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닌 여행의 가치
부산에 살면 전라도 지역은 잘 가지 않게 됩니다. 거리상으로는 서울보다 가깝지만 교통편이 불편한 탓이 제일 큽니다. 다녀온 많은 국내 여행 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을 가본 건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그러던 와중에 광주에 사는 친한 분이 사진전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서, 사진전 구경과 응원도 할 겸, 생애 첫 광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 카페 라우더댄밤즈 (Cafe Louder than Bombs)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제일 먼저 찾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거든요. 버스에서 내려서 카페를 찾아가는 길도 좋았고, 주택가 골목의 2층에 위치한 것도 좋았어요. 카페에 들어서서 왼쪽을 바라보면 벽 한 켠을 차지한 사진들이 보입니다. 우선 커피를 주문하고, 천천히 사진들을 감상해 봅니다. 사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 번씩은 다 봤던 사진들이지만, 큰 사이즈로 인쇄를 하고 전시공간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다르더라고요.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이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는, 일상을 살다 보면 쉽게 지나치고야 마는 사소한 장면들을 통해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걸려있는 사진들 모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들이에요. 어쩌면 '이 정도는 나도 찍을 수 있겠는데?' 싶은 장면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이 사진들은 더욱 특별해집니다. 모두가 붙잡을 수 있는 순간들이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누구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죠. 제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진들 또한 비슷한 결이라서, 사진들을 보며 저도 다시 한번 용기를 얻었어요. 응원을 해주러 왔다가 오히려 응원을 받고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진을 감상한 후에 옆에 마련된 방명록을 쓰고 있을 때, 사진전의 주인공이자 지인분이 도착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무난필름(@moonan_film)'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님입니다. 올해 초여름쯤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또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아 친해졌어요. 지난 9월에 부산에 여행을 오셨을 때 처음 만났는데,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진전을 하신다고 했을 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광주로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님이랄까요. 이번 광주 여행 이틀간의 일정은 무난님이 책임져주시기로 했어요. 덕분에 큰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부담 없이 광주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 카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라우더댄밤즈(Louder than Bombs)'라는 다소 과격한 이름과는 달리 카페로 들어섰을 때의 첫 느낌은 조용하고 깔끔했습니다. 필터커피 한 잔과 '마스카포네 무스 베린느'라는 이름의 디저트를 시켜봤어요. 계절과일이 올라간 컵케이크 느낌의 디저트였습니다. 상콤 달달하니 맛있었어요. 커피는 광주 로컬이신 무난님 픽이니 두말할 것 없이 맛이 좋았고요.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의 풍경도 왠지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사진과 커피를 경험하고 가서 여행의 시작 기분이 좋았네요.
- 양림동
카페에서 멀지 않은 동네인 양림동으로 이동했습니다. 주차를 하기 위해 들린 '호남신학대학교' 캠퍼스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동네 자체가 '예술촌'같은 곳이더라고요. 알록달록한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끼고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광주비엔날레'의 전시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요. 미술(특히 현대미술)은 보고 또 봐도 도무지 이해를 잘 못하겠지만, 아무튼 조금씩이나마 영감을 주는 전시들이 있었습니다.
잠깐 들렀던 독립서점 '러브앤프리'도 기억에 남는 공간이었고,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한 적산가옥들을 만나는 것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예쁜 외관의 카페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오래된 역사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까지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이런 다채로운 분위기의 골목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직까지는)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부산이, 올드타운은 그대로 노후된 채 방치되고, 새로운 핫플레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어만 가는 것과는 적잖이 비교되는 바가 있어서, 부산 토박이로서 느끼는 점이 많았습니다.
- 쌍암공원
무난님과는 다음날을 기약하며 헤어지고, '첨단지구'쪽에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습니다. 체크인 후 짐을 풀고 간단히 쉬었다가,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었습니다(저는 여행에서 먹는 것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일정을 끝내기는 조금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공원에 산책 겸 가보기로 했어요.
