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도쿄 소나타’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다시 시작하고 싶어”
영화 ‘도쿄 소나타’(2008)의 등장인물들은 리셋을 꿈꾼다. 실직하거나 범죄자가 되면서 벼랑 끝에 몰려버린 이들은 삶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전’인 인생엔 리셋 버튼이 달려 있지 않고, ‘회귀물’도 아니기에 계속 살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에겐 내리막길을 걷는 선택지만 남은 것일까.
영화는 2000년대 초반을 살아가는 한 일본 가족의 이야기다. 가장 사사키 류헤이(카가와 테루유키)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 있다.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것이다. 회사에서는 사사키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3분의 1로 고용할 수 있는 중국인 직원을 뽑았다.
그는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고용지원센터에 간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엔 명품매장 오픈런을 방불케 하는 긴 줄이 이어져 있다. 매일 찾아가도, 눈높이를 대폭 낮춰도 가정을 건사할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
매일 아침 찾아가는 급식소에서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계속 회사에 다니는 척하느라 한 시간에 알람이 다섯 번 울리게 설정해두고, 중요한 전화를 받는 연기를 한다. 가족들이 눈치챌까 봐 걱정하던 그는 사사키를 저녁에 초대해서는 자연스레 회사 업무를 이야기한다. 사사키는 그런 그의 상황 대처 능력을 보며 일종의 존경심까지 품는다. 친구가 배우자와 동반자살 하기 전까지 말이다.
이 와중에 큰아들마저 자신에게 반항하며 위기감을 느낀 사사키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쇼핑몰 청소부로 취직한다. 아침에 입고 나간 양복을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청소하고, 다시 화이트칼라 직장인 모습으로 퇴근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은 채 분주하게 움직이던 도중 아내와 마주치고, 그는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지 못하고 줄행랑친다.
日호러 명장감독, 자국 현실에서 공포를 포착 … ‘1년 자살 3만4000명’
영화에 담긴 모습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가는 일본의 풍경이다. 일본은 2001년 12월 실업률이 5.6%(후생노동성 발표)로 당시 기준 역사상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운영하던 실업자 센터에는 평균 100명의 신청자당 51개의 일자리가 제공돼 구직난을 여실히 보여 줬다. 2년 후인 2003년 일본의 자살 사망자 수는 3만4427명(일본 경찰청 발표)으로 최고치를 경신한다. 당시 일본에선 선로에 뛰어든 사람들로 전철 운행이 중단되는 일이 잦았다.
‘큐어’ ‘회로’ ‘절규’ 등 호러물로 유명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러한 자국의 장기 경기 침체에서 극한의 공포를 포착했다. 정체불명의 존재로 인해 사람이 하나둘씩 죽어 나가고, 등장인물들이 혼돈에 빠지는 것이 기요시 호러 월드의 한 축이라고 했을 때,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또는 20년만큼 그 틀에 딱 들어맞는 상황도 없는 것이다. 인물들은 먼저 죽은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달아나고 또 달아나지만 결국 불안에 영혼부터 잠식당한다. ‘가족 드라마’로 분류되곤 하는 이 영화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도쿄 소나타’는 2000년대 일본인의 텅 빈 내면을 허무주의적 시선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외부 상황이 개인의 통제 범위 밖으로 치달을 때, 인간은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면서다.
이 사유는 주로 가장 사사키 류헤이의 아내 메구미(코이즈미 쿄코)를 통해 드러난다. 큰아들이 미군에 자진 입대해 중동으로 파병된 후 메구미는 꿈을 꾼다. 군복을 입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며 자책하는 내용이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사람의 무의식이 투영된 꿈으로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 아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걱정 대신 그가 완전 다른 사람이 돼서 귀가하는 염려가 더 크게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엄마는 착한 아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전쟁터에 가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며 ‘자기’를 잃을까 봐 걱정했다. 이 꿈에서 아들의 모습은 새까맣게 묘사된다. 육체는 죽지 않았더라도 무고한 이를 죽이며 자신을 잃은 그 순간, 영혼은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가 담겼는지 모른다.
메구미는 어느 날 강도를 당하기도 한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본인을 인질로 잡고 각종 범죄 행위를 한 뒤 자책하는 강도에게서 메구미는 남편의 모습을 본 듯하다. 사실 메구미는 오래 전부터 남편이 실직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료 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을 우연히 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직업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로 인해 남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모습에서 고통을 받았다. 부부의 작은아들은 부모에게 받은 급식비를 이용해 피아노 교습소에 다녔는데, 이를 발견한 남편은 아들의 머리를 심하게 때렸다. 부모로서 권위를 세워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세상에서 그 어떤 권위도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이 아들에게 폭력으로라도 권위를 세우려는 모습을 메구미는 안쓰럽게 여긴다.
“잘못에 잘못을 거듭하는 나란 인간은 정말 구제 불능”이라며 기둥에 머리를 찧는 강도에게 메구미는 얘기한다. “제발 자학하지 말아라. 자기 자신은 하나뿐이다.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 아마도 이는 그녀가 자기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거시 경제의 충격 속에서도 생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남에게 상처 주길 불사하며 생존하는 동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잃고 육체만 건사한다면 그건 이미 죽은 삶이 아닐까. 사람을 죽이고 껍데기만 남아버린 듯한 꿈속에서의 큰아들 모습처럼 말이다. 메구미는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눈을 떴지만 인생은 리셋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
영화는 이처럼 고뇌하는 인간들을 통해 희망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벗어나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남편 사사키는 다리를 다칠 정도로 뛰어간다. 그렇게 달려가 봤자 계속 자기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쓰레기에 묻힌 세상뿐이다. 그러다 차에 강하게 치여 뺑소니를 당하고, 한참을 누워 자다가 눈을 뜬다.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뚜벅뚜벅 걷는다. 어제 쇼핑몰 화장실에서 주워 몰래 주머니에 넣었던 돈 봉투를 분실물 수거함에 넣는다. 점점 미쳐가는 세상을 따라 같이 미치는 대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파병을 갔던 큰아들에게선 편지가 온다. 미군이 꼭 옳은 게 아님을 알게 됐다는 내용이다. 그는 미국의 편에 서서 싸우는 대신 약자의 편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겠다고 말한다. 영화가 미국과 상대국 중 어디가 더 옳다고 얘기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일자리가 없는 일본에서 도망치듯 전쟁터에 나가며 세계 평화란 가짜 명분을 내세웠던 아들은 직접 본 것을 바탕으로 사유하며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작은아들의 음대부속중학교 실기 시험으로 채워진다. 그가 연주하는 드뷔시 ‘달빛’이 한 곡 통째로 나온다. 외부 상황으로 고통받던 가족들은 아들의 반짝이는 재능으로 위로받는다. 아들이 자신을 속였다며 뒤통수를 후려치던 아빠의 손은 아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이 시퀀스는 단순히 아들이 재능 있는 인물임이 드러나서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니다. 아들이 자기 길을 찾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식구 모두 위로받았다는 데서 긴 연주의 감동이 전달된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알아가고 지키려는 노력이 힘든 시간에 위안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일본의 잃어버린 시간을 수십년차로 따라가고 있다는 한국인도 위로한다. 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결국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