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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렌 Apr 01. 2019

유기견 보호소를 방문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하재영

작년에 읽은 책 중 인상적이었던 책은 여러 권 있지만, 그중 나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킨 책을 꼽으라면 아마도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꼽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털끝만큼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특별히 개들을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므로, 아마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문제의식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엔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애써 외면하는 대개의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무관심 속에 그들은 지금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고 있다. 어쩌면 차라리 생을 마감하는게 그들에겐 나으리라.


책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팩트 중에 단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개는 현행법상 식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기서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식용으로 기르는 소나 돼지, 닭은 식품으로 인정되는 만큼 법적인 관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먹는 사료도 규제되고, 축산 농가의 위치도 규제되고 시설도 규제의 대상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위생과 동물복지 - 그것도 복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 차원의 관리는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여름날 음식점 뒷길을 걷다가 길가에 내어진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 인상 찌푸려본 적 있는가? 그것이 가진 형체의 혐오스러움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것을 어떠한 생명체가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이것은 식품 공장에서 소시지를 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어릴적 괴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고약한 냄새에 썩어빠진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면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그마저도 그대로 먹으면 죽으니까 항생제를 섞어, 죽지 않게끔만 먹으며 매일을 버텨야 하는 어느 불쌍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떠한 생명체에게 갖는 자그마한 연민이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배려, 모두를 배제한다면, 그래서 공장에서 생산되는 무생물의 주방도구나 가전제품과 동일하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생산성을 달성했다면,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생산품이 고통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자아를 가진 어떤 생명체였다면, 심지어 그러한 생산의 전 과정 내내 살아서 그 고통을 다 맛보아야만 했다면, 그것이 느껴야 할 고통의 크기는 과연 어느 정도 일까.


합법화하거나, 그게 안된다면 먹지 말거나, 둘 중 어느 쪽도 정부가 선택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개고기 시장은 음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상상밖의 비극들이 자행되고 있다. 이 문제의 본질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고기는 문화적 다양성의 차원에서 먹고 싶은 사람은 먹을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었다.


이 책을 읽고, 단연 올해 첫번째 계획 중 하나는 유기견 보호소에 봉사를 가는 것이었다. 내가 개를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 무게추를 조금이라도 반대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나는 늘 균형을 맞추고 싶은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이것도 나를 위한 행동이다.


왜 우리는 늘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동정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까. 이들을 위한 자명한 논리는 무엇일까. 나는 왜 약자에게 마음이 가는가. 나는 왜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일까. 나의 이런 행동들은 반대편의 그들과는 다르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질문은 끝이 없지만 세상에는 답이 없으니 결국 생긴대로 살게 되는 걸까, 이내 원점으로 돌아온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운동가였던 사울 알란스키는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양편 모두 타당한 점이 있으니 모두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식의 중도적 자세를 비판한다. 그러한 태도는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회의 균형을 맞추고 싶다면, 가운데에 서 있기 보다는 어느 한쪽에 서 있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어쩌면 우리가 중도적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무관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대상에 흠뻑 취해있다면, 어느 대상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자세히 보았다면, 그래서 그것이 더이상 타자로만 남아있기 보다는 내 안의 일부분이 되었다면, 그때에도 나는 모두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쉬이 말할 수 있을까.


누구도 충분히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철저히 고통속에서 죽음보다 못한 오늘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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