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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Mar 21. 2019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영화 <우상>

브런치 무비 패스 #1

*스포일러와 영화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의 후원을 받아 관람한 후기입니다.




현재도 그렇고 한국 사회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그 시작이 뭘까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한 인간이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이나 신념이 맹목적으로 변화하는 순간, 그것 또한 우상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것이 작품의 시작이었다.

-이수진 감독-



#영화 <우상>은 단순한 서스펜스 스릴러가 아니다. 

혹 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로 보고 굉장히 무겁고 찜찜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엄청 무섭고 스피드 있게 관객을 쪼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잔잔하게만 흘러가진 않는 이 영화는 과연 ‘이게 뭐지?’하면서도 영화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게다가 끝까지 속 시원하게 관객들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는 이 영화는 보고 나서도 궁금하게 만들며 좋지 않은 쪽으로 잊을 수 없게 만든다. 관객들에게 상냥하게 밥상을 차려놓고 수저로 떠먹여 준다기보단 거꾸로 메달아놓고 먹어보라고 하는 격이니.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영화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어떻게 보면 그렇게 마냥 심오한 이야기는 아닌데 영화 도입부부터 짙은 안개를 드리우며 전반적으로 영화 자체를 꼬우고 비틀며 어렵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공감한 난해한 대사 전달력 역시 '이게 한국어가 맞는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듣지를 못하는 건지' 의심케 하며 극 중 몰입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감독이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심이 들게 한다. 이를 <우상>이 가진 하나의 전략적인 연출로 봐야 할지 아니면 치명적인 단점으로 봐야 할지는 결국 관객들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제목처럼 각각의 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우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양면성과 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줬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을 우연한 하나의 사고로 모이게 한 후 보여주는 사건의 실마리와 해결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참혹한 세계이자 드라마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상. 맹목적인 인기를 끌거나, 숭배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종교적으론 인위적으로 만들어 신처럼 떠받드는 신의 형상을 한 것을 뜻한다. 결국 우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던 가치도 있지만 타인이 부여한 가치, 즉 개인이 그 대상에 어떻게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숭배하며 그것을 향해 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이해가 더 쉬울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구명회(한석규)는 인물 중 가장 원하는 바가 뚜렷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그는, 처음에는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악하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 ‘우상’이 되는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작중 구명회는 도의원이지만 한의사 출신으로 중국에서 학위를 받아 한의사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평소 잘 구축한 그의 이미지 덕에 정치계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의 아들인 요한(조병규)이 어느 날 뺑소니를 저지르고 온 가족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지만 그마저도 이슈가 되고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 오히려 인지도와 지지율이 상승한다. 결국 구명회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우상’이 되고자하며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시체 유기 및 살인 등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범법 행위를 한다.


극 중 아들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앞길을 위해서 진실을 은폐하고 직접 청소부가 되어 모든 사실을 쓸어버린 그는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하나둘씩 처리한다. 그렇게 자신 스스로가 우상이 되길 원했던 구명회. 그는 모든 사건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갔고 그러다 마지막에 큰 사고를 당하지만 그마저도 한 편의 드라마로 승화하며 자신이 ‘우상’이라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여과 없이 포효한다.



그에 비해 유중식(설경구)은 ‘우상’이 그 자신이 아닌 그의 아들이라고 보인다. 유중식 강한 부성애를 지닌 인물로서 그에게 아들은 자위를 대신해주며 함께 성매매 업소를 가는 등 지능이 부족한 부남(아들)은 그의 세상 전부이다. 극 중 사고를 당한 아들의 머리는 노란색인데 중식의 머리도 노란색이다. 영화의 한 코멘터리에서 설경구가 설명하는 파격적인 노란 머리는 아들과 아버지의 부성애와 일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연출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들이 전부였던 그에게 사고로 아들을 잃고 며느리인 련화(천우희)까지 잃게 된 중식은 뺑소니범인 명회의 아들과 그의 아버지인 명회를 찾아가 사건을 풀어나간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아들의 죽음은 점점 련화를 향한 집착과 같은 형태로 번지며 련화를 찾기 위해 거금 2000만 원까지 투자하며 뱃속에 든 손주와 그녀를 위해 직접 혼인신고를 올린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의 아버지인 구명회의 편에 서는 결정을 하며 손주를 가진 련화를 보호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그마저도 ‘자신이 잘랐다고’하는 일명 아들의 정관수술로 련화의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친손주가 아님을 깨달으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그 순간, 중식은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한다. 그리고 무당의 ‘가장 큰 사람의 목을 따라’는 말에 따라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머리를 폭파시킨다. 그것도 구명회 선거 유니폼 자켓을 입고서 말이다. 이는 결국 자식이자 동시에 그의 우상을 잃은 자의 포효이며 스스로 모두의 우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비친다.



