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함께한 결핍들에서 해방되는 방법까지
남편은 나에게 연구대상 0순위이며, 언제나 글감에 대한 영감을 준다. 오늘도 나는 잠 못 드는 밤, 새벽 1시.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이 감성을 글로 남겨 본다.
잠이 안 오면 괴롭지만, 이런 날 특히 글이 잘 써지기 때문에 오늘따라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남편과는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덟 번의 해를 지나 보내고
올해로 아홉 번째 해를 함께하고 있다.
나는 매년 내가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남편도 그렇다.
그건 아마, 나나 남편이 매년 다른 사람이 된다기보다는 바라보는 시각, 관점이 달라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거나 때로는 좁아지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한 말이지만 번뜩하며 깨달은 아주 감명 깊은 내용이 있었는 데. 그것에 대하여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친구도 나도 어릴 적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것이 나이 30대를 지나는 지금까지 이어져, 누구에게든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은 애정결핍이나 인정중독에 이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참 오랜 시간,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가에 맞추고 휘둘리며 살았다.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내가 크게 다른 것 같다고 20대 때부터 느꼈었는 데, 그 이유가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언제나 나보다 남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집에 오면 더 공허한 내 모습이 싫었다.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혼자 남은 내 모습이.
그나마 그중에서도 내 모습 그대로 유지시켜 주는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더 마음이 가고 끌렸던 것 같기는 하다.
그렇게 보낸 20대 시절의 , 남편을 만나면서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결혼을 하면서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앞으로 더 많이 달라질 것임을 느꼈다.
깊숙이 매워지지 않는 외로움과 애정결핍과 인정중독, 그리고 피해의식 등으로 이루어진, 내 마음의 깊은 구멍이 어느 순간 많이 메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는 자주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그런 나 자신을 못마땅해하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서도 계속 더 깊이 파고 들어가던 구멍. 정말 오랜만에 들여다보니 얕아진 그 깊이를 오늘 알아차렸다. 꽤나 오랜 시간, 그 구멍에서 삽질하지 않았구나.
나를 나로 살게끔 도와준, 남편의 기복 없이 늘 적당하게 주어지는 관심과 사랑에 대해서 오늘 짚어보고 기록해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나 스스로를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지라도,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솔직하고 선을 잘 몰라서 말실수를 종종 하고 모든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가지 못할지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항상 노력했으니까.
남편은 그런 나를,
내가 별로인 날에도, 내가 썩 괜찮은 날에도 기복 없이 일정량의 관심과 사랑을 준다.
별로인 날에는 ‘사람이라면 다 그래’라고, 썩 내 편 같지 않은 위로와 이해를 주고,
나름 괜찮은 날에도 ‘그 정도는 해야 내 마누라지’ 같은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해준다.
그게 사랑인가?라고 묻는 다면,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끼면 그게 쓰레기라도 사랑인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로 사랑을 아무리 주어도 전혀 눈치도 못 채는 사람이나, 혹은 상처나 혐오로 느끼는 사람도 있듯이. 사랑이라는 게 그냥 받는 사람 마음이라고 생각하니까.
말 한마디에 하늘 뚫고 우주로 날아가거나, 말 한마디에 지옥까지 떨어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다소 무심하더라도 결국 내 편이라는 믿음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달콤한 사랑의 말보다.
매일매일 일관성 있게 쌓이는 내 편이라는 믿음이 약 8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며 그 어떤 다정함보다 더 강력하게 나에게 신뢰를 주고 나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넘치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남편의 일관된 사랑이 나를 우주로 날아가지 않게,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상에 온전히 설 수 있게 해주는 단단한 지반이 되었다.
남편의 일관된 사랑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좀 필요하긴 했다. 초반에는 서운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외로웠다. 하지만 남편이 살아온 인생을 알아가며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남편을 가장 많이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내가 되면, 그때부터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온전히 받을 수 있어지는 것 같다.
남편은 어떤 말들도 결코 나를 위해서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느끼는 바를 말한다. 어떤 날에는 서운하더라도 결국에는 내 편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상처주려하는 게 아님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해나 상처를 만들지 않는다.
어쩌면, 절대로 나를 공격하지 않는 영원한 내 편이 누구냐 한다면, 남편뿐일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 번씩 둘이 싸우는 날이면 우리는 적이 되기도 한다. 싸워서라도 서로의 이해를 맞춰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나는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내 생각과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다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되게 좋은 사람이거나 되게 별로인 사람이거나 어떤 프레임에 가둬놓고 보지 않는 다. 이렇게 저렇게 해라 잔소리 없이 바라는 것 없이 그렇다고 '네가 최고야'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말들도 없지만, 그저 바라봐주는 남편 덕분에. 나는 특별히 어떤 사람인 척 안 하고 그냥 나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행동해 볼 수 있는 내면이 아주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 그렇게 나는 ‘나’로 지상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살아갈 수가 있다. 내가 어떤 모습의 어떤 사람이든, 그냥 나라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을 주는 남편 덕분이다.
경험한 바로는 이유 없는 지지와 사랑을 주는 사람이 세상에 딱 한 사람만 있어도 내 모든 세상이 달라진다.
