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개봉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클로저>는 ‘사랑’이 주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남녀의 섬세한 사랑을 그린다. 하지만 영화의 끝은 관계의 파국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댄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틀림 없는 연인이었던 앨리스에게 사랑한다 말한다. 애둘러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한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그는 표현에 매우 적극적인 남자다. 그러나 5분 전까지만 해도 여지 없이 사랑을 표현하던 앨리스의 태도는 얼음장처럼 바뀌었다. 이제 자기는 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헤어지자 말한다. 앨리스가 결별을 선언한 이유는 댄이 그에게 한 말과 달리 정말로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거듭 사랑한다 말하는 댄에게 앨리스는 소리치며 말한다.
“네 사랑은 도대체 어디 있어? 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어. 몇 마디 말은 좀 들리지만 그런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이 영화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건 첫째, 영화 속에서 표현된 사랑의 모습이 알콩달콩하기 때문이다. 뭐 어떤 대단하거나 거창한 사랑이 아닌, 일상 속의 작지만 소중한 사랑을 보여준다. 사실 일반 대중을 더 감응하게 하는 건 그런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그리고 둘째론 그렇게 아름다웠지만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현실적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앨리스의 대사가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로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랑에도 그처럼 말로는 사랑한다 쉽게 내뱉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사랑이 종결되는 모습을, 한국의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평론가 이동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영화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평했다.
빗나간 집착과 뒤틀린 욕망이 초래한 관계의 종말을 재난영화처럼 그려내는 파국의 서커스.
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결국 ‘집착’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빗나가버린 집착. 사실 이 집착이라는 마음은 비단 이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는 원흉이다. 생의 거의 모든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인류의 지나간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런 진단은 유서도 역사도 깊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 주장을 한 이, 혹은 처음은 아니어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부처’일 것이다. 생의 괴로움의 실체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뒤 그는 그 내용을 축약해서 세상에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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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셋째 넷째도 있긴 한데, 일단 저 두 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사실 우리는 굳이 부처나 이동진 평론가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연인만이 아니라 어떤 관계에서도 ‘집착’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도 실천하는 건 아예 다른 문제다.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론 어렵다. 집착이란 감정은 겉에 ‘집착’이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게 아닌지라, 그게 집착인지 알아챌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집착이 처음부터 ‘집착’으로 시작하는 건 아니다. 최초 우리 마음 속에 어떤 것이 생길 때 그것은 ‘사랑’ 또는 ‘호감’의 형태를 띈다. 그러니까 원래는 좋은 마음인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이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빗나가버리면’, 또는 선을 넘어 지나치게 되면, 그때 그 사랑은 비로소 집착으로 변한다. 문제는 그 변화라는 것이 한 순간에 드라마틱하게 ‘짜잔’하고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무지개의 스펙트럼처럼 시나브로, 그라데이션으로 넘어간다. 뚜렷한 변화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니니 집착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어느덧 사랑에서 집착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조차 못 한다. 오히려 예전에 사랑으로 시작했던 기억만 남아 자기는 지금도 사랑임을 주장한다.
만약 제 3자가 나타나 ‘그건 집착이야’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못 한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언행을 합리화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영화 <클로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동진 평론가도 남자 주인공의 태도가 ‘집착’이라 말했고, 대부분의 관람객 역시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만약 입장을 바꿔놓으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순 없을 거다. 누구나 그 입장이 된다면 ‘네가 뭘 알아! 나는 사랑이 맞아’라고 말할 것이다. 본디 사랑과 집착의 구분은 오직 그것이 남의 일일 때만 쉽게 나눌 수 있을 뿐, 당사자가 되고 ‘내 일’이 되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쉬이 나누어 보지 못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집착하지 마’라는 말은 사실 유명무실하다. 집착은 안 하고 싶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집착을 내려놓으려면 내가 무엇에 집착하는 줄을 알아야 하고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임을 자각해야 하는데, 그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니 ‘통제’라는 두 번째 사건은 아예 이어질 수조차 없다. 결국 이런 경험을 하고 난 사람은 불교에 대해 반대하거나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까놓고 말해 불교의 가르침은 듣기에만 좋을 뿐, 현실성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실은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
이 대목에선 부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집착을 내려놔야 한다’라고 알고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한 번 주관적인 해석을 거친 2차 결과물에 가깝다. 최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은 그런 실천적 개념이 아니라,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객관적인 서술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처세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었다.
‘첫째, 인생에는 괴로움이 있다.’
‘둘째, 그 원인은 집착이다.’
중요한 건 ‘순서’다. 보통 우리는 ‘집착’이 먼저 있다고 보고 그 집착을 내려놔야 괴로움도 가신다고 말하지만, 경전에 적힌 구체적인 순서는 반대다. ‘괴로움’이 먼저 등장하고, ‘집착’은 두 번째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런 순서를 감안하면 ‘집착을 없애면 괴로움도 사라진다’라는 건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그것보단 ‘괴로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집착이다’가 더 적확하다. 이런 순서의 설명대로라면 우리는 괴로움을 막기 위해 집착을 먼저 내려놓을 게 아니다. 우연히 찾아오는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게 먼저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집착했었음을 깨닫는 것이 순서가 되어야 한다.
일상을 살다보면, 갖가지 감정은 우리가 원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온다. 대개 우리는 그처럼 일방적으로 찾아온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기쁘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다 그렇다. 그중에서도 특히 괴로운 감정은 우리의 삶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고간다. 하지만 마냥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행복으로 가는 문은 이 괴로움을 곧이곧대로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신호’로 여길 때에 비로소 열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원인이 있으므로 생겨나니, 이 불청객처럼 찾아온 ‘괴로움’이란 감정에도 나름의 원인은 반드시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이란 것들은 감기 바이러스처럼 우리 몸 안에 잠복할 뿐,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부터 기침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 순간 ‘괴로움’이라는 감정적 증상을 발현시킨다. 기침하고 열이 날 때 감기가 있음을 알아채고 비로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이라는 증상이 올라오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부처의 이론에 따르면 그 원인이 바로 ‘집착’이다. 그러니까 ‘괴로움’이라는 감정, 아니 그 ‘증상’은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태여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먼저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이게 사랑인지 아니면 정녕 집착인지에 대해 남과 토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문득 찾아오는 ‘괴로움’이란 신호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다. 잘 포착하기만 하면 ‘집착’임을 군소리 없이 쉽게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는 순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만큼은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 눈으로만 봤을 때는 똥인지 된장인지 긴가민가했던 것이 사실 ‘똥’임을 깨달은 사람은 저절로 내려놓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사랑에도 약간의 괴로움은 있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랑인지 집착인지의 여부를 사변적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헛짓에 가깝다. 왜냐하면 결국 이 모든 논의는 인생을 좀 덜 괴롭고 더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의 여부가 아니라 ‘괴로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집착이란 뭐 따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괴로움’이 첨가된 것을 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이 말에조차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좋다. 설령 ‘괴로움이 있는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 안에 있는 ‘괴로움’은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결국 행복하길 원한다면 아무리 우겨봐야 소용 없고 자기 머리만 아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