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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주는데 마치 내가 받는 기분

책 선물의 힘

by 심루이

혹시 이 책 읽었어?


라는 나의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너무나 기쁜 책들이 몇 권 있다. 내가 이 책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행복인 책들.


서은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 김애란 소설가의 '비행운',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 김연수 작가의 '지지않는다는 말',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 고명재 시인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신형철 평론가의 '인생의 역사' 등이다.


처음에는 아주 아껴서 읽고 나중에는 과감하게 밑줄도 긋고 내 생각도 덧붙여가며 거칠게 읽은 책. 내가 제일 많이 읽은 책이자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서 읽을 때마다 무릎을 꿇게 되는 책.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이 세상에 많다는 걸 감사할 수 있게 해 준 책.


읽을 때마다 마음이 몽글해져서 하루가 조금 나아지고 어두운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방울들이 만들어진다. 설거지 수세미에 거품이 퐁퐁 생기는 것처럼.


이 책들을 선물할 때는 주면서 마치 내가 받는 묘한 기분이 된다.


문장이 주는 울림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어떤 영감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기에, 한 권의 책, 하나의 문장에 기대어 우리는 한 시절을 견디기도 하니까. 이 선물이 네게 그런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책을 받을 친구에게 짧은 메시지를 쓰면서 상상한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읽으며 네 입가에 지어질 미소나 깔깔 웃음 같은 것들. 혹은 안개처럼 번지는 뭉클함을.


책을 읽다보면 마음이 이불로 뒤덮히는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내게 그런 순간을 선물해 준 문장들에 흐린 밑줄을 그어 보내기도 한다. 새 책인 줄 알았는데 번개처럼 만나게 되는 밑줄은 심쿵이니까.


그런 네 표정과 풍경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본 찰나는 오늘의 가장 즐거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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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밑줄들


나에게서 남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그가 있던 자리에 가봤을 뿐인데.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슬프지 않았던 것들이 슬퍼지고 기쁘지 않았던 것이 기뻐졌다. 하루가 두 번씩 흐르는 것 같았다.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부지런한 사랑>


유학 시절, 지도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하다는 과학적 결론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은 입을 잠시 즐겁게 하지만 반드시 녹는다... 행복 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는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


<행복의 기원>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 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끝났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 그래서 내 어머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어. 너의 할머니처럼,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인생의 역사>


우리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빙과는 흙빛이 도는 더위사냥이었다. 이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초여름이면 벌써부터 냉동실에 넣어둘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흐뭇해진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재봉틀 옆에 앉아서 할머니 숨소리, 실을 툭툭 뜯어내는 소리, 초크로 면 위에 선을 긋는 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평안을 느끼곤 했는데 한낮이면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위사냥을 뚝 반으로 부러뜨렸다. 그러곤 말없이 곁에 와서 내 작은 손안에 반쪽을 쥐여주었다. ... 여름은 그렇게 언제든 반으로 무언가를 잘라서 사랑과 나누어 먹는 행복의 계절. 간혹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 몰래 속으로 기도를 하고는 했다. 내 수명을 뚝 잘라서 당신께 주세요. 그렇게라도 좀 더 지금일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느리게 녹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우리일 수 있다면.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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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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