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서늘한 공기를 느끼는 밤. 높은 가을 하늘에는 별빛이 펼쳐져 있고, 잔디밭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둘러 앉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는 화로의 붉은 빛이 어른거린다. 조용히 장작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오래된 음악 소리에 감정이 물들어 간다. 아름다움은 때로 잔인하다. 그것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감동을 받았을때 눈물을 보이는지 모른다.
나의 시대는 종말론의 시대였다. 20년 전, 새 천년이 가까워 오자 수차례의 종말론들이 세상을 달구었고, 새로운 세기에 진입한 후에도 종말론들은 끊이지 않았다. 인간은 미래를 두려워 한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사고에 이성이 도구로 이용될 때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하지만 과학자들, 혹은 그들 만큼이나 과학을 신뢰하고 과학적 사고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종말론들은 가십거리로서 삶의 변두리에만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성적 사고와 객관적 데이터를 신봉하는 이들을 지난 수십년간 괴롭혀온 실제적인 종말 시나리오가 존재해왔다. 처음에는 먼 미래 세대에 단지 해수면이 조금 높아질 뿐이고 일부 가난한 국가의 피해에 국한되는 남의 일 같았던 이 시나리오는 어느새 지금 당장의 전 인류와 모든 생물종을 위협하는 파국적인 시나리오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예측이 되었다. 이 사실을 밝혀내는 연구의 최전선에 있던 과학자들은 우리가 마주한 암담한 미래와, 이미 사라지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좀 처럼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세상으로부터의 외로움으로 고통받아야 했고, 그 증상에는 기후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이미 6차 대멸종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에게 공룡의 멸종으로 익숙한 5차 대멸종은 한 순간에 멸종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100만 년에 걸쳐 이뤄진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생물종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대부분이 인간의 산업화 이후 일어난 일이다. 현재 지구상의 포유류 생물체 총량(Biomass)의 4%만이 야생동물이다. 우리는 아프리카나 어딘가에 야생동물이 있다고 막연히 상상하지만 현실은 사육동물과 인간만이 지구에 남았다. 동시에 우리나라에는 인구수보다 사육닭의 수가 더 많다. 개체의 행복보다는 개체가 번식하는데만 관심있는 유전자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닭이 인간보다 더 번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지구 곳곳에서는 파국적인 변화를 맞이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까지 살만한듯 보인다. 그러나 그 착각 때문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지금의 일이 아니라 내 후손들의 일이라는 그 착각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성장해왔듯 미래에도 계속 성장할 거라는 착각 때문에, 지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나타나 기술로 해결해 줄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현재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하여 섭씨 1.1도 가량 올랐다.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는 이 온도상승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겨울 전례없는 규모로 호주를 불태우고 코알라를 멸종위기로 몰았던 사건과, 매년 악화되어가는 캘리포니아의 산불 소식, 사상 첫 영상 20도를 넘겼다는 남극대륙 소식, 영구 동토층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시베리아 소식등등 끝이 없지만 모두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단지 올해는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싶었고 다시 날 좋은 가을이 찾아오자 길었던 장마에 대해 잠시 가졌던 경각심은 사라졌다.
이제 1.5도 상승까지는 넉넉 잡아도 7년 밖에 남지않았다. 그때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또 20년 내에 마주할 2도가 더 높은 세상은 어떠할까?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와 되먹임현상으로 인해 우리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스스로 점점 뜨거워져 갈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재앙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하루빨리 기후 변화를 억제해야 그나마 조금의 생명이라도 살아남으리라는 미래에 대한 안타까운 희망 때문이다. 과거 세대는 더나은 미래를 꿈꿨지만 우리세대가 꿈꾸는 미래는 덜 나쁜 미래가 되었다.
우리는 확실하게 멸종해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당신 그리고 여기에 함께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다. 멸종해가는 미래의 선명한 상상 앞에서 아직 남아있는 우리들을 둘러보는건 그래서 가슴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