매워지지 않는 깊은 구멍이 있는 '예전의 나'같은 사람들은 사랑받기 위해, 더 사랑받기 위해 항상 애를 쓴다. 넘치게 주면 언제 줄어들까 불안해하고 계속 확인하며 상대를 달달 볶는 다. 부족하게 주면 끊임없이 목마르고 서운해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 노력을 스스로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 사랑을 안 주면 결국 혼자 지쳐버리기도 한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혹은 나를 딱 그만큼만 사랑하는구나?’하다가 그마저도 계속되면 상대는 공격하지도 않는 데 혼자 상처받을까 방어적이 된다. ‘그럼 나도 안 줄 거야, 받은 만큼만 줄 거야’하며 계산하다 지친 나머지 그저 체념하고 모든 걸 내어주다가 금세 고갈된 텅 빈 마음으로 갑자기 이별을 고한다. 물론 이 과정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얼마나 긴 과정이 될지언정 끝은 이별이다.
그런 출구 없는 구멍을 매워준 것은 남편의 기복 없는,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이다. 결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름길이 없다. 달콤한 것으로 하루아침에 매워진 구멍은 다음날이면 더 깊이 파인다.
나는 매워지는 지도 모르게 남편이 몰래몰래 아주 조금씩, 아주 단단하게 덮어두었다. 이제는 내가 삽질을 해봤자 모종삽정도 들고 설치는 정도니까, 깊이 팔 수도 없고.
남편은 꾸준하게 무심하면서도 일관된 사랑을 언제나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랑이면 사랑이고 아니면 아니지 무심하면서 일관된 사랑이 무엇이냐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야근하고 집에 오면 힘들지? 고생했어라는 말 대신 내가 먹고 싶은 요리를 완성해 놓고 배가 고파도 안 먹고 10시까지 기다렸다 함께 먹는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퇴근하면 우리 회사까지 약 1시간 반 거리를 운전해서 데리러 온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분명한 사랑이지 뭐가 무심하냐 할 것이다. 과대포장은커녕 포장지가 하나도 없는 선물을 받아보았을까. 그런 선물을 받으면 보통은 선물인지 잘 모른다. 내가 그랬다.
밤 10시에 함께 먹는 저녁이 바로 그런 선물이었다. 남편은 내가 올 때까지 운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강아지 산책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내가 오면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게 '밥 먹자'라고 말한다.
정말 오다 주웠어의 교과서 같은 사람이랄까. 실제로 정말 자기가 대단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도 안 하기 때문에 생색은커녕 포장도 안 하고 그저 “밥부터 먹자”가 끝. 안 힘든 척하는 거지 매일 그러면 당연히 배고프고 힘들지 하겠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뭐가 힘든 거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데리러 오는 날도 비슷하다. 시간만 나면 회사까지 데리러 오면서, ‘퇴근하면 전화하겠지 ‘하며 야근이 빈번한 회사인데도 무작정 기다린다. 데리러 와서는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안 해서 내가 지하철을 타버린 적도 있었다. 만나면 역시 '고생했어, 힘들었지'같은 건 아니고 '배고프다, 밥 먹자'가 끝.
그래서 이 사람의 세상에 내가 1순위구나,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모든 걸 행동으로 말하니까 내가 해석해 내야 했다. 그냥 말로 했으면 좋았을까? 싶지만, 말했듯이 넘치는 사랑은 불안한 법이다. 계속 말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사랑한다고 한 적도 없고, 편지 써달라고 연애 때부터 말했지만 생일에 한번 써줄까 말까 해서 8년 동안 받은 편지가 5통은 될까. (다행히 편지에는 사랑한다고 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떤 사람이, 나만을 위해, 나의 평범한 일상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만큼이나 쏟아줄까.
매일매일 나를 위해 시간을 내고 나에게 대부분의 일들을 물어보고 시작하는 사람.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이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까?
남편은 나에게 잘해주는 걸 두고 득과 실을 계산하지 않는다. 자기가 손해를 본다거나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거나 대단한 일이라며 생색을 내거나 하지 않았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거라고 정말 몰라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답한다. (사랑하니까 안 힘들지 같은 식으로만 말해도 그 감동이 백배로 늘 텐데 정말 요령도 없다)
밥 먹었어, 힘들지, 고생했어, 괜찮아, 고마워, 사랑해. 그런 말들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 데,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라고 다그치기도 했었다.
어떤 말보다도 더 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는 데 이미 알겠는 기분. 사랑에 있어서 손해나 이득 같은 걸 계산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니까. 그런 서열도 계산도 없는 그저 사랑하는 만큼 하고 받는 자유로운 관계로 '우리'를 만들어 준 남편에게 정말 고맙다.
나와 너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나랑 너무도 다른 너를 궁금해하고 공부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도 넓어진다. 나를 성장시키는 숙제이자 함께할 때 가장 즐거운 베스트프렌드, 내가 어떤 모습이든 결국은 내 편으로 받아들여 줄거라 믿는 평생 함께할 내 남편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적고 싶다.
(우린 정말 반대인 게, 나는 사랑한다는 말도 표현도 잘하고 자주 한다)
그러나.
혹시, 예전의 나처럼 깊은 구멍에 빠져 매일매일 외로움을 곱씹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 스스로가 먼저 계산 없이 사랑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계산 없이 사랑하기에 상처받을까 두려움이 앞서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깊은 외로움이 있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먼저 손 내밀어 도와주는 게 더 수월한 일이겠지만.. 상대를 구하며 나도 함께 구해지는 경험은 어떨까.
내 구멍을 매워줄 사람만 찾는다면, 정작 누가 손 내밀어도 의심하고 시험하다가 결국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저 누구를 만나든지, 구멍을 메꿔줄 사람을 찾지 말고 나는 곁에 있는 사람의 구멍을 메꿔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한번 돌아보면 어떨까. 그렇게 상대의 깊은 결핍을 이해하고 메꾸며 사랑하다 보면 어느새 내 구멍도 얕아져 있음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