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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Feb 10. 2019

디자이너의 직급

이제부터 대리라고 불러주세요(희희)

작년 10월 이직하면서 처음으로 '대리'라는 직급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내 이름 뒤에 '씨'가 아닌 '대리'가 붙게 되었다. 디자이너 씨로 불리는 몇 년 동안 직급이란 것은 나에게 환상 같은 것이었다. 유니콘이 어떻게 생겼는 지를 맘껏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보지 못한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나는 대리가 된 나를 상상할 뿐, 실제로 대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5개월간 디자이너 대리로 살아본 나는 직급이라는 것의 환상을 떨쳐내고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직급은 유니콘과 같은 환상이 아니라 그냥 어느 목장에 묶여있는 말이나 소 같은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망아지가 되었다.(웃음)


누군가는 너무 비관적인 비유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계속 읽어주길 바란다. 나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나의 비유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설명하고 싶다.


대리를 달자 나에게는 책임이 부여되었다. 그에 따라 나는 마음의 부담을 함께 얻었다. 디자인 업무 외에 검토나 회의 참여, 서류 업무 등의 부가적인 업무들이 추가되었다. 업무적으로 새로운 프로세스 도입을 시도하기 위해 발표도 하였다. 그리고 디자인팀의 의견을 회사 전체(인원이 많지 않다)에게 공지하기도 하였다. 디자인에 관해 여러 가지 검토를 하고 요청을 정리하여 수렴한다. 때때로 너무 많은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나에게 '대리'뿐만 아니라 '님'자도 같이 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대우받는 기분은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겨우 동등해진 기분이었다.


마냥 사원으로서 지시된 일만 수행했던 때와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래, 이제야 걷고 말할 수 있어진 기분이다. 마치 망아지와 같다. 회사는 수익을 내야 한다는 가장 큰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초원보다는 목장에 가깝다. 다만, 망아지 때부터 줄에 매다는 일은 없기에. 나는 작은 목장 울타리 안에 풀어진 망아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승진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더 많은 책임과 직무가 나를 줄에 매단 듯 자유롭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디자이너 대리로서 새로운 공기를 즐기고 있다.





직급을 가지면서 달라진 여러 가지를 정리해보고 싶다. 그리고 대리가 되며 지난 5개월간 나는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이 잔잔해지는 데에는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사원이었을 때 내가 직급에 대하여 오해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내가 진정 직급을 가질 수 있는 준비를 막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글로 남기고 싶다.


대리를 달면 '대리'가 되는 줄 알았다.

'대리'를 달아도 '대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서른, 엄마, 디자이너, 대리 같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서른이 되어도 서른처럼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엄마로 불린다고 엄마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도 진정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까. '대리'도 그런 것이다. 우리의 성장은 누구도 모르게 아주 조용하고 천천히 진행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아차리는 것이다. 오 이제야 대리 같구먼!? 하고..


대리가 되면 '대리'로 알아줄지 알았다.

대리로 불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대리로 불러준다고 대리로 인정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회사에는 사원이 많은 편이다. 그들이 모두 나를 대리로 인정하고 있을까? 윗사람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의 인정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윗사람들은 대리가 되면 대리의 업무를 주고 대리의 책임을 부과한다. 그것은 나름의 인정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배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인정은 업무량이나 성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 대리에게 맞는 포용력과 리더십을 갖추었을 때가 아닐까? 나는 아직 진행 중인지라 정확하게는 어렵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분명 그랬다. 디자인적인 스킬이나 감각의 문제를 떠나 윗사람을 진정 인정하게 되는 것은 포용력과 리더십, 분명한 태도, 흔들림 없는 결단력 같은 것이었다.


대리가 되면 무언가 더 어렵고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될지 알았다.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원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냐 하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회사는 직급에 관계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해 내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모두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크기로 보나 중요도로 보나 어려움으로 보나 사원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다만, 사 원 때에는 내가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일이 적었다. 지금은 내가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검토와 보고하는 업무들이 그러하다.


미팅에 참여하는 일이나 발표하는 일, 그리고 문서작업이 많아지면서 정작 디자인 업무에 더 신경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승진할수록 디자인 작업이 적어질 것이라 예상된다. 디자인 툴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어가니, 나중엔 디자인 툴을 잘 다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손 스케치이다. 더 늦기 전에 어서 손 스케치 학원을 등록해야겠다!


대리가 되면 좀 더 편하게 일하며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을지 알았다.

더 편하게 일할 줄 알았다는 것은 업무 외 다른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 프린터에 용지 채우기, 화분에 물 주기, 손님에게 차 내오기, 전화받아 연결하기 등등(중소기업에 해당됨). 솔직히 말하면 대리 즈음되면 손 털고 싶은 귀찮은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사원을 알차게 보낸 나는 청소를 아예 손 놓기엔 역지사지가 잘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최소한의 일들은 함께 사용하는 공용 공간으로써 어느 정도의 매너를 지키기로 했다. 매너이기도 하지만 본래 지저분한 것을 잘 못 보는 성격이기도 하다. 탕비실이나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아침마다 핸드 청소기를 내 주변 넓게 조금 돌리고 좀 시들어 가는 듯한 나무에는 가끔 물을 주기도 한다.


대리가 되어 사원보다 크고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면, 연봉이 많이 오를까? 아니, 연봉은 회사의 문제인 것 같다. 일하는 것과 급여는 비례하지 않는다. 연봉협상을 잘하거나 회사가 연봉을 잘 주거나. 연봉은 두 가지의 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이지, 일의 양이나 크기 등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회사마다 연봉 테이블의 차이가 크다. 결정적인 근거로 사람마다 능력을 인정받아 연봉이 자연스레 높아진 경우보다는 회사 연봉 테이블에 맞추어 올라가거나 몇 번의 협상을 통해 연봉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대리가 되니 회사생활이 더 즐거워졌다. 승진의 이유보다는 새로운 환경과 상황이 재밌는 것 같다. 역시 매일 같은 업무와 환경에 있는 것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즐거움은 얼마나 지속될까?


처음에는 대리가 된 내가 어색하고 낯설어 동료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나의 능력에 아직은 의심이 많기에 맞지 않는 직급이란 생각도 했다. 책임감과 부담감에 스트레스도 많아지고 힘들었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 내가 생각하는 대리의 길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모두가 같은 '훌륭한 대리'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대리'가 되어가는 것이다. 포용력 있고 부드러운 대리, 리더십 있고 어려운 대리, 섬세하고 똑 부러진 대리 등.


아마도 나는 재미있고 편한 대리와 일을 즐기고 의견 표현이 거침없는 대리 즈음일까. 물론, 주관적이다. 나는 어떤 대리가 되어가는 것일까? 나는 진정 대리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몇 년 후, 나의 대리는 어떤 모습일까. 설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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