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거조사-동화사-가실성당-한개마을- 세종대왕자 태실
여행을 앞두고 느끼는 기대와 설렘은 말할 수 없이 흐뭇하지만 이렇게 다녀온 후 정리하는 시간은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한다. 돌아보며 글을 쓰는 지금, 제2의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설가 은희경 작가는 여행에 대해 '여행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이라고 표현했다.
1박 2일에 걸쳐 진행된 이번 여행의 첫째 날 답사지는 '대구 군위 인각사-영천 거조사-대구 동화사-가실성당-한개마을- 세종대왕자 태실'로 이어진다. 10여 년 전부터 전국을 함께하며 고품격 답사에 취해 얼마나 큰 행복과 기쁨을 누렸던가! 인생 행운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답사 모임은 '인천 문사철 답사 기행'이다. 답사 모임을 이끄는 대장님이 퇴임한 후, '퇴우헌 답사회'로 이름을 새 단장하여 활동하고 있다.
새벽 6시에 인천을 출발하여 10시쯤 대구 군위 인각사에 도착하였다.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250'이 인각사의 주소지라니,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저 신비스럽고 놀라운 지명이었다. 인각사(麟角寺)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 고찰로 팔공산의 한 자락인 화산에 자리한 은해사의 말사이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노년에 95세의 노모를 지극히 모시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입적하신 사찰로 유명한 곳인데 직접 마주한 인각사의 모습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그 유명한 삼국유사에 비해 절은 넓은 평지에 그냥 덜렁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절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잘 가꾸어야 할 국가 유산으로써 아쉬움이 많은 모습이었다.
기린의 뿔이란 뜻을 지닌 인각사(麟角寺)에는 여러 중요 문화유산이 있다. 보각국사비는 보각국사 일연이 입적한 후 일연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비는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가 왕희지 글씨를 얻으려는 문인들의 탁본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화나 인위적 파괴 등 훼손 사유는 다양하겠으나 양반들의 욕심으로 비문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다고 하니 더 안타까웠다.
인각사 넓은 터에 극락전, 명부전, 국사전, 산령각 등이 있는데, 특히 국사전이 눈에 띄었다. 국사전 내부에는 일연스님의 진영이 걸려 있고, 인각사와 삼국유사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2008년 발굴조사 중에 발견된 금동병향로, 청동 정병 등 보물로 지정된 인각사 출토 문화재에 대한 설명도 잘 읽어볼 수 있었다.
2023년에 대구광역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극락전과 그 앞에 자리 잡은 삼층석탑, 일연스님의 부도인 팔각원당형의 인각국사정조지탑과 인각사 석불 좌상도 바라보았다. 핸드폰 사진 앨범에서 직접 찍은 그 모습을 다시 보니 그때 지나쳤던 의미들이 새롭게 살아나 선명해졌다.
영천 거조사의 영산전은 1962년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이 확실한 목조건축물은 총 6동으로 예산 수덕사 대웅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임영관 삼문과 거조사의 영산전뿐이라고 한다.
거조사 영산전의 첫 느낌은 수수한 황토의 질감으로 다가왔는데, '국보의 수준을 드러내는 단순 소박한 큰 맛, 단순 명징'을 강조한 퇴우헌 선생님의 설명을 확인하듯 둘러보았다. 건물 전체의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영산전을 측면에서 바라보며 정면 7칸, 측면 3칸, 맞배지붕으로 주심포 양식임을 확인했다.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기와장이 붙여진 7개의 들보도 세어보며 한옥과 문화재에 대한 배경지식도 넓혀 보았다.
영산전에 자리한 526구의 나한상은 다양한 몸가짐 새와 다채로운 얼굴 표정으로 시선을 끌었다. 어마어마한 나한상들이 끝없이 줄지어 나타나 때론 근엄하게, 때론 익살스럽게 우리를 맞이하는 듯했다. 경외감과 귀여움, 진지함과 짓궂음이 수시로 교차되며 나한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분칠하지 않은 소박한 빛깔의 담벼락과 채색되지 않은 화려함, 단아한 모양새와 그 안에 깃든 유서 깊은 전통미로 떠오르는 거조사 영산전이다.
점심 식사 후 대구 동화사에 다다르자 대웅전의 꽃살무늬가 우리를 반겼다.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후 8차례에 걸쳐서 새로 지었으며, 대웅전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문짝은 여러 가지 색으로 새긴 꽃잎을 장식해 놓은 소실꽃살창을 달았다. 기둥은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건물의 안정감과 자연미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퇴우헌 선생님을 따라 인악대사 비각인 인악당(仁岳堂)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악당은 조선 시대 고승 인악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각인데, 이 비는 귀부를 거북으로 하지 않고 봉황(鳳凰)으로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아까 대웅전으로 향할 때, 봉서루(鳳書樓)라는 누각을 지나쳤는데 봉서루의 봉은 봉황을 상징한다. 봉서루의 봉과 동화사(桐華寺)의 오동! 오동나무에서만 산다는 봉황을 생각한다면 인악대사 비각의 귀부가 봉황인 이유를 자연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유롭게 동화사를 돌아보다 동화사 입구 오른쪽 암벽에서 마애여래좌상을 만났다.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모습으로 핸드폰 프사로 간직하고 싶을 만큼 신비로운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보물 제243호. 높이 106cm, 불상에 대해 세세한 내용은 잘 몰라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위안이 되는 얼굴이었다. 불상 주위의 불꽃 무늬, 구름무늬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부드럽고 섬세한 조각이 정교하고 부처님의 명훈가피가 저절로 느껴졌다.
대구 칠곡의 가실성당과 성주의 한개마을을 거쳐 세종대왕자 태실로 향했다. 가실성당은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의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처럼 성스럽고 고즈넉했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외벽과 기와로 얹은 지붕이 동서양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00년의 시간이 흐른 성당 내부는 아치형 창문으로 빛이 스며들어 은은하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성당 마당은 다소곳한 아름다움이 성스러움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조용히 앉아 온종일 기도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성주의 한개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 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 마을인 한개마을은 가을 저녁과 어울려 풍요롭고 단정하고 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큰 개울'이라는 뜻을 품은 한개마을에는 현재 60여 채의 집이 있는데 그중 교리댁, 응와종택, 진사댁, 하회댁 등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회댁이나 월곡댁은 안주인의 출신지에 따라 부른 이름이다. 돌담길을 걷다 보면 고풍스러운 느낌에 취해 아름다운 시골 옛 마을을 산책한 듯 차분해진다.
태실은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씻어서 태항아리에 담아 봉안한 곳인데,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 단종을 합쳐 총 19기의 태실이 모여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족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아기의 무병장수는 물론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곳이기에 고르고 골랐을 명당자리답게 오르는 길이 아름답고 좋은 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산자락 안에 폭 안긴 듯한 태실을 둘레 따라 천천히 살펴보았다. 내려오는 동안 날이 저물어 등불이 켜졌는데, 오를 때는 보지 못한 태항아리 모양이었다. 등불이 오랫동안 빛나기를 기원한다.
새벽부터 시작된 답사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가서 보고 조사한다는 답사(踏査)의 의미에 맞게 종일 바쁘게 움직인 하루였다. 어느 것 하나 놓칠세라 꼼꼼하게 기록하고픈 마음으로 내일을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잃어버린 시간>의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했다. 이번 답사 여행 후 나는 얼마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삶을 바라보게 될까? 세상은 넓고, 보고 배워야 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뿌듯한 마음으로 내일의 답사가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이 글은 방금 11월 2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로 채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