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철이 되었나 보다. 시장 좌판에 자리 잡은 붉은 색깔 일색의 과일 속 노르스름한 빛깔이 곱다. 반가운 마음에 소담스러운 살구 한 무더기를 얼른 시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7월, 이맘때쯤 살구와 함께 짝꿍을 이뤄 늘 사는 것, 호박잎을 찾기 위해서다.
마침 한 바구니에 2,000원 가격표를 달고 있는 호박잎이 눈에 띈다. 호박잎의 거친 줄기를 연신 다듬고 있는 상인의 손길이 고맙다. 솜털이 얌전해진 푸른 호박잎을 두 바구니 샀다.
살구를 깨끗이 씻고, 연한 호박잎을 알맞게 쪄 쌈장을 곁들여 식탁에 올린다. 7월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살구!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한 입 베어문다. 깔끔하게 미련 없이 과육이 떨어진다. 시큼하고 달큼한 맛의 과육이 깔끔하게 떨어진 살구씨를 한참 바라본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살구와 호박잎을 챙겨 먹었다. 생전에 시큼한 살구가 먹고 싶다. 때깔 고운 살구를 사 오렴, 하시던 엄마. 아이들도 시다는 살구를 참 달게 잡수셨다. 어릴 적 소녀였을 때, 동네 어귀 살구나무를 떠올리시는 것처럼, 곱고 아리땁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시는 것처럼 들리던 엄마의 목소리! 병상에 누워 거동을 못 하시던 때라, 더 마음이 쓰이고 아련한 주문이었다.
즐기지도 않던 살구를 엄마 가시고 나서 먹기 시작했다. 봄철 살구꽃이 그리 예쁜지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엄마를 그리듯 살구씨를 입에 물고 휘감아 굴려 보기도 했다. 복숭아씨와 달리 과육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살구씨 모양을 오랫동안 보게 되었다. 살구씨의 흔적이 마치 굴곡진 엄마의 인생 같아 보였다.
며칠 동안, 냉장고에서 살구를 꺼내 혼자 먹으며 살구씨까지 쓰다듬었다. 혀끝으로 천천히! 마치 엄마의 인생을 반추하듯이! 그것이 살구를 대하는 나만의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호박잎은 어린아이들도 즐기는 별미의 반찬이었다. 얘야, 연한 호박잎 눈에 띄면 사 오너라. 외할머니의 호박잎을 그리며, 푸른 물 익어가던 그 시절을 떠올리듯 주문하셨다. 아이들과 구수하게 잘 드시던 호박잎 따라 다정하던 그때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특별한 호박잎이 된 것이다.
호박잎을 마주하면 자동으로 엄마가 떠오르는 여름 먹거리! 거친 호박잎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줄기의 거친 부분을 정성껏 벗겨내고, 알맞은 시간과 온도로 쪄내고, 고소한 견과류까지 첨가한 쌈장을 만들어 호박잎 쌈을 먹으면 한여름 더위를 물릴 정도로 연하고 구수한 맛에 빠지게 된다.
잎사귀뿐만 아니라 연한 솜털 가득한 줄기에서도 초록물이 배어 나오며 청량한 여름 맛을 선사한다. 아이들은 맛있다를 연발하며 볼록한 뺨을 보고 서로 웃으며 식사를 한다. 그리고 호박잎 쌈을 만들어 주시던, 호박잎을 즐기시던 할머니를 소환하며 그리움을 나눈다.
'함께 먹는다'는 것은 참 대단한 힘을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 기본 요소이면서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는 때마다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삶의 원천이 된다. 같은 집에서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이 '식구'인 것처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어린 동생의 군것질을 위해 오빠가 만들어 주던 뜨거운 설탕물이 흐르던 호떡, 조물조물 말캉하게 무쳐 주시던 엄마의 짙은 가지나물, 따스한 밥을 늘 갓 지어 주시던 시어머님의 고수한 밥냄새, 임신 중 눈 깜짝할 새 먹어버린, 친구가 부쳐주던 빨간 김치전까지... 수많은 음식이 그때, 그 시절 추억을 안고 내 삶을 지탱해 준다. 사랑으로, 우정으로!
특히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울 때면, 엄마와 함께 한 음식이 허기를 채워주는 마법을 부린다. 어김없이 살구꽃이 지천이고, 호박잎 뽀얀 솜털이 나를 혹하지만 엄마의 말씀은 들리지 않을 때, 엄마가 보고파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다. 뚫린 가슴이 시려 몇 날을 잠깐씩 가라앉으면 살구빛 얼굴에 호박잎 손을 가진 엄마 목소리기 들리 듯, 어여쁜 살구와 푸르른 호박잎이 허기를 채워준다. 나의 처연한 마음을 달래준다.
음식을 보면 엄마가 생각나 슬프고, 애달픈 그 마음을 또 음식이 치유해 준다. 내가 사랑받았음을, 내가 사랑했음을 확인하며 꼭꼭 씹어 내 안의 안정을 꾀한다. 늦가을에 떠나신 엄마는 봄,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때마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엄마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그 마음이 더 짙어진다. 때로는 후회로, 때로는 깨달음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나를 에워싼다.
엄마와 마주 앉아 호박잎쌈을 먹고 살구로 입가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살구와 호박잎이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주니 고맙다. 더불어 우리 아이들은 어떤 음식 앞에서 나를 소환해 그리워할까 생각해 본다. 풍요롭게 넘쳐나는 먹거리 속에서 사랑과 정성의 이름을 지닌 나의 음식들이 흐뭇하게 떠오른다. 사랑 주고 가신 엄마처럼 나도 사랑하며 감사하며 7월을 잘 보내야겠다.
이 글은 방금 7월 25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