종종 해주셨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라는 걸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에너지를 200% 이상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날 잡고 상을 차리는 건 해도, 자주 전화를 드리거나 찾아뵙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못하는 것으로 부담 주지 않으시고, 잘하는 것으로 칭찬해 주셨다. 또, 나의 인정 욕구를 자극하지 않는 어머님의 말씀에 두고두고 감사하다.


요즘에는 명절상만 차리고 나머지는 다 외식을 하기에, 자율성과 유능감과 관계성을 누리는 시댁가족 여행을 자주 추진한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서로 더 친했으면 좋겠다. 결혼을 하면서 가족이 늘어난 것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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