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살아 있다!
배 아까워.
전주 어느 식당에 달린 리뷰 댓글. '시간 아까워'도 아니고 '돈 아까워'도 아니고 배 아까워라니 낄낄 웃었다. 먹고 싶은 것도 맛집도 많은 전주에서는 충분히 수긍 가능한 표현이다. 그만큼 전주에는 맛집이 많고 나는 하루에 최대 4끼 정도 밖에 못 먹는 슬픈 현실. 요즘 항상 찾아보는 풍자님 또간집, 전주의 아들 데프콘과 맛따라대명이따라 등 유튜브 영상들, 전현무계획,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서 다룬 전주 맛집을 추려 보았더니 상당한 양. 일주일간 전주에 있어도 다 못 먹을 목록이다.
전주에서 콩나물국이나 비빔밥은 너무 식상하지 않아?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무시할 수 없는 클리셰. 비빔밥도 먹고 콩나물국밥도 먹고 조점례피순대국밥도 먹었다. 맛집이 워낙 많아서 어느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먹을까, 어떤 스타일의 콩나물국밥을 먹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을 뿐.
손님이 주무시는 시간에도 육수는 끓고 있습니다.
왱이집 건물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14년 전에 찾은 콩나물국밥집이 이곳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도 춘과 저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위트 있는 문장의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왱이집은 전주 남부시장 스타일의 토렴식 콩나물국밥이라 뜨겁지는 않지만 맑고 개운하며 아삭한 콩나물의 식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함께 나온 새우젓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이 알맞고 국물이 매콤하다. 꽤 강렬한 매콤함이 자꾸 목을 때려서 기침을 콜록콜록. 콩나물의 아삭함과 대칭에 있는 오징어의 쫄깃한 식감이 더 필요하다면 오징어 사리를 추가하자. 따로 나오는 수란은 김과 국물을 넣고 섞어서 먼저 먹는다.
벌과 나비의 날개짓을 뜻하는 특이한 이름 '왱이'는 손님이 몰려오기를 기대하며 지어졌다. 계산대 옆에는 왱이, 엥이, 욍이, 웽이, 앵이, 왕이는 특허청에 등록된 고유 상표라 허가 없이는 법으로 사용을 금한다고 적혀 있었다. 왱이가 아닌 다른 비슷한 단어도 모두 특허청에 등록을 해두셨다니 리스펙.
전주 토박이 택시 기사님은 현대옥은 꼭 본점을 가야 하고 아니라면 삼백집을 추천하셨다. 삼백집은 전주에서 딱 하나밖에 없다며. 하지만 나는 왱이집을 갔다. 전주에는 없는 삼백집 지점(잠실점)이 우리 집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박찬일 셰프는 콩나물국밥을 '어른이 되어가는 맛'이라고 했다. 어릴 때 내게 콩나물국밥은 '술 좋아하는 아빠가 즐겨 찾는 밋밋한 음식'이었을 뿐 부러 찾아먹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종종 함께 파는 돈가스가 콩나물국밥을 좋아하는 아이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주 왱이집에서 콩나물국밥을 혼자 먹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싹싹 긁어서. 콩나물국밥 짝꿍인 모주는 춘과 함께 먹기 위해 남겨두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중.
14년 만에 순대국 마니아가 되어 다시 찾은 전주조점례남문피순대. 예전에는 순대국을 찾아먹지 않았다. 불혹을 넘긴 내게 순대국은 영혼의 음식. 서울에서도 유명한 순대국은 찾아가서 먹는다. 화목순대국, 농민백암순대, 청와옥 등이 나의 인생순대국. 조점례남문피순대 순대국밥을 한 입 먹자마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맛을 예전에 몰라봤다니 죄송합니다. 얼큰하면서도 깔끔한 국물, 그 어려운 걸 해낸다. 그 어떤 추가도 사치. 나온 그대로 취향 저격. 피순대의 식감은 또 어떤가. 이 느낌 마치 두부. 아침부터 피순대에 초장을 듬뿍 찍어 마늘+쌈장 콜라보와 함께 하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행복했던 혼밥 순대국밥.
전주에 왔으니 비빔밥은 한 끼 해야지? 당연하게도 전주에 천지인 비빔밥 맛집. 전주음식 명인 1호님의 가족회관, 인테리어가 일품이라는 한국관, 누룽지를 먹을 수 있는 하숙영가마솥비빔밥 세 곳으로 좁힌 후 하숙영가마솥비빔밥으로 갔다.
이곳의 흥미로운 점은 밥을 직접 비벼주신다는 점이다. 엄청난 기술로 밥을 직접 비벼주시면 엉성한 내 비빔밥은 환골탈태한다. 비벼주신 것을 먹자마자 비빔 기술이 비빔밥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밥 알 하나하나가 고추장에 코팅돼 완벽하게 살아난 느낌. 매운맛, 보통맛을 주문할 수 있는데 보통 비빔밥을 시키고 비벼주실 때 매운 양념을 첨가해서 먹는 것을 추천한다. 16첩 반상과 함께 먹는 누룽지가 일품. 개인적으로 반찬 중에서는 묵은지 원픽.
전주 물짜장. 울면과 비슷한 맛인데 조금 더 부드럽달까. 최근 데프콘 유튜브에 나와 인기가 급상승한 대보장은 오픈런을 해야만 먹을 수 있다. 정식 오픈은 11시지만 일요일 10시 40분, 이미 열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료 소진 시 바로 문을 닫아버리니 선택받은 사람만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대기 이름과 주문 메뉴를 함께 적어내야 하는데 추가 주문은 불가능하니 넉넉하게 시키자. 대보장의 물짜장은 고속반점이나 노벨반점의 그것과는 달리 매콤하지 않고 담백하다. 아이는 바삭한 이곳의 탕수육을 좋아했다. 베이징 자장면 스타일의 달지 않은 간짜장도 매력적이다.
한옥마을의 교동집, 신대유성도 유명한 물짜장 맛집이다. 신대유성의 물짜장 조리법은 2018년 한국 전통문화전당에 타임캡슐로 봉인되기도 했다. 진미반점에는 된장 짜장과 된장 짬뽕이 있다. 가게 앞에 주차된 택시 숫자만 봐도 현지인 맛집 인증 완료라고 하니 다음 전주 여행 첫 끼는 너로 정했다.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