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팔릴 리 없는 시대에 책을 만드는 일이란
중쇄미정. 가와사키 쇼헤이
GRIJOA. 2016. 154p. 9,900
겸허해지거라~ 출판은 이제 돈벌이가 안 돼. 그러니 돈 벌려고 안 해도 돼.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게나.
구태여 송인서적 사태를 꺼내지 않더라도 '출판계가 어렵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책을 읽지 않으니 팔릴 리도 없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출판부수다. 2002년 3,246부였던 것이 꾸준히 하락해 2014년 1,979부가 되었다. 초판(1쇄)으로 뽑는 책이 3,200부에서 2,000부로 줄었다는 거다. (*한국출판연감 자료)
우리보다 독서 인구가 많은 일본의 사정도 이와 다를 리 없다. 일본 소형 출판사 말단 편집자인 주인공은 거스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책이 팔릴 리 없어"
출판사 직원의 이야기로 출판한 책 치고는 지나치게 시니컬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책을 넘기던 중, 속표지에서 주인공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표지 그림과 똑같이 영혼리스한 표정으로 이렇게 외친다.
"그래도 난 책을 만들 거야"
1. 소형 출판사에서 일하는 말단 편집자의 업무가 이야기의 골격이다. 명랑한 표지에 만화책이기까지 해서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나름 편집자의 전체 업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입고-교정-기획회의-유통-원고 독촉-결산의 순서로 끝없이 깨지는 편집자의 일상을 담았다. 쉼없이 등장하는 각주도 깨알 포인트. 술술 읽히고, 재밌다.
2. 더불어 출판계의 암울한 현실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음 책을 내야만 돈을 받을 수 있는 유통 문제를 조금 더 다뤄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분량에 비해 꽤 많은 것을 담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렇게 죽도록 어려워ㅠㅠ, 하며 징징대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표정에 깊게 배어있을 뿐이다. 질척이지 않으니 깔끔하고, 곱씹어 보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극적으로 담은 것이 편집장 캐릭터이다.
3. 편집을 하다 모든 일에 달관하는 법을 깨달은 듯한 그녀는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하는 주인공의 말에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된 거야"라고 답하는 시니컬의 끝판왕인 그녀는 왕년에는 명편집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고. 주인공을 위로하고 때로는 다그치며 망해가는 출판사를 이끄는 그녀의 대사는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p.29)
독자로부터 돈을 받는 시대는 슬슬 끝나가. 책을 위한 책을 편집해. (p.40)
아니 잠깐. 언제 누가 ‘잘 팔리는 책’을 만들라고 했어? 우선 ‘팔 책’을 준비해서 유통사에 납품하는 게 일이잖아? (p.54)
무엇보다 소제목이란 건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일 뿐이야… 비위 맞춰서 키운 독해력은 결국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해. (p.127)
4. 어쩌면 편집장의 그 여유는 그보다 더한, 후반부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사장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서두에서 인용한 출판은 이제 돈벌이가 안 되니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라하는 말을 뱉은 그 캐릭터 말이다. 그는 산을 팔아 적자를 메워보겠다는 말로 주인공을 벙찌게 만들고 홀연히 사라진다. 팔리지 않을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책을 만들겠다는 편집자, 그런 주인공에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편집장, 그런 직원들에게 대놓고 돈 벌 생각은 하지 말라는 사장. 이들이 만년 사양 산업으로 꼽히는 출판계를 받치고 있다.
5. 그런 출판사에 있어 '중쇄'란 단순히 책이 팔리는 기쁜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중쇄를 찍느냐 못 찍느냐는 생존과 직결된다. 초판을 털어내면 겨우 제작비를 똔똔이 할 수 있으니, 중쇄를 찍어야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중쇄미정'이란 제목은 돈 벌기 요원해보이는 주인공 출판사의 현실이자, 가파른 내리막을 마주한 출판계의 미래를 오롯이 담은 좋은 제목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