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근거를 전복시키는 혁신과 쇄신에의 열광, 삶과 예술의 심원한 영적 내용에 대한 광기 어린 무시, 부단히 변하는 순간적인 자극에 의해서 휘둘리는 근대적인 삶의 의미, 오늘날의 예술 활동에 스며들어 있는 질식할 것같은 우울함, 이 모든 것들이 현대의 퇴폐적인 성격을 드러내며 현대가 삶의 건강함과 삶의 피안적인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43p
하이데거가 청년 시기에 썼던 이 구절은 전쟁 전후 시기를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정녕 20세기뿐인가? 21세기와 20세기는 얼마나 다른가?
1부: 지금 왜 하이데거인가?
"모든 철학은 인간의 삶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한 모든 철학은 자신의 시대와의 대결이다. 모든 철학은 자신의 시대와 대결하면서 자신의 시대가 계속되어야 할지 아니면 변혁되어야 할지에 대해서 결단을 내린다.” - 12p
상기한 문구로 운을 떼는 ‘지금 왜 하이데거인가?’라는 제목의 장은 책에서의 서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론에서 저자인 박찬국은 우선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밝히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입증코자 한다.
하이데거가 철학 한 20세기는 기술 발전에 의한 시기였다. 또 기술에 의해 인간은 개개인의 의지를 상실하고 존재에 대한 소외와 망각을 겪었다. 그는 현대가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동시에 황량한 시기라고 지적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인간은 그저 물질적인 소비와 향락을 추구하게 된다. 물질적인 풍요를 근거로 오늘날을 가장 발전된 시기라고 일컫는 일은 어쩌면 현대인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서양철학에서 존재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항구적인 존재와 그와 대비되는 유한하고 우유적인 존재로. 항구적 존재는 과거엔 이데아나 신 따위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존재자들은 인간의 목적으로써 기능한다. 가령, 중세 인류는 마을을 건설할 때 성당을 가장 먼저 기획하고 건축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이데아나 신 따위는 폐위되었다. 그 자리에 앉은 건 자연법칙이다. 하지만, 이 자연법칙이 쓴 왕관에는 아무런 권위나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류에게 단지 수단화의 대상이자 수단화의 도구일 뿐이다. 인간은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해 유한한 세계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변화시킨다. 자연 자체도 수단화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과학주의가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계산가능한 숫자로 파악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과학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본다. 가축들을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연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역시도 본질적으로 자연이다. 닭이 닭장에 갇혔듯 인간은 아파트와 빌딩에 갇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존재자란 그 자체로 신비함과 숭고함을 지닌 존재다. 우리는 이를 부정하는 과학을 지양하고, 존재자를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 어떠한 선판단이나 욕망 따위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2부: 존재물음과 불안에의 용기
하이데거의 초기 철학관을 보여주는 『존재와 시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존재다. 그에게 현존재란 단순히 '있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는 현존재란 스스로에 대한 고뇌를 통해 실현된다고 말한다.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며 살아도, 사회의 모든 성공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고뇌가 없는 한 속인에 불과할 뿐이다. 하이데거에게 속인들이란 비본래적이며 산만하고 분산된 삶, 또 피상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속인들은 아무리 성공했다 치더라도 어떠한 불안감을 느낀다. 『존재와 시간』은 그러한 삶과 불안감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규명하는 작업이다.
하이데거는 전통형이상학과 대결을 벌인 인물이다. 『존재와 시간』이란 작업 역시 이러한 대결을 통해 이뤄진다. 하이데거는 실존이 곧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통철학과의 그의 대결은 존재론적 측면만이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도 이뤄진다. 인간은 대상을 그 자체로부터 먼저 파악하지 않는다. 지성의 이전에 실천적인 차원이 존재하며, 우리는 어떤 목적을 우선적으로 가지고 사물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세계가 개개인의 의미 연관에 따라 구조화된다고 여겼다. 세계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다. 전통철학에서는 이런 점이 흔히 잊혀지고, 세상이 물리적인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전제하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하이데거는 '탈세계화'라고, 또 우리의 생을 박탈하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목적론적 인식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통형이상학은 -또 현대과학은- 근본적인 세계를 우리가 인식하고 체험할 기회를 빼앗는다.
