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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 비판』서평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가야 한다.

by 새현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필자는 당당히 선언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인물은 막스 호르크하이머다. 호르크하이머는 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학 사회학연구소를 본진으로 삼았다- 의 행정적 업무를 총괄하는 소장직으로 오래 지냈으며, 사실상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그의 대표 저작은 두 가지가 꼽힌다. 하나는 -필자가 이전에 요악문으로 작성해 업로드 했던-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이다. 또 하나는 오늘 소개할 『도구적 이성 비판』이다. 두 저작 모두 비판이론이 어떤 문제의식에서 싹을 틔운 건지, 어떠한 방법론을 이용하고 또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상기한 두 저작의 중요성은 단순히 프랑크푸르트학파 내에서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사조의 기수였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과제는 사실상 그 사람들에 의해 천명되었기 때문이다.


서평의 역할 중 하나는 타인에게 책을 권하는 일이다. 양심에 손을 얹고, 감동받지 않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쓴 적은 없다. 만약 『도구적 이성 비판』이 의의가 단지 비판이론을 소개하는 것에 그친다면 필자는 이 책을 읽지도 않았으리라. 『도구적 이성 비판』을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텍스트가 품은 시의성이 있다. 고전이란 본래 화수분처럼 시의성이 쏟아져나오는 텍스트에 부여되는 직위다. 하지만 2025년이라는 시기에 이 책은 묵직하고 동시에 날 서 있기도 하다. 서론의 한 문장을 인용하겠다.


“확실한 것은 기술적 지식을 통해 사유 지평과 행위 지평이 확장되면서 개별 주체의 자율, 증가하는 대중 조작 기구에 저항하는 주체의 능력, 주체의 상상력 그리고 주체의 독립적 판단이 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터넷, 유튜브, 틱톡, 넷플릭스,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플랫폼 기술의 발전과 대두는 인류의 지성적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몇몇 전문가들은 대신에 젊은 세대들은 시각적 판단 능력이 뛰어나다고 몸을 사리고는 한다. 설령 그러한 주장이 맞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운운하는 시각적 판단 능력이 과연 퇴보한 다른 능력보다 더 크고 유익할까? 문제는 인류의 비판적 판단 능력 그 자체이다. 가령 한국 대학교의 실정은 어떤가? 누구보다 비판적 사고에 예민해야 할 대학생들은 인공지능을 통해 보고서 등을 작성한다. 대학교들은 그런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재원을 낭비하고 있다. 상아탑이 수많은 코끼리의 죽음 덕에 쌓아질 수 있듯, 대학교는 단순히 한 국가만의 자원이 투자되는 곳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자원이 그곳에 투자된다. 오늘날의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그 결과 윤리를 망각한다. 이러한 실정은 대중 조작 기구가 더 정치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구적 이성 비판』의 목표는 인류가 현재 이성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그러한 방식이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의 핵심부에는 발전된 학문, 과학기술이 인류를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는지에 대한 기술이 존재한다. 만일 오늘날에 호르크하이머가 살아있었다면 엄청난 쪽수의 논문을 작성했으리라


1장 목적과 수단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을 객관적 부분과 주관적 부분으로 구분한다. 칸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전자는 실천이성에, 후자는 사변이성에 해당한다. 필자의 이러한 치환은 과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쓰임새가 같기 때문이다.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 이성은 목적에 대한 사고능력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주관적 이성은 수단을 관장한다. 전술한 목적이란 어떠한 가치를 일컫기도 한다. 우리는 객관적 이성을 통해 자유, 인권 등의 인륜적 목표나 가치를 설정할 수 있다. 주관적 이성을 이러한 것들을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인류의 객관적 이성은 퇴보를 시작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것이 현대modern -한국어로는 근대와 현대로 구분되나 서구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의 문제라고 보았다. 퇴보에 의해 생긴 공백에 따라 주관적 이성의 덩치는 점점 비대해졌다. “그 자체로 이상적인 목표는 없으며, 이성의 관점하에서 어떤 한 목표가 다른 목표들에 대해 가지는 우선성을 토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즉 모든 가치는 상대화되었다. 개개인은 자기보존을 위해 자신의 이득과 안위를 위해 이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성은 유용성을 계산하기 위한 무기가 되었을 뿐이다. 자유와 평등, 우애와 연대 따위의 신성한 가치들은 다른 천박한 가치에 비해 어떠한 우선성이나 우위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물론 겉으로 신성한 가치를 숭배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속물이고, 대부분의 사람도 그다지 다르진 않다. 목표의 우선성에 대해 논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성의 또 다른 중대한 기능, 즉 비판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모든 가치는 긍정되며 단지 얼마나 합목적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을 활용했느냐가 행위의 유일한 평가 기준이 된다. 비판적 사고 능력을 상실한 개개인은 대중 조작 기구에 점점 더 쉽게 이용된다.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에 대중들이 점점 스며들어 갈수록 사회는 점점 부조리해진다. 『계몽의 변증법』 서문을 인용하자면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이 증가할수록 대중의 무기력과 조종 가능성은 커진다.” 미군이 버린 식자재로 부대찌개나 먹던 하류층이 이제 치킨을 배달시켜 먹는다고 사회의 부조리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지성적 발전 없는 물질적 확대는 천박하다. 우리는 어째서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판하는가?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왜 배부른 소리를 하냐는 말은 최소한의 소양도 없는 자들에게는 최대한의 재갈이다.