10여 분간 걸은 끝에 공원에 도착하니,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공원에 있는 나무와 멀리 보이는 아파트 건물이 노을 지는 하늘에 실루엣이 됩니다. 낮과 밤이 스쳐가는 시간이자 짧지만 강렬한, 예쁜 하늘의 색을 볼 수 있는 시간이죠. 성격이 급한 나무들은 벌써 잎들을 물들이고 땅에 떨어트렸어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끝에 가을이 채입니다.
쌍암공원 가운데에는 호수가 하나 있어서, 둘레길처럼 산책하기가 참 좋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반영되어 비치는 야경과 물결을 감상하면서 걸으니, 조금은 서늘했던 공기도 어느새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다음날 일정도 있었기에 첫날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합니다.
- 담양 죽녹원
둘째 날 오전에 다시 무난님을 만났습니다. 숙소가 있는 첨단지구에 있는 '카페 네페르(Cafe Nefer)'에 들러 우선 모닝커피를 마셨어요. 확신의 E성향에, 넉살 좋고 살가운 무난님의 많은 단골 카페 중 한 곳이어서, 환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커피 맛은 말할 필요가 없었고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무난님이 선물로 이곳의 드립백을 사주었는데, 사장님이 부산에서 왔다고 서비스를 더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둘째 날은 광주를 벗어나 근처의 담양으로 향합니다. 담양은 예전에 죽녹원을 중심으로 잠깐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오랜만에 방문하게 되었어요.
'죽녹원'하면 떠오르는 대나무숲을 지나, 후문 쪽에 있는 정원에 왔습니다. 곳곳에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있어서 보기 좋았어요. 각자의 방식대로 가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저희도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주우며, 짧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이 계절을 즐겼습니다.
- 관방제림
죽녹원 바로 옆에 있는 관방제림도 걸어보기로 했어요. 강을 따라 오래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줄을 지어 나 있어서 천천히 구경하며 걷기 좋습니다. 주황, 노랑, 초록이 뒤섞인 나무들의 색깔,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들,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발맞추어 걸으며 찬란한 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니, 가을의 한가운데에 이곳까지 온 것이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분히 익어가는 계절처럼, 복잡한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어요.
관방제림까지 구경을 하고도 부산까지 돌아가는 버스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무난님이 추천하는 담양의 커피맛집으로 향합니다. '플래티커피(Flatty Coffee)'는 외관에서부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실내공간이 넓진 않지만 손님이 꽤 많더라고요. 기분 좋은 미소로 손님을 대해 주시는 사장님 덕분에 저까지 기분이 덩달아 좋아집니다. 원두를 선택하면 음료를 만들기 전에 갈아놓은 원두 냄새를 맡게 해 주시는 것까지, 섬세한 배려가 느껴졌어요. 커피 맛 또한 훌륭했고요. 이곳이 광주/담양의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마무리까지 완벽했습니다.
- 짧은 여행을 마치며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으로는 광주의 모든 것을 알기엔 부족했지만, 혼자만의 여행이었다면 분명 놓쳤을지도 모르는 장면들을 훌륭한 가이드였던 친구 덕분에 만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큰 규모가 아닐지라도 첫 전시라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직접 전시공간에 가보니 아주 근사하게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다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축하해 주러 가는 목적이 가장 컸던 만큼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간단한 선물을 준비해 갔는데, 준비해 간 것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아서 감사했어요. 마침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에는 온기가 느껴지는 딱 가을 같은 이틀간의 날씨였는데, 바쁜 시간을 내어준 것 자체가 가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혼자 여행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런 생활이 편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여행은 온전히 내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생기더라고요.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오는 기쁨이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면, 충분히 시간을 낼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하는 여행은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앞으로도 대부분은 혼자서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재미를 찾아다니겠지만, 가끔은 결이 맞는 좋은 사람들과 어디든, 무엇이든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도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처럼, 이번 여행에서 제가 발견한 사소한 가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