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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주부로 살아보렵니다: 30주차

육아휴직 금방 다녀올게요

by 퇴근은없다

회사 회식 자리에서 MBTI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도 서로의 MBTI 이야기를 하다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지겹기도 했으나 사실 MBTI를 좋아하는 나는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면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조용한 줄 알았던 동현님이 시작해 버렸다. 밖에 며칠 안 나가면 병이 난다고. I라 생각했던 동현님은 사실 파워 E였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며칠 밖에 안 나간다고 병이 난다고? MBTI에 환장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말하고 싶은걸 꾹 참았으나 나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는 평생 집안에만 가둬두어도 행복한데요. 제발 누가 저 좀 집에 가뒀으면 좋겠어요'


나는 맛은 잘 모르지만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재료를 쫑쫑쫑 썰어가지고 순서대로 삶고 볶고 비비고 하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옆에서 잘 먹어주는 사람도 있다면 이렇게 즉각적으로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또 없다. 게을러서 집은 지저분할 때가 많지만 정리하는 것은 좋아한다. 줄 세우고, 숨겨두고, 더 효율적인 동선을 생각해서 배치를 바꾼다. 집안이 정리되는 만큼 마음도 정돈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정리와 청소만큼 좋은 일은 없다. 청소를 끝내고 편안히 앉아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인생에 그런 사치가 또 없다.


나는 육아도 좋아할 것 같다. 말은 무슨, 아직 목도 못 가누는 작은 사람의 하루 전부를 내가 관리해야 한다. 귀여운 아기와 먹고 자고 싸고를 같이 하다 보면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클 테고. 하루가 다르게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질 거다. 살면서 이만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회사 일 열심히 해서 회사 매출이 몇백억 몇천억이 늘어났대도 나에겐 시원치 않을 일이다. 혼자서 해낸 일도 아닐뿐더러 내 돈도 아니고 일만 더 많아질 거다. 내가 좋아하는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겠지. 퇴사하면 나도 잊히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낡고 오래된 재무제표에 숫자로만 남을 그런 일은 나에게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어찌저찌 사회생활 해내고 있으나 역시 나에게는 가정주부가 천성이다.


사람들이 공동육아니 독박육아니 하는 말을 많이 한다. 애초에 이런 말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인간은 한 가지 일만 하기엔 적합하지 않은데,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육아만 한다. 한 가지만 하고 살면 사람은 병이 난다. 그리고 이렇게 한 가지만 하고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또 안타깝다. 육아는 본래 좋은 것이어야 하는데, 세상에 싫은 것들만 넘쳐나서 어떻게 되려나.


주부가 천성인 나는 일만 많이 하던 일상에서 잠시 육아만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육아 휴직이 당연하기보다는 감사한 일이 되고, 일을 쉰다는 것이 한 켠으로는 불안함이 된다는 점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육아휴직을 통해 이렇게라도 균형을 맞출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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