2장 상충하는 만병통치약


이 장을 호르크하이머 스스로는 이렇게 요약한다. “실증주의는 진리의 원칙을 무효화하는 데까지, 그래서 그 원칙의 이름하에 오직 비판만이 의미를 갖게 되는 데까지 독단론에 대한 비판을 계속한다. 신토마스주의는 너무나 엄격하게 이러한 진리의 원칙을 고수한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 진리는 그것의 반대로 이행한다.” 당대에 유행했던 이 두 학설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다른 체계에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둘 모두 특정 이성의 비대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실증주의는 주관적 이성의 비대함에서, 신토마스주의는 반대로 객관적 이성의 과도한 확장에 의한 결과물이다.


신토마스주의가 내적 모순을 안고 있다고 호르크하이머는 비판한다. 신토마스주의자들은 현대과학을 수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목표는 변화한 세상과 합치되진 못하는 것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역으로 현대과학을 부정했다면 강렬 지지자들을 통해서라도 신토마스주의가 더 오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고 지적한다.


위의 단락에서 토마스주의라는 명사 대신 다른 이념을 넣어도 오늘날의 무언가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기실 상충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장에는 신토마스주의보단 실증주의를 비판하는데 더 무게가 쏠려있다. 이것이 『도구적 이성 비판』이 가지는 시의성 중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실증주의자들은 과학과 진리를 동일시하는 우를 저지른다. 과학이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일 뿐이며, 도구이고 또한 사회의 요소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의 몇 가지 전제들이 이미 증명되고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신체 감각과 실험기재들을 통한 경험이 진리라는 말, 즉 경험론과 귀납론의 신빙성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믿음이란 정신적인 현상이고 “세계에 대한 그들의 고유한 정신적 관계의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에 대한 믿음도 결코 이 족쇄에서 벗어날 순 없다. 또 실증주의는 이전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믿었던 가치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시킴으로써 주관적 이성에게 무리한 권력을 주는 동시에, 그 자체가 비대해진 주관적 이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증주의와 과학환원주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메타학문적 고민과 성찰이 부재되어있다. 모든 목표를 긍정할 수 있는 주관적 이성은 방황한다. 길 잃은 이성은 -설령 아무리 문제적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존과 그것의 효용성을 따라서만 움직인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다. “그들의 고유한 절대적 과학은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사실상 과학은 진리의 한 요소일 뿐이다.”


3장 자연의 폭동


“자연을 지배하려고 노력해온 인간의 역사는 또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해온 역사다.”

문명이란 인류의 존속에 목적이 있다. -최소한 과거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자연이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문명은 자연을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역사의 발전이란 곧 문명의 발전과 동의어다. 인간의 역사가 수천 년이 되었음을 상기해 볼 때,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은 타성적이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또 이러한 경향은 호르크하이머가 살아있던 20세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간과되는 사실은 인간 역시 자연이란 것이다.


본래 자아라는 개념은 감정 따위로 지시되는 충동적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도그마와 함께 발전해 왔다. 이 충동적 욕구란 자연적 욕구, 즉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이다. 가령 기독교는 육욕들을 배제한 경견한 생활을 하라고 가르친다. 칸트는 의지가 아니라 이성을 쫓으라고 강조한다. 문명은 자아를 통해 인간의 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대신 사회가 용인하는 행동을 하라고 지시한다. 사회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소리마저도 통제하고자 한다. 즉 사회는 구성원 개개인에게 지배를 내면화시킨다. “자아 형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서양 문명의 역사는 부하가 어떻게 자기 규율에 있어서 자신보다 우선하는 지배자의 명령을 드높이는지, 즉 내면화하는지에 관한 연구기록일 수 있다.”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형성된 문명은 인간마저 주조한다. 이는 어쩌면 자연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영영 자신의 욕구를 잃었다.


