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라면
*지난 주 올린 글이 잘못 올려져서요. 같은 내용을 다시 올린 것입니다.
수술 후 회복 중인 할아버지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저녁 운동도 다시 시작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오늘은 할아버지가 줌 수업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마법 천자문'을 재미있게 읽는 것을 보아서, 고사성어를 어느 정도 알고 흥미 있어할 것이라 생각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고르고, 그것에 대한 한자 풀이, 짧은 설명, 예화로 ‘성냥팔이 소녀’ 동영상을 준비했다. 영어로 공부하는 아이들이라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라는 영어 표현도 함께 찾아 놓았다.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 바로 공감이 오늘의 주제다.
할아버지가 한자와 의미를 설명하고, 동영상을 본 후
“너희가 경험한 역지사지 상황이 있을까?”하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생각이 안 나요.”
더 이상의 답이 없어서 “성냥팔이 소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묻자,
막내는 “죽은 거 아니에요?” 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둘째는 “같이 성냥을 팔아줄래요.”
첫째는 “엄마한테 말해서 도와주라고 할게요.” 했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화면 저편의 아이들은 점점 산만해졌고, 할아버지는 "그렇지, 그렇구나." 하고 있다. 하고 많은 예화 중에 소녀가 추운 거리에서 별이 되는 이야기를 고르다니, 나는 답답해졌다.
옆에서 보던 나는 둘째에게 물었다.
“형 신발을 신어본 적 있니?”
“네, 냄새났어요.”
“그거 말고, 기분이 어땠어?”
“응... 잘 모르겠어요.”
“형 신발이 크지 않아?”
“아니요, 사이즈가 같아요.”
"느낌이 어땠어?”
“내 거가 편 했어요.”
내가 원하는 답이 안 나온다. 좋은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을 할 줄 모른다.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생긴다. 골라놓은 동영상이 너무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내용인 것 같았다. 우리가 아이들을 아직도 어린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질문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 입장에선 이 시간이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역지사지’를 알아야 했다. 손주들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고 준비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줌 앞에서 또 ‘공부’를 시킨 셈이다.
진행이 되지 않고 아이들만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급하게 마무리하고 마쳤다. 지난 4년간 줌으로 만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성장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유치원이나 초등 저학년을 대하듯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며, 자신들이 보고 있는 콘텐츠와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며 답답했을 것이다. “역지사지”를 가르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을 배워야 하는 건 우리였다.
오늘의 정리
1. 아이들은 어느새 많이 컸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가르치기’보다 ‘이해하기’가 먼저다.
2. 오늘 역지사지의 뜻을 실감했다. '내가 너라면...' '네가 나라면...'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헤아렸어야 한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다음 주는 아이들이 만든 그림이나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겠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