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다. J형인 사람은 계획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나는 J형을 가졌지만, 이를 부정했다. 모든 변화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싫어하지만 별문제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그러나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의연한 대처란 싫음 다음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싫어한다는 사실이 우선된다면, 싫음이라는 선순위를 외면할 수 없다. 의연하게 대처한 후 통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싫은 감정이 우선하니 무결한 대처란 불가능하다. J임에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결코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계산할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욕심은 그대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알고, 통제 하기를 바란다. 계획대로 이행되고, 차질 없이 진행되기를 너무나 바란다. 인간의 연약함일까 싶지만, 애석하게도 전지전능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양상은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누군가와 하기로 한 약속, 일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함께 하기로 했는데, 상대의 마음이 달라질 때 마찰이 생긴다. 원한 것은 이게 아닌데, 상대가 다른 것을 원할 때. 단순히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가, 민트 초코를 먹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음에도 완전히 다른 음식을 제안할 때 마찰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순댓국 같은 말도 안 되는 변화구를 맞는 거다. 변화구가 들어오는 순간 프로선수가 아니고서야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그때부터는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통제 밖의 수준이며 불가능한 영역이다. 타인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다. 상대가 변화구를 거두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쓰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속상하고 어려운 것이다. 바라지 않으면 괜찮은데 우리는 바란다. 상대의 마음을 바꿈으로 다시금 우리의 관계가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편함을 느끼기 때문일 테다. 관계까지도 문제가 없도록 통제하고픈 우리들의 본능. 어디서 시작한 본능일까.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이라 느껴진다.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부정하는 이유는 통제 불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려 할 때 누군가 용기 있다 말해줄지 몰라도, 대부분은 무지하다고 할 테다. 용기와 무지는 정말 얕은 차이를 가진다. 혹시 내가 지금 통제하려는 것이 무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지 점검할 때다. 우리는 전지전능하고픈 본능에 따라 통제 밖의 영역까지도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고 싶다는 것 위험한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러 가던 길에 이런 생각이 찾아왔었다. ‘인간은 왜 영화를 만들까.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갈까?’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힌트를 얻었는데,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으니 하나님의 창조력과 창작욕구를 닮은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실제로 물려받지 않았어도 맥락은 동일하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모방함으로 창작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는 만드는 재능이란 인간만이 가진 것이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집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물에게 창작욕과 재능이 있었다면, 전 세계적으로 다른 형태와 다양한 방식의 결과물이 발견되어야 마땅하다. 존재하지 않음으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강조된 셈이다. 만물 중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가 창조의 모방이라는 것 그리고 창작욕구가 있다는 사실로 하여금 안심을 느낀다. 안심은 다짐으로 이어진다. 창조에 도전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을 혁신이라 부른다. 변화가 없으매도, 시도했다는 사실로 박수를 받는다. 세상에서 제일 쿨한 일로 여겨진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혁신에는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자본주의에선 자본의 크기가 대단함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이 있다. 실패한다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도 만으로 박수받는 것은 무의미하다. 창조라고 불리는, 희대의 천재가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단 한 가지도 성공한 사례는 없다. 인간은 창조가 불가능하며, 천재들의 결과물은 발견과 발명 수준 안에 머문다. 시도와 혁신, 희대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네 삶에서 매일매일 만들어지는 작은 움직임이다.
매일매일 누군가의 손에서는 무언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사실을 무시해선 안된다. 손을 건네어 일으키는 것, 아픈 이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 모아둔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것, 세상 명예를 뒤로하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등의 작은 움직임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네 삶에는 작아서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이들이 분명히 함께 살아가고 있다. 작다고 표현했으나, 실로 거대하다. 우리가 거대한 혁신이나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그 또한 크게 보일 수 있으나 작은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영역에 혁신 가능성이 보인다면 뛰어들어 해내야 한다. 그러나 거대하고, 대단하고, 자본과 인력이 풍족한 것이 최고의 영역이 아님 강조하고 싶다. 창조와 같은 임팩트는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마음 깊이 새기고, 매일매일의 작은 완성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들의 존재가 가치를 가지는 이유라고 믿는다. 이는 대단한 위로가 된다. 큰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 이 위로는 큰 것에 도전하지 않았다고, 가치가 절하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매일의 작은 완성이 점차 서사를 이뤄간다는 사실에 집중하자.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방대한 서사에서 오늘의 사건은 미미할 뿐이다. 작은 것이 작지 않고, 큰 것이 크지 않다. 우리네 삶은 지속함으로 더욱 큰 가치를 만든다. 매일매일 작은 것부터 만들어보자.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