4장 개인의 상승과 몰락


역설적 또는 모순적으로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무의미해진다. 추상적인 자아는 자기보존을 위해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도구로 만든다. 그러한 대상에는 타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수단이자 도구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여야만 한다. 사회 속에서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야 한다. 시대가 지날수록 사회의 변화는 점점 가속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변하는 진리가 하나 있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사회와 일치하는 존재로 변모시켜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폐기하는 자기보존 과정에서 자아는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개성을 상실한다. 그렇게 모든 원자적 개인은 타인과 동일해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리 받는다. 사회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듯- 문화산업 등을 통해 알게 모르게 개개인을 통합하고 관리한다. 개인주의 시대는 이렇듯 폭력적이고 내면적인 모순을 품고 있다.


5장 철학의 개념


마지막 5장에서 호르크하이머는 철학과 이성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지 일러준다. 우선 이 공간에서 그가 비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철학사에 항상 존재해 왔던 이원론적 체계다. -문명이 인간, 이성과 자연을 분리시켰음은 물론이고- 이원론적 체계는 결국 한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우월하고 우선한다고 매듭지어졌다. 칸트는 현상계와 물자체라는 두 세계를 구분했고, 결국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성을 우위에 둔 것처럼 말이다. 호르크하이머는 대상을 정의하는 방식도 비판한다. 어떠한 개념이나 대상을 맥락과 분리하여 정의하는 것은, 본래 언어란 모나드가 아니라 유기적 존재임을 간과한 행위다. 중요한 건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구조와 맥락이다.


“철학은 우리의 모든 인식과 통찰을 언어적 구조와 관계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이 언어적 구조 속에서 사물은 그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명명된다. 그러나 철학은 고립된 낱말과 문장 속에서 이러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호르크하이머는 청학을 정의될 수 없는 속성의 것이라 확언한다. 또 철학은 약이나 처방전도 아니다. 오히려 이성의 비판적 사고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또 그를 통해 현대의 야만적 구조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그게 바로 철학이 인류에 할 수 있는 공헌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은 치유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와 고통이 따르는 과정이다. 세상은 자고로 모순투성이다. 사회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만이 모순적인게 아니라,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현대의 문제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퇴보, 이기주의와 폐쇄주의의 팽배, 강성 진보세력과 강성 보수세력 양측에서 보이는 반동주의와 반지성주의, 그에 비례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마치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열거된 사항들을 예언한 것처럼도 보인다는 점에서 시의성을 지닌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일종의 부조리로 이해될 수 있다. 이성적으로 21세기는 이성을 통해 이해할 순 있지만, 이성을 통해 납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냉소주의는 단지 순종의 여러 종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강자의 지배를 영원한 규범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그 지배를 인정하도록 스스로를 강요한다.”

“실제로 존재 영역을 총체적으로 수단의 영역으로 변형하는 것은 수단을 사용하는 주체를 파산시킨다. 이것은 현대 산업 사회에 허무주의적 양상을 부여한다.”

“20세기에는 순응적인 군중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독자적인 사유를 감행하려는 별난 사람이 폭소의 대상이다.”


3장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구절은 마치 호르크하이머가 철학자보다는 신빙성 있는 예언자로 보이게 만든다. “산업권력의 집적과 집중이 위기에 빠진 정치적 자유주의를 제거할 때, 희생자들은 완전히 저주받게 된다. 전체주의하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엘리트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고 축출될 때, 그들은 단지 생존 수단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인간적 본질까지 공격당하게 된다.” 약자들을 위해 투신했던 좌파는 언젠가부터 부유한 자들과 엘리트 계층의 공허한 자아실현과 유희를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왜 사회는 아직 부조리한지 분석한다. 그가 지적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개개인의 비판의식이 마비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징후를 호르크하이머는 여러 측면을 통해 이야기한다. 필자가 보기에 확실한 건, 대중들과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비판의식이 20세기에 비교할 때 크게 나아지진 못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오히려 비판 능력이 퇴보하였다고도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호소력 있기도 하다. 왜 그러한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호르크하이머가 한 사회 비판과 유사한 결론들이 도출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도구적 이성 비판』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성의 끝없는 자기반성과 비판을 촉구한다. 그는 철학이 억압된 자들 대신 말을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도구적 이성 비판』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것은 호르크하이머에게 -마찬가지로 『계몽의 변증법』에 신앙을 가지는 일은 아도르노에게 - 좋은 일은 아니다. 그의 근본적인 목적의식이 독자들의 비판의식을 함양함에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도구적 이성 비판』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판적인 독해다. 이런 점에서 호르크하이머는 꽤 자비로운 저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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