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처리장에서
채식하면 신경질적이 된다고 하던데요.
머리에 계속 맴도는 이 말과, 이 말이 불러 일으키는 마음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 나는 더 빠르게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선유도 공원의 산책길이지만 지금 내 마음은 주변의 나무와 풀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화가 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아무런 악의 없이 이 말을 뱉었을 그의 무신경함에 화가 나고, 그런 악의 없는 천진한 농담에도 신경이 거슬리는 나의 속좁음에 화가 나고, 이런 내 감정이 그의 말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 또 화가 난다.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뒤늦게서야 이렇게 화가 치미는 내향적 성격도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내가 채식을 위해 도시락을 싸왔다고 이야기하자, 평소에도 경솔한 말로 내게 상처를 주곤 하던 K씨는 농담을 던지듯 웃으며 이야기한다. 심지어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라며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의 공감능력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과도한 공감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내가 지향하는 채식은 하나의 가치관이고 그 출발은 타자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존중 받을 만한 가치관이다. 하지만 그간의 시간을 되돌아 보았을 때 채식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다소 폭력적으로 번지거나 왜곡 되어지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경우도 분명 있다. 물론 그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그렇게 되었던 맥락이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쉽게 맥락을 생략하므로 그 결과만이 각인되었다.
K씨가 무심코 뱉은 말은 그러한 부정적인 각인을 하나 더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채식의 대중적인 확산을 바라고 있음을 생각했을때, 그것을 쉽게 용인해서는 안되었다. 물론 나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고 실제 채식과 신경질적인 것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므로, 그것에 관해 따지기 보다는 내가 채식을 하는 이유와 긍정적적인 면을 더 소개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설득은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까 회의적이기도 하다. 대개 K씨 처럼 자신이 지극히 논리적이라 생각하고 그 논리를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은 스스로 신뢰하는 출처가 아닌 이상에야 쉽게 상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 자리에서 그다지 감정적이 되거나 언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간건 어쩌면 양호한 대응이었을까. 내가 그와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논리보다는 행동이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먼저 변화해야 그와 같은 사람도 비로소 변화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변화는 항상 느리기만 하고 좀 처럼 꿈쩍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만 떠드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늘 말과 감정의 오수처리를 도맡는다. 그것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역할 일까.
문득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해지고 커플들은 공원의 어둠으로 스며든다. 내가 이 공원에서 좋아하는 포플러 나무는 그 자리에 높이 서서 공원 곳곳을 내려 본다. 이곳 선유도는 예전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었다.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그 물은 집집마다 흘러들어 사람들은 밥을 해먹거나 하루의 더러워진 몸을 씻어냈을 것이다. 그러면 하수로 흘러든 물은 언젠가 다시 이곳에 모여 더 맑은 물들에 섞이고 씻기고 걸러져 다시 또 집집마다 흘러들었을까. 그 모든 오염과 정화의 사슬은 대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누군가가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의 폐수를 쏟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가 먼저 그들에게 오수 처리를 맡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원은 과거 정수장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다른 공원이 갖지 못한 매력을 드러낸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건너 별을 쫓는다. 한때 오수를 처리 하던 공원은 이제 감정의 오염을 씻어낸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자신의 역할이 있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