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가 해야 할 일들
조기 진통이 오면 보통 수축 억제제를 중단하고서도 진통이 없는지 검사해서, 문제가 없을 때 퇴원 절차를 밟는다. 아내는 약을 떼자마자 곧바로 진통이 시작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듯싶었다. 트랙토실은 한 사이클에 이틀을 맞을 수 있고 가격은 60만 원이다. 그리고 아기는 아직 22주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만일 34주까지 퇴원하지 못하면 42 사이클의 트랙토실을 맞아야 하니 트랙토실 비용만 해도 2500만 원이고 입원비는 별도다. 돈 열심히 벌어서 이런데 쓰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아내도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혼자 벌어서 아파트 대출금과 병원비로 써야 한다. 이런 것이 아버지의 책임감인가. 현실은 매섭다.
아내에게는 자궁 수축을 안정화시키기 미션이 생겼고, 내게도 미션이 생겼다. 아내 입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 챙겨 오기. 환자 뒷 바라지는 처음이었는데 장기전을 대비해야 하니 생각보다 필요한 게 많았다. 속옷, 수건, 간식거리, 영양제, 가습기, 슬리퍼, 보호자 침구 등... 차가 필요했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도 병원 출퇴근해야 할 텐데 운전을 해야 했다. 나는 운전 연수도 마치지 않은 13년 차 장롱면허 왕초보 운전자다. 아직 혼자 도로에 나가 본 적도 없었다. 예정보다 좀 이르기는 했지만 새벽에 차 없을 때 운전 연습 겸 차를 가져오면 되겠다 싶었다. 양수가 터질뻔한 위기를 겪고 나니 처음으로 혼자 도로에 나가는 경험 따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첫 운전은 몇 가지를 빼면 순탄했다.
아직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려서 시야 확보가 어려웠던 점
그래서 의도치 않게 차선을 잘못 타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까지 다녀온 점
톨게이트 앞에서 차선변경하다 접촉사고 날뻔한 점 (화물차 아저씨 죄송합니다. 제가 서울 가면 안 되는데 서울 가는 길이라 당황했어요)
이런 사소한 어려움들만 빼면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으며 병원 골뱅이 주차장도 긁지 않고 들어왔고, 연습 삼아 왕복으로 병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해봤으니. 이 정도면 사고 없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장하다. 합격점을 줄만한 첫 도로주행이었다. 물론 주차는 조금 더 연습해야겠다.
앞으로 출산까지 4 달이다. 진통이 너무 빨리 와서 남은 날이 많기는 하지만. 난 이미 120일간 병원 출퇴근하며 출산의 그날까지 버틸 준비가 되어있었다. 안정적인 병원 출퇴근을 위해 스파르타식 운전 연습도 마쳤으며, 병원 식단을 보충해 줄 영양제와 간식들도 준비가 되었고. 아내에게는 병원에서의 긴 시간을 견딜 만화책을 쥐어 주었다. 병원에서의 날들이 편안하지만은 않겠지만 아기를 기다릴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기에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조금 허탈하게도 우리는 세 번째 검사에 퇴원하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진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경과를 지켜봐도 괜찮겠다고 하셨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에 오기로 하고 먹는 약을 손에 들고서 퇴원을 준비했다. 만화책은 1권까지 밖에 못 봤고 간식도 한 입 밖에 못 먹은 것 같은데... 감사한 일이지만 일주일도 안되어 퇴원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스위트홈으로 돌아간다니 행복하기도 하고 많이 좋아졌다니 안심이기도 했다. 우리의 병원 생활은 싱겁게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