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친구를 사귀는 법
나의 학창시절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한 때는 무척 부끄러워 숨겼지만 이제는 덤덤할 뿐이다. 나는 사춘기 때에 이렇다 할 반항도 해본적이 없는데 그건 내가 늘 억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자 이런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군대에서 잠시 이런 시절을 다시 겪어야 했지만 대체로 20대에는 평온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모든 어두움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난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대학의 자유 속에서야 폭력이 비로서 사라진 것을 볼때,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친구들도 그들의 가정과 학교로부터 억눌려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단지 그들 보다 더 밑에 눌린 존재였을 뿐이라고. 이런 메커니즘이 회사나 사회 구석구석에서도 작동하는 것을 안다. 다행히 나는 그런 곳들을 열심히 피해 올 수 있었다.
따라서 나의 학창시절 친구들은 나를 억누르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들로 나뉘었다. 나는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고 친구들이 하자는 것이라면 대체로 좋았다. 그저 내게 상냥한 친구들이라면 뭐든 좋았다. 나도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던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누군가와 진심으로 통한다는 경험을 꽤 늦게서야 했던 것 같다. 물론 학창시절에 친했던 친구들도 있었고 나도 그들이 좋았었지만 정말 생각이 통한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처음 했을 때 나는 정말로 황홀했었다. 마치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미친듯이 행복한 배움과 즐거운 인생"이라는 슬로건을 보자마자 나는 완전히 매료당했다. 배움이 미칠듯이 행복할 수 있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은 그 느낌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더구나 그런 배움으로 둘러 싸인 곳에서 인생을 허우적 거리며 보낼 수 있다면, 내가 상상하던 삶이 거기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체 모를 그곳에,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홈페이지의 짤막한 설명이 전부였던 곳에 큰 돈을 내고 등록했다.
언어란 본래 대상을 왜곡할 수 밖에 없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선 비유를 들 수 밖에 없다. 그곳을 최대한 가깝게 설명하는 단어를 찾자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살롱 문화일 것이다. 낮선 사람들이 서로의 관심사대로 모이는 곳. 구성원의 다양성이 역동하도록 내버려 두고 지켜보는 곳. 하지만 그때는 살롱 문화가 유행하기 전이었고 살롱이 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 길 위에 버스킹을 하고, 그걸로 영화를 만들고, 시를 쓰고, 밥을 짓고, 게임을 하고, 강연을 열고, 심리 상담을 하고, 크리스마스 밤을 보냈다. 우리는 서로 나이를 잊었기에 수평어를 사용했고, 장애는 그저 또 하나의 역동을 만드는 영감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생님이 없었고 단지 영감을 주는 말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 모든 황홀한 경험은 그 때에 그 친구들이어서 가능 했다는 것을 안다. 그 친구들이 다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도 그런 동일한 역동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저서 '영원의 건축'은 '무명(no name)'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어로 명쾌히 설명할 수 없기에 무명인 그것은 삶의 곳곳에 녹아있는 하나의 정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명의 특성을 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삶에는 정답이 있다고 말한다.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무명에는 여러가지 특성이 있는데, 무명이 발현되는 순간은 그러한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 그 특성 중 한 가지는 우리 내면에 억압이 없어야 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지속한다. 잘 지어진 건축물이 그러한 공간이고, 잘 조화된 커뮤니티가 그러한 만남이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 시절을 회고해 보며 내가 그 시절 '무명'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한 가지 아이러니는 그 시절의 회사 생활은 꽤나 힘겨웠는데, 그 때에 그런 행운이 곁에 있었다는 것도 무명의 특성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결국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것도 자신과 취향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나는 늘 이야기하고 다닌다. 그래서 회사 아니면 집만 다니는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좋은 커뮤니티를 나가보라고 부추기고 꼬드긴다. 단지 회사나 혹은 학교 같이, 나의 선호와는 별개로 사회가 매칭 시켜준 커뮤니티는 늘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난 적은 있지만 그런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어른이 친구를 사귀는 한 방법이다. 더이상 친구를 만날 학교가 없는 이들이 자신의 내면에 부응함으로서 같은 지점에 이끌린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다. 이것에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같은 내면의 목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연스러운 활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적다. 나이로 만남의 대상을 제한하지도, 규율로 자연스러운 표현을 막아서지도 않는다. '무명'이 태동하기 좋은 조건인 것이다.
다행히 우리 세계는 점점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더이상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시대도, 심지어 회사에 들어가는 시대도 아니다. 관심사 기반의 커뮤니티에 대한 욕구는 커져가고 있고 다양한 시도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금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영감을 많이 받는다. 그들이 보고 배울 만한 이전 세대는 없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