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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Mar 18. 2019

외할매가 카톡을 배운 날

세상에서 제일 멋져

외할머니의 폴더폰이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 워낙에 전화에 무심하신 분이라 폰을 굳이 하셔야하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할매가 우리 중에 일주일을 제일 바쁘게 보내는 사람이니,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새 폰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복지관에서 다른 분들이 폰으로 자식들에게 문자 보내고 전화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보면서, 할매는 처음으로 외삼촌에게 피처폰 하나를 사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서, 다른 분들이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는 것을 보고 내심 궁금하기도 하고, 손주들의 사진이며 학예회 동영상을 크게 보고싶어 하시기도 했었다. 옆에 없는 자식과 영상통화가 연결되면, 얼굴을 보며 실컷 떠들고 외할매가 한 반찬으로 차려진 저녁상을 자랑하는 것도 좋아하셨다.

 배려없게도 나는, 1, 2주에 한번 가는데 그 때마다 보여드리지 뭐,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할매가 "다 늙어빠져가지고 뭐 눈아프게 그런거 배울라꼬, 마 됐다"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외할아버지는 내심 스마트폰이 궁금하셨던 것 같다. 항상 외할머니의 폴더폰을 흘긋 보면서 저놈 고장나면 제일 좋은 놈으로 데려올거라고 큰 소리 치셨고, 그럴 때마다 외할매는 비싼 돈 들일 생각 말고 운동해서 약값이나 줄이라, 담배나 좀 작작 피우라고 외할배를 나무라셨다. 눈치없는 자식들과 손주들은 외갓댁에 가서 종일 폰만 보느라 두 분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폴더폰이 고장나자마자, 외할아버지는 현금을 주고 스마트폰을 사오셨다. 그리고 하루종일 외할머니와 함께 돋보기 안경 너머로 액정을 들여다보고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스마트폰 사용하기 수업을 들으며 이것저것 눌려보셨다고 한다. 스물 아홉부터 일곱살 꼬맹이 녀석까지 외갓댁에 가면 방에 쏙 들어가서 폰만 보는 손주놈들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싶었다. 외할매의 새로운 카톡 계정이 뜬 날, 나는 할매에게 이모티콘을 선물했지만 정작 할매는 이것저것 누르면 돈이 나가고 고장날까봐 한번도 쓴 적 없으셨다.


이모들과 사촌들이 있는 단체 톡방에서 신나게 떠들다가, 외할매를 초대했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여섯 년(?)들 때문에 외할매는 "아이고 이것들 잘 시각에 나불대는 속도를 못따라가겠다, 천천히 하나쓱 하등가 안하고" 라며, 요즘 것들과의 대화가 참 우습고 신기하다며 막내이모와의 통화에 실컷 웃었다고 한다. 자식들과 손주들이 끼니 때에 맞춰 올리는 사진을 보며, 잘 먹고 사는 것 같으니 살 안찌게 째깍째깍 움직이고 항시 유산소 운동을 하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물론 전화로.

다음에는 외할매 외할배 같이 밀면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스마트폰을 산 지 한 2주가 넘어가는 오늘에서야 큰이모와 엄마에게 이모티콘 보내는 법과 카톡 프로필 사진 바꾸는 법을 배우셨다고 한다. 외할매의 카톡 프사를 보고 나는 한참 웃었다. 얼마 전에 다녀온 막내 손녀의 유치원 졸업식 사진을 올렸다가, 며칠 뒤에는 비싼 돈 주고 폰을 사온 영감쟁이라며 할매의 잔소리를 깨나 들었던 외할배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많고 많은 사진중에 왜 하필 티비를 보다가 조는 사진을 해 놓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6년 다닌 대학교를 졸업하는 날, 면접과 시간이 겹쳐서 참석하지 못했었다. 가족끼리 맛있는 것도 안먹는 졸업식 날이 외할머니는 좀 마음에 걸리셨는지, 졸업식 전날 전화로 축하한다고 해주셨다. 우스갯소리로 "할매가 가서 졸업식 모자쓰고 교수님이랑 악수도 하고 내 졸업장도 좀 받아줄랑교" 하니까 "그럴까, 할매가 가서 달라캐볼까" 라며 유쾌하게 받아쳐 주셨다. 저렇게 어플로 대충 찍은 졸업식 사진에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걸 보니, 면접 대신 졸업식을 갔어야 했나 싶은 마음이 쬐끔 들기도 했다.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를 보면서 마음은 늙지 않는구나를 생각하곤 했는데, 정작 내 가까운 곳에 있는 외할매한테 그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무심하다가 이렇게 한순간에 훅 깨닫고마는 외손주 2호를 용서해주시길 바라며, 다음번에 찾아뵈면 외할머니가 잘 하는 고스톱 게임을 깔아드리고 와야겠다.

27살 손녀가 듣는 까꿍, 이제 애기는 아닌데..
엄마와 외할매 / 외할매 목소리가 음성지원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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