탈세계화란 곧 황량한 삶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황량함에서 벗어날 기회로써 죽음을 지목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본래적 삶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는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극복 불가능한 불안의 대상이다. 불안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또 그를 통해 우리는 살면서 가지었던 욕망과 목적들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이러한 직시는 세계를 구조화한 의미 연관을 절개하며 존재자 자체를 수용하게 만든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러서야 대상은 수단이 아니라 충만한 목적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강조에서 하이데거가 왜 자신의 책에 『존재와 시간』이라는 제목을 붙인 건지 유추할 수 있다. 죽음이란 시간성을 지녔다. 인간의 존재 역시 시간에 구애받는 유한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철학과 전통형이상학 사이가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화두는 바로 신이나 제일원인 등의 실체였다. 이 실체란 영구불변하는 존재로 시간을 초월한다. 이러한 실체주의는 과학에서도 여전히 핵심으로 존재한다. 자연법칙이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 존재의 시간성을 강조하고, 시간성에 의해 삶이 유의미하다고 강조하는 하이데거에게 그러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전통형이상학이 ‘죽음’과 ‘시간’에서 도피하는 학문, 또 삶을 퇴색시키는 학문이라고 공격한다. 저자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논점에서 니체와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니체는 종교와 당대의 이데올로기 따위를 ‘현실을 살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만든 우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대신 인간에게 오늘을 즐기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하이데거 역시 전통철학과 과학을 일종의 우상으로 보며, 삶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3부: 나치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전술했듯 하이데거에게 서구의 역사란 퇴행의 역사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현대인에게 과거를 보고 무엇을 배우라고 하였을 거라고 짐작하기는 쉽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이 고대 그리스적 관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고대 그리스와 중세까지 자연은 존중과 경이의 대상이었음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데카르트 이후 -데카르트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데카르트가 시대상의 표현이었을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부터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근본기분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 역사란 인류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가 인간을 통해 자신들을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역사가 인류에게 그러한 근본기분을 부여한다고 전제하였다. 근대 또 현대의 근본기분은 '의심'이다. ‘의심’이란 스스로가 어떤 견고하고 참된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기분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외부를 탐구하며, 오롯 자신의 힘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과학이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현대인의 태도다. 하이데거는 과학적 태도란 모든 것을 에너지원으로 보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이기심과 오만함이 존재함은 물론이다. 하나의 문제라면, 이런 태도에서는 인간 자신 역시 에너지원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권태란 이러한 태도에 대한 자각에서 온다. 우린 인간의 삶이 수학적으로 계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동시에, 오로지 수학적으로만 해석될 것이란 사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4장: 소박한 자연과 사물에로의 귀환
철학은 과학보다는 시와 예술에 가깝다. 최소한 하이데거의 해석으로는 그렇다. 하이데거에게 철학이란 존재 전체를 파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존재자의 풍부함 혹은 온전함을 표현하는 일이라면 과학은 대상의 원인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즉 하이데거에게 철학적 사유란 좀 더 본래적이고 온전한 사유였던 셈이다. 예술이란 과학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대한 해결책과 대안으로써 제시된다.
5장: 하이데거와 동양사상
기존의 서양 역사를 진정한 존재에 대한 망각의 과정으로 본 하이데거에 이르러서야 동서양의 지성은 비로소 대화가 가능해 졌다고 박찬국 교수는 예찬한다. 그의 이전까지 서양의 지성이란 오만한 것으로 동양을 대화상대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동양적 사유와 가까워진다. 그는 우리가 ‘결의’라는 새로운 근본기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물을 그대로 보기 위한 인격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노장사상 혹 불교의 이론과 상당 유사하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한 변화 없이는 현대문명의 문제는 무한히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현대의 문제점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진 않다. 그러한 논거나 이유를 알고 싶다면, 우린 현대를 비판한 사상가들을 읽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한 사상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자 선구자가 바로 하이데거다. 역사를 모르는 인간은 진부하다. 우리는 진부해 지지 않기 위해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의 생애와 철학의 전체적 맥락을 조망하고 압축한 서적으로, 하이데거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 역할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