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알종알 조잘조잘 설탕남
아이는 해맑고 다정하다.
16개월 아기 시절, 선생님께 ‘다정하다’는 피드백을 받고 의아했었는데
다섯 살 (만 4세)인 지금 할 줄 아는 말이 많아지니
확실해졌다. 얘는 인간 설탕이었다.
- 음마 차도 쪽은 내가 걸으께
- 음마 공사장 돌 떨어지면 혹 나 내가 공사장 쪽에 서있으께 혹 나면 엄청 아파
- 음마 맨홀 밟으면 떠러질 수 이써 피해 가자 내 손 자바
- 음마 커피 머거써? 왜 안 머거써? 내가 사주께 나가자
- 음마 차가운 거 들고 있을 수 이써? 내가 들게 엄마 손 차갑다 내 손 자바
- 음마 밥 머거써? 그런 거 말고 밥먹쨔 내가 주께 가치 먹쟈
- 음마 횡단보도에서는 내 손 노치마 음마 넘어지면 차에 치여
- 음마 시장에는 나 데려가 혼자 다 못 들어 내가 들어주께
- 음마 우산 무거우니까 내가 드께 음마는 내 손 꼭 자바
온갖 힘든 상황과 위험으로부터 엄마를 지켜주는 건 물론이고,
- 음마 오늘도 예쁘네
- 음마 보고 싶으면 지금 잡은 손 느낌 기억하며 기다려
- 음마가 너무 조아서 손을 놓을 수가 업써
- 내가 행복해야 음마가 행복하니까 나 행복하게 지내께 걱정마
- 음마가 예뻐서 뽀뽀해 줘야겠써
- 음마가 내 엄마라 너무 조아
설탕 같은 말을 뱉어내기 바쁘다.
설탕이 인간이라면 이 아이겠지…
그럼 이건 자랑하는 글이 되었어야 한다.
헌데,
사랑스러운 아이를 키우는 나는 왜 매일 지칠까?
다정함의 이면엔 요란함이 숨어있다.
다정한 아이는 그만큼 요란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이 길을 걷더라도 그냥 가는 법이 없고
더운 여름에도 손을 꼭 잡고 가고
집에서는 꼭 붙어 안겨있다.
우산을 아이가 들어준다면?
나는 쪼그리고 가야 한다.
맨홀마다 피해 다닌다면?
우리나라 길거리에 맨홀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될 것이다.
옆에 있으면 귀가 쉬지 못한다.
주방에서도 조잘조잘 걱정하기 바쁘고
음마의 요리 실력을 예찬하며 하나씩 얻어먹는다
그렇게 내 유일한 힐링인 요리 시간도 모조리 뺏겨버린다.
요란한 하루가 끝나고 되새겨본다.
왜 나는 오늘도 아이의 다정함을 즐기지 못했을까?
내일은 꼭 다정함에 감사해야지.
하지만 또 다음날이 되면 적응하지 못하고 또 지쳐버린다.
다정함의 반복,
나는 이 굴레에서 어떤 스탠스로 살아가야 하는가?
인간 관계에서의 적당한 거리 유지는
성인이라면 상식처럼 지켜진다.
가까운 거리는 쉽게 지치고
먼 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
아이는 이 거리를 알 수 없다.
그저 행복하고 좋은 이 마음을 사정없이 표현하다가
화가 나면 와악 화를 내고
슬프면 으앙 운다.
아이라서 그렇다기에
가장 가까운 이는 지칠 수밖에 없다.
- 감사해야지
- 즐겨야지
결심은 잠깐 긴장을 놓는 순간 사르르르르 속절없이 무너진다.
육아가 그렇다.
나도 함께
와장창 화냈다가 으앙 울었다가 꺄르르 웃는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주양육자로서,
상냥한 톤을 유지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엄한 순간에는 적절히 엄한 사람인 척한다.
사실은 내 속에도 아이가 있다.
그래서 미숙한 상대가 더 버거운 것이다.
이제 난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