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을 기념하며
어쩌다 보니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그날 모임에 느지막이 나타난 남자는 본인이 청일점이란 사실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모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과묵하게 감자튀김만 먹고 있는 단 한 사람만 빼고... 갈고닦은 사회성으로 능숙하게 대화하는 남자, 이따금씩 대화의 흐름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지만 시종일관 조용한 여자. 크게 접점이 없어 보이던 두 사람은 훗날 부부가 되었다.
현재 나의 남편은 내 친한 친구의 친구였다. 남편의 비대면 첫인상은 사실 긍정적이지 못했다. 당시 솔로였던 나를 위해 친구는 암암리에 남편을 남자친구후보로 낙점해 우리들의 모임에 게스트로 초대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 오전, 남편은 전날 과음으로 참석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했고 술을 즐기지 않던 나는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그를 슬그머니 남자친구후보로서는 '서류접수 불가'로 분류했다.
꼭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가 있으니 어떻게든 오라 엄포를 놓은 친구 덕에 남편은 숙취를 이겨내고 모임 후반부에 등장했지만 이 날 우리는 서로 개인적인 대화 없이 헤어졌었다. 하지만 이날 이후 동갑내기 친구로 함께 어울리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멀게만 느껴졌던 첫인상과는 달리 서로 결이 비슷하고 가치관도 닮아있단 걸 발견하며 우린 가까워졌다. 그리고 매사 목표를 세우면 성실하게 이루어가는 남편은 한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당장 사귀자고 하지 않을 테니 자신과 두 달만 만나보라며, 그 누구보다 잘해 줄 자신이 있다며 돌진해 왔다. 내가 건강관리를 중요시 여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자진해서 술을 끊고 오랫동안 쉬었다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의 호언장담처럼 서로 알게 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우린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고 둘이 함께한 지 511일이 되는 5월 11일 결혼식을 올렸다.
햇병아리에 불과한 나에게 미혼인 지인들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아직 나도 답을 찾지 못한 결혼에 대한 질문들을 물어오곤 했다. 유부녀가 된 지 1년을 맞이한 오늘도 여전히 모르는 게 투성이지만 하나만은 알 거 같다. 남편과 아내로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이 무대 뒤의 풍경과 닮아있다는 걸 말이다. 아무에게나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게 감격일지 실망이 될지는 온전히 출입증을 부여받은 자에게 달려있었다.
국제 뮤지컬 행사에 참여하는 해외공연팀의 입과 귀가 되어 축제 일정을 동행했던 무더웠던 대프리카의 여름. 시차에 적응할 틈도 없이 숨 가쁘게 리허설을 소화한 배우들을 기다리던 인터뷰. 인터뷰어의 질문을 영어로 통역하고 배우들의 답변을 다시 한국어로 통역했다. 그들의 리허설무대와 분장실을 넘어 숙소에서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가까이서 담아내고자 하는 방송국 관찰 카메라팀. 타국에서 몸도 맘도 긴장한 상태의 배우들. 두 그룹이 부딪힐만한 기류가 느껴지면 나는 협상가가 된 듯 통역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공연이 무대에 올려지던 날 나는 무대 뒤에 서서 공연을 지켜보았다. 카메라 앵글밖에서 화장기 없는 잠옷차림으로 고국의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하던 사랑스러운 모습. 수맥을 잡듯 핸드폰을 높이 들고 와이파이를 찾아 오페라하우스 여기저기를 떠돌던 살짝 짜증이 난 모습. 시차 핸디캡을 안고 강도 높은 리허설 연습에 지쳐 복도 의자에 쓰러진 듯 잠들어 있는 모습. 한쪽 구석에서 같은 구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답답함에 언성을 높이던 모습까지. 정제되지 않은 모습을 보다가 멋지게 단장을 마치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을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뭉클했다.
누군가 무단히 애쓰며 연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축복이자 연단이었다. 나의 큰언니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서 박수갈채를 받는 날보다 지하 연습실에서 같은 구간을 끊임없이 치고 또 치다가 답답함에 눈물을 흘리는 나날들이 훨씬 많았음을 안다. 그런 언니의 피땀눈물을 보았기에 진심으로 응원하면서도 집에서 연습할 때 내 귀에도 듣기 좋게 다양한 곡을 쳐주면 좋겠다.. 한곡만 계속 반복해 들으니 아쉽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진심을 담아 결혼 서약을 읽은 지 벌써 1년이 지났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결혼'을 무어라 표현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무대 뒤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라 대답할 것 같다. 빛나는 순간보다 꼬질꼬질하고 화딱지 나고 억울하고 기운 빠지는 구간이 훨씬 자주 등장할지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길을 중도하차 없이 빨리 감기 없이 함께 걷겠다는 약속이 아닐까.
살다 보면 너무나 열심히 준비했지만 무대의 서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눈물 나는 과정을 거쳐 무대에 서는 기회를 따냈지만 실력발휘도 제대로 못해보고 뚝딱대다 내려와야 되는 경우도 생긴다. 한 인간은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수많은 평가를 거치며 예민하고 요구사항이 많고 때론 히스테리적이 될지도 모른다. 상대의 날것의 모습을 본다는 건 실망할 계기도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 대상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그가 걸어온 길을 알기에 더욱 응원하고 싶어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의 곁을 지키는 일은
창립멤버가 되는 일과도 같은 것
아무것도 없는 시절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과정을 인내하는 일
부족한 한 인간이 무대에서 모든 힘을 쏟아내다
다른 영역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때
그 모습에 실망하기보다 감싸 안는 마음
쉬이 극복되지 않는 무언가와 처절히 싸우고 있을 때
아직도냐며 혀를 차기보다 묵묵히 그 곁을 지켜주는 것
무대 위와 무대 뒤의 모습이 달라
가식이나 외식이라 생각하기보다
무대 위 빛나는 그도 내 사랑
무대 뒤 꼬질꼬질한 사람도 내 사랑임을 믿어주는 일
내 앞에 선 이 사람은 한 가지 색이 아닌
무지개 빛을 내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서서히 서서히 자라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기어이 알아봐 주고 여린 풀포기 같은
미약한 발전도 자랑스러워해 주는 것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그 지루하고 폼 안나는 과정을
기꺼이 인내로 함께하는 것은 사랑
지금 곁에 이런 동행자가 있다는 건
하늘이 주신 다시없을 크나큰 축복
남편~아직 부족함이 많은 나지만 사랑으로 보듬어주어서 무대 뒤에 꾀죄죄하고 때로는 진상인 나도 예쁘다 예쁘다 해줘서 매일 감사해요.
Love you to the moon and back♡
https://youtu.be/3JRGxlezn74?si=12At3LA-ZZ-NKi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