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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하는 이상한 민주주의

이 시대의 어른, 김장하 선생의 질문

by 타와의 철학
1.png 사진 출처 : 유튜브 - 엠키타카 MKTK


2024년의 끝을 요란스럽게 먹칠한 12.3 불법 계엄 사태는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으로 일단락되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게 많지만, '파면' 하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푼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기 직전까지도 서울은 시끄러웠다. 파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수의 시민과 파면하면 안 된다는 시민이 반목하고 갈등했다. 하지만 판결이 직접 나오고 보니 의외로 후유증과 잡음은 거의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판결문이 매우 합리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실로 이러한 판결을 낸 헌재를 이끈 헌법재판소장(권한대행)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재판 과정을 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이하 문 판사)은 재판 과정도 외세에 의한 흔들림 없이 리더십 있게 잘 끌어갔다. 그리고 문 판사에게 대중의 칭찬과 관심이 가니, 그 관심은 자연히 '김장하'라는 인물에게까지 이어졌다.


김장하 어른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말 그대로의 '어른'으로서, 진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자신이 모든 돈을 스스로가 아닌 지역의 학생들을 위해 쓴 것으로 알려진 독지가다. 사실 문 판사는 이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할 수 있었으나, 다행히 고등학생 시절 김장하 어른을 만났다. 독지가 김장하 어른의 후원이 있었기에 문 판사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정의롭고 바른 법관이 되어 이 나라 민주주의 수호에 기여했다. 이른바 '김장하 장학생'인 것이다.


김장하 어른에 대한 자세힌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하기로 하고, 문 판사는 지난 4월 18일을 끝으로 헌법재판관에서 퇴임했다. 지역의 언론을 통해 진주에서 김장하 어른과 문 판사가 재회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김 어른은 차를 마시다 문득 "평소에 의문이 많았는데, (문 판사는) 법에 대해 많이 아시니까, 내가 물어보겠습니다"라고 운을 떼며 문 판사에게 묻는다.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결'이라고 하는데,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지한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반지성주의가 팽배해가는 시대에 참으로 아름다운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어떤 질문을 하는가는 그 사람이 평소 어떤 생각을 얼마나 깊게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잣대다. 김 어른의 상당한 수준이 짐작가는 질문이다. 그 수준이 워낙 높아 천하의 문 판사도 금방 답을 내놓지 못 한다. 조금 생각하다, "유능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을까요?"한다. "요란한 소수를 설득하고 다수의 뜻을 세워나가는 그런 지도자."


나도 덩달아 생각하게 된다. 김장하 어른처럼 말수가 매우 없는 사람이라면 단어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 '해석'이라는 단어가 중요해 보인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일반적이어야 하는데, 어찌 반대로 요란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있으니, 그것을 과연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사실 정말 그렇다. 우리 사회는 말로만 '민주주의'라고 하지, 실제론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 우리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민주적이라 사회 전체가 민주주의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기만 민주적일 뿐이다. 나머지 공간들은 그렇지 않다. 가령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본은 절대 다수의 국민이 주권을 갖는 것이나, 실질적으로 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는 건 극소수의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다. 투표지를 봐도, 선출 이후 요직에 임명되는 이들을 봐도 서울대 출신 엘리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로 그들에게 권력이 권력을 갖게 만든 근본 동력이 '민주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민주 사회의 주권자인 '절대 다수의 국민(aka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토대에서 그러한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을 갖게 된다. 여기서 헷갈리게 된다. 결국 그 요란한 소수가 주권을 쥐고 조용한 다수를 지배하면 이건 '민주주의'와는 멀어지게 되는데, 어찌 민주주의가 그러한 선택을 했는가?


이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파시즘 또는 조선시대적 사고 방식에 남아있다는 반증이다. 강자에 대한 자기동일시와 동경, 그리고 약자에 대한 혐오. 전국민이 서울대에 가기 위해 공부하니, '서울대 출신'이라고 파는 패권을 의심하거나 그에 대한 도전 정신을 품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해선 '내가 공부 못 해서 그런 거니까'라며 피지배를 옹호한다. 그리고 엘리트에겐 '저 사람은 서울대 가려고 그만큼 노력한 거니까 저런 절대 권력을 쥐는 보상을 누려도 돼'라며 그 비민주적 권력을 긍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 권력'이라는 건 누군가가 공부를 해서 얻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민주사회에서의 권력은 오직 절대다수의 국민에게만 있는 것이며, 이건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가져갈 수가 없다. 더구나'서울대 출신'이라는 네임밸류도 개인이 공부해서 이룬 성취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 맥락이 낳은 결과물일 뿐이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사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물었던 김 어른의 말씀은 '어떻게 민주주의의 원리를 회복해 조용한 다수가 주권을 갖게 할 수 있는가?'에 닿을 수밖에 없다. 문 판사는 '유능한 지도자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주요한 건 '유능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뭔가?'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파시즘적 엘리트주의 요소를 없애줄 방안이다. 독일이 했던 것처럼 특정 대학의 독적점 권위를 없애기 위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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