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에서 살아가는 법
우리 모두는 이제 그동안 익숙했던 세상과의 작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일도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익숙함과 작별을 해왔으니까. 그리고 이번 작별의 낯섦도 곧 익숙한 일이 될 것이다.
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임계점이라고 이야기하는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이미 몇 년전에 400ppm을 넘었다. 그리고 현재도 증가하고 있다. 지구 평균기온 역시 산업화 이전보다 1°C 증가하였고, 이미 배출하고 있는 온실가스에 의해 최소 0.5°C 정도의 상승은 이미 예정되어있다. 1~2도 정도의 차이가 별거 아닌것 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이다. 지구촌 한 지역에서는 거의 온도변화가 없는 반면 어느지역에서는 급격하게 증가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무언가 대책을 세우자면 지금 당장 급진적인 변화를 꾀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사회적인 지지나 인식은 한참 뒤떨어져 있기에 가망이 없어보인다. 사실상 이제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작별을 준비해야 한다. 어느날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하지 않도록, 그간의 추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나보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간 서서히 작별 해오고 있었다. 이별을 앞둔 연인간의 연락이 뜸해지듯, 당연한 줄 알았던 파란 하늘은 점차 뜸해진다. 이미 마음에서 멀어진 관계가 그렇듯, 곁에 있던 맑은 계곡과 늘 보던 동식물들도 점점 더 멀리 가야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이런 것들 없이 사는 법을 점점 익혀가는것 같으니까.
매일 아침 미세먼지를 확인하는게 일상이 되었고, 해변에 가면 쓰레기들을 마주하는 것은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더이상 버틸수 없을것만 같은 더위는 에어컨으로 손쉽게 대체하고, 이따금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지구 반대편의 기후변화나 먼바다의 플라스틱 이야기는 카페의 화이트노이즈처럼 자연스레 흘려진다. 우리는 이런 생활에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함이 곧 낯섦이 되고 낯선 일들은 곧 익숙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Josh Fox의 영화, "How to let go of the world, and love all the things climate can't change"라는 기다란 제목은 이러한 맥락을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그만 보내주고, 기후변화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정도로 읽힌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알것만 같다. 약간은 체념하면서, 그럼에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 발견하는 건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탐색.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수 없으니까. 사는건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절망 속에서도 서로 돕는 사람들,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단합하려는 시도들, 그렇게 생기는 작은 성공들. 여전히 이런 변화는 너무도 작아서 대세를 바꿀수는 없지만, 그런 대세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런 대세를 다루는 법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바꿀 수 없는 세상 앞에 무력함을 느끼기 보다는 그 앞에 선 우리의 행동 자체에서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고, 희망은 바뀌지 않는 미래가 아니라 변화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에 있다고, 그리고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내가 아무리 힘써도 모든 건 변화하고 말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작별 하나하나에 가슴 아파 하겠지만 이런 가슴 아플 수 있음을 수용하기로 한다. 거기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을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채식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다. 흔히 생각하지 못하지만 채식은 개인이 기후변화에 대해 가장 큰 파급력을 줄 수 있는 행동이다. 육식위주의 식생활은 기후변화에 대한 기여도가 최대 18%에 이른다. 이정도 비율은 지구상의 모든 자동차 배기가스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인 13%보다도 높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주말마다 차를 운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한 두번 타는 비행기를 안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채식을 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 노력하겠지만 나는 그 중요도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하는 채식에 힘을 쏟기로 한다.
그러나 채식은 어쩌면 이 모든 변화의 과정을 멈추는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아파하고 있다고,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행동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나에겐 좀 처럼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 모든 작별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기후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나는 줄곧 무력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떤 형식이든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을 더욱 수용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거다. 그것은 우리가 채식으로 세상을 바꾸어서가 아니라 그게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래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지금 나의 채식은 그저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그 표현을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