마지막 인물인 최련화는 구명회와 유중식에 비해 가장 신비스럽고 알기 힘든 인물이지만 또 그만큼 가장 크고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녀에게 ‘우상’은 생존이다. 오직 그녀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것, 그리고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인공들 중 유일한 이방인인 그녀에게 혼인신고는 그녀가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녀가 중식의 아들인 부남과 결혼하여 가지고자 했던 생존과 안정은 그 날의 사고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남편이 죽고 그 사고로 인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까 도망친 그녀에게 전남편이 찾아와 목숨을 위협하고 그 전남편을 해치우니 이번엔 구명회가 찾아와 위협한다. 그리고 유중식이 그런 련화를 거두어 구해줬더니 이제는 배다른 언니와 남편을 죽인 의문의 사내, 암살자가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 한다. 이렇게 도망 및 살인이라는 끔찍한 뫼비우스 띠에 갇힌 그녀는 결국 그녀 스스로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극 중 등장인물 중 가장 늦게 등장하고 맨 아래층에 있던 련화는 결국 아주 강한 여운을 남긴다. 자신을 이렇게 몰고 온 구명회를 찾아간 그 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폭파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제목처럼 ‘우상’을 얘기한다. 우상이 사라진다면 이 영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중식과 련화가 각자의 우상을 쫓다가 스스로를 파멸하고 좌절했지만 그에 반해 명회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그 모든 위기를 오히려 자신의 디딤돌로 만든다. 그렇게 명회는 사고로 인해 화상을 입지만 어떠한 수술도 받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대중 앞에 선다. 그리고 이게 한국말인지 외국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연설을 하며 모두를 끌어들이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그에게 오히려 감명받은 듯이 손뼉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그런 그들에게 끝내 우상이 되어버린 구명회. 개인적으로 보면서 가장 소름이 돋았던 부분이다.


극 중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뭘 믿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게 구명회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은폐한 채 마치 자신은 모든 것을 뉘우치고 반성한 선(善) 인척 하며 다시 대중 앞에 선다. 거북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그대로 과감 없이 노출하며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롭다고 믿고 지지하게 만든다. 그렇게 결국 구명회는 스스로를 ‘우상’으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우상은 어렵다.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의 연기 장인들의 독기 가득한 변신과 <한공주>의 이수진 감독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던 <우상>. 미장센을 말하자면 분명 장면마다 훌륭하고 세심한 연출이 녹아 있었고 그것을 통해 인물들 간의 감정선과 유기적인 관계를 잘 보여주려는 모습은 좋았다. 또한 143분 내내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사건과 사고를 빗대어 보여주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쉼 없이 쏟아냈다. 극 중 인물 모두가 각자의 우상을 위해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쫓아갔지만, 잘못된 선택들이 가져온 결과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이를 통해 결국 그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을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어떤 면에선 그로테스크하게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상>은 조금 불친절한 영화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감독의 욕심이 컸던 건지 아니면 이 영화가 가진 특유의 연출을 내가 소화를 잘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어렵게 보지 말고 영화가 다 끝난 후 ‘과연 이 영화 안에 있는 인물 중 나는 누구와 유사한가? 만약에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흥미롭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말이 있다.

글쎄다. 그런 선택을 하려면 이 영화부터 온전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영화가 주는 난해함에 갇힌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N차 관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두말할 것 없이 좋았고 끝으로 가서는 어떤 확고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감독의 노력도 보였다.


인간은 누구나 우상이 있고, 그 우상이 되고자 하는 은근한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잘못된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흘러간다면 그 우상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를 보여주는 영화,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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