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봄
오전부터 조금씩 가려워지기 시작한 왼쪽 정강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려움을 더해갔다. 몰래 탁자밑으로 손을 내려 야금야금 긁어가며 업무를 보다 보니 벌써 퇴근시간이었다. 그제야 제대로 내려다본 다리엔 아침엔 없었던 시퍼런 자국이 보였다. 하루 종일 성실하게 긁어댄 탓에 멍이 든 거였다. 잠깐 흠칫했지만 이러다 말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날 아침, 오른쪽 다리에 느껴지는 익숙하고 불길한 가려움에 눈을 떴다. 급하게 겉어 올린 파자마 밑으로 드러난 내 두 다리는 모기떼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하얗고 빨갛게 부어오른 징그러운 자국들로 뒤덮여 있었다. 양쪽 팔도 따끔거리며 작은 두드러기들이 앞다투어 번지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손등을 덮는 긴팔 셔츠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로 두드러기가 점령한 온몸을 감싸고 집을 나섰다. 피부과 전문의와 머리를 맞대고 최근에 환경이나 먹는 음식 등 변화는 없었는지 원인을 찾아보았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주사를 맞고 5일분의 약을 처방받아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주사와 약의 효과인 듯 하루 만에 두드러기들이 사라졌지만 열감으로 빨갛게 불타오르다 못해 하얗게 벗겨지기 시작한 귀와 양볼은 스테로이드 약의 부작용인지 면역 반응의 연장선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이 모든 증상들도 사라지겠지 막연한 희망회로를 돌렸다. 처방약을 다 먹고 맞이한 주말, 그 하루의 시작은 평온했지만 낮이 되면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나를 삼켰고 처음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온몸에 두드러기들이 올라왔다.
사포처럼 거칠어진 얼굴은 부어올랐고 외부의 작은 마찰도 수많은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노 메이크업 챌린지에 도전하는 어느 유투버처럼... 불가마에서 치열한 기싸움을 하다 방금 뛰쳐나온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민낯으로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니. 현실을 피해 마스크 뒤에 숨었지만 울긋불긋 피어오르는 발진은 너무도 쉽게 마스크 경계선을 넘어 북진 또 북진하고 있었다. 온몸이 울퉁불퉁해진 나는 착용하면 1.5배 더 예뻐진다는 전설의 귀걸이 찬스라도 써서 호박에 줄을 그어 보려 했지만 대혼돈의 시대를 맞은 피부는 귀걸이 침도 허용하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면 입구 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는 승객들을 지나 비어있는 좌석을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다니. 너른 창을 통과해 어깨 위에 머무는 햇살도 분명 따뜻한 위로였는데 잔뜩 민감해진 피부에는 따가운 공격일 뿐이었다. 옷깃을 한껏 세워 목덜미를 가리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태양을 피하는 날 선 내 모습이 낯설었다. 똑같은 출퇴근 길, 작년과 다를 게 없는 계절, 반복되던 하루의 루틴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언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나 있는 걸까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수없이 오가던 나날들을 나 홀로 다시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더 큰 피부과 전문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치료방향을 찾기 위한 피검사에서도 특이점은 없었다. 계속되는 약물치료에도 두드러기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피부질환의 증상들은 계속되고 있다. 시력을 잃으면 후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고통 앞에서 취약해진 내 눈앞에 그전엔 보이지 않던 세상이 펼쳐졌다.
내 피부병이 장기체류하며 만성으로 진화할까 불안감을 안고 두리번거린 주변에는 절망적인 사례들이 가득했다. 원인불명의 두드러기로 수개월에서 수년을 고생하고 있는 사연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오랜 투병으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자신감을 잃고 외출을 점점 꺼리게 되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호르몬 변화와 면역반응으로 찾아온 발진에 심한 고통받으면서도 태아에 안 좋은 영향을 줄까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견뎌내고 있는 임산부들. 성경에서 깨진 기왓장으로도 미처 벗겨낼 수 없는 가려움과 처절히 싸우던 욥 (욥기 2장 8절). 그들의 고통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저려왔다. 내 피부에 아무 일이 없었을 때는 와닿지 않았던 타인의 아픔이 피부질환 환자가 되고 나서야 사무치며 공감이 되었다.
지금껏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나는 상습적이고 고질적이게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일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안들에 무관심했으며 흘려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인내심 있는 스승이 되어 무지하고 깜깜한 나에게 빛을 밝혀주곤 했다. '아, 세상엔 정말로 아직 내가 1도 모르는 아픔도 눈물도 많구나.'를 잊어갈 때쯤 다시금 배우고 또 배우게 되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계절을 거스르는 차림새 단단히 여민 저 옷깃 아래, 잔뜩 추켜올린 마스크 안에,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 감히 다 알 수 없으니 섣부른 판단보다 인내가 늘 앞서기를. 오늘 마주한 누군가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아픔과 상처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 중인지도 모르니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기를.
보고 또 보다가 몇 번 봤는지 세는 걸 멈춘 영화 원더.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너무 좋아 수차례 수업자료로 활용했을 만큼 내 최애 영화이다. 안면 기형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27번의 수술을 거치면서도 유머러스함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결국 헬멧 밖 세상으로 나아갔던 소년 어기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스토리는 소년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어기의 삶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그의 절친 잭, 어기의 누나 비아 그리고 엄마 이자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상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그래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듯, 나의 고군분투를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듯 오늘 내가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도 그러하다. 각자의 삶에서 귀한 주인공이며 귀 기울여 마땅한 스토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매일 열린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더 명대사
Be kind, for everyone is fighting a hard battle. And if you really wanna see what people are, all you have to do is look.
모두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친절하세요. 그리고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 돼요.
There are two sides to every story.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이 있다.
We all deserve a standing ovation at least once in our lives.
우리 모두는 평생에 한 번쯤은 박수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할 땐 친절함을 선택하라.
Not everything in the world is about you. I'm sorry you are not the only one who has bad days.
네가 우주의 중심은 아니야. 미안한데 너 혼자만 힘든 날들이 있는 게 아니야.
We all have marks on our face. This is the map that shows us where we've been, and it's never, ever ugly.
우리는 모두 얼굴에 흔적이 있단다. 얼굴은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지도야.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해. 그러니 절대로 흉한 게 아니야.
헬멧 밖은 위험했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원더> 비하인드|방구석1열|JTBC 190706 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fXUbel90Y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