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의 시대에서
나는 기득권이다. 우리 사회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전 세계적 차원에서 그렇다. 사실 대개 서민이라 말하는 우리 대다수가 기득권이다. 지난 수 십년 간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본 우리 모두가 그렇다.
누군가가 기득권이라는 말은 누군가는 그것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지금 자라는 어린 세대 모두에 해당한다. 그리고 우리 기득권들도 앞으로는 가진것들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다.
나는 화석연료의 혜택을 받은 탄소 기득권이다. 오랜시간 동식물이 퇴적되고 썩어 눌려 농축된, 그래서 고도로 압축된 에너지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이 에너지는 너무도 집약적이어서 커다란 비행기를 띄워 수십 시간 내에 지구 반대편으로 데려가고, 우리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인처럼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반면 우리가 손쉽게 이런 집약적인 에너지를 활활 태우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나라를 잃는다. 시리아 난민은 우리의 무분별한 탄소배출이 직간접적으로 촉발한 사건이다. 기후 변화로 가뭄이 들고 사람들이 봉기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데에는 우리가 화석연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행복에 책임이 있다.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에 기반한 우리의 활발한 활동으로 지구촌의 거의 모든 생물종들은 멸종했거나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지구에는 인류가 스스로 먹고 입기 위해 기르는 가축과 인간들, 그리고 아주 미미한 수의 야생동물만이 남았다. 우리가 행복의 절대량을 키울수록 다른 한 편에선 어쩌면 그만큼의 행복을 빼앗기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서야 우리의 행복의 근간이었던 화석연료 사용을 급격히 줄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각국 정상들간에도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여전히 전 세계의 탄소배출량이 증가하고 있지만 지금의 생태계와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현재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줄여야 한다.
이것은 화석연료의 사용과 함께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해왔던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볼때, 앞으로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모두가 책임을 떠넘기며 탄소배출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맥락속에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길거리로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더 자주 느끼고 미디어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뉴스가 더 자주 보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우리 기득권들이 모두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의 행복을 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깨닫고 난 뒤에 나는 더이상 탄소를 소비해도 행복하지 않다. 더이상 탄소를 소비하며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고 싶지도 않다.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행복보다 공존을 원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고 싶다. 내가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모두가 공존하길 바란다. 우리시대는 하루 빨리 행복이 아닌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희망이 있다. 우리가 때로 구시대적이라 치부했지만, 우리 부모 세대가 추구한 공존의 가치를 기억한다면. 지금 새로 자라는 세대는 다시 공존의 가치를 들고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를 구시대라며 밀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