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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즈 밴드 크라이』에세이

예술은 도피처가 아니라는 살아있는 증거

by 새현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락이 재유행하고 있다. 작년부터 락사운드에 기반한 여러 jpop음악가들이 내한행렬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데이식스와 QWER등의 밴드가수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받고있다. 이러한 유행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밴드를 소재로한 애니메이션, 『케이온 극장판』이 재개봉했다. 2022년에는 『봇치 더 록!』이라는 애니메이션이 흥행했고, 한국에도 다수의 충성층들을 만들었다. 후속편이 제작발표 되었을 때 우는 팬들도 있었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로.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유행이 락이 유행한다기보단 밴드가 유행하는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다소 품고있다.


락은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락의 주체는 가난한 백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락음악은 형식적으로도, 또 내용적으로도 반체제적이었다. 물론 본 조비의 대표곡인 「Livin' on a Prayer」와 같은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도 여럿있었다. 다만 락스피릿이라는 관념은 통례적으로 사회에 대한 저항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식스와 QWER은 이러한 락스피릿을 지닌 아티스트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이들은 대형기획사에서 많은 자본과 다양한 인력이 투입된, 이른바 대규모 문화산업의 상품이다. 이들의 노력과 실력, 또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떠나, 명명백백하게 이들은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락스피릿을 지니지 않았다는 지적은 윗 문단에서 언급한 두 애니메이션에도 유효하다.


『케이온』과 『봇치 더 록!』가 락스피릿이 부재하여 있다는 지적은 첫 째, 서사가 단순하다는 점에 있다. 물론 작품 내에서 등장인물들의 성장은 다소 존재한다. 하지만 -심하게 말한다면- 서사가 부실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피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이 어떤 상처가 있는지 제작자들은 그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두 작품이 캐릭터성에 기대 흥행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둘 째로 락적 전통이라고 볼 수 있는 어떠한 저항정신이 부재하여있다. 마지막으로 『케이온』과 『봇치 더 록!』모두 문화산업의 일환으로 대중성을 향해 크게 몸이 기울어져있다. 즉 작품성이 아니라 시간때우기 방점이 찍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제작자들이 작품에 애정이 없었다든지, 예술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도르노적으로 표현하면, 이들은 형식도 내용도 긍정이다. 이들의 참신함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참신함에 머물러있으며, 금전적 촉진을 위한 참신함이다. 반면『GIRLS BAND CRY』는 락스피릿이 있다는 점에서 전술한 두 작품과 다른 궤에 있다. 이제 필자가 락스피릿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설명할 차례다. 이를 위에서는 잠시 먼 길을 돌아가야한다.


20세기 독일 출신 철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을 갖추었고, 그리스 고전 비극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의 관점은 오늘 날 예술철학전통의 당당히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예술은 진리의 도피처이다.”라는 테제는 대략 그의 논지를 요약해준다. 아도르노는 사물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눈다. 이 긍정과 부정은 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덧붙여 사회적인 맥락을 통해 나뉜다. 사회는 어떠한 가치나 명제, 진실 따위는 부정한다. 반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은, 설령 그것이 거짓이고 기만이라고 하더라도 긍정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분은 ‘진리’라는 존재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예술이 진리의 도피처라는 의미는, 진리는 사회에 의해 억압받기 때문에 진리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는- 설령 그것이 우회적일 뿐이라도- 결국 예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진리가 머무는 장소가 될 수 있을꺄? 그것은 긍정과 부정이 함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도르노는 긍정을 형식으로 내용으로 부정을 다루는 작품만을 예술로 취급했다. 이 긍정이란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부정은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은 것을 지칭한다. 예술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정되는 대상을 밝혀내는 일이다. 모순적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정이란 결코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생각이었다. 어찌되었든 형식과 내용 모두가 긍정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시간태우기, 불쏘시개, 자본을 위한 상품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형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필연적으로 예술이 아니라 문화산업의 일부가 될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가령, 아도르노는 TV에서 나오는 로맨스 작품들을 그러한 것들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일종의 체념과 허무주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리가 현실에 드러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도르노의 학파 동료이자, 함께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명저를 함께 집필한 호르크하이머는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철학과 예술의 역할은 언어를 빼앗긴 것들의 언어를 되찾아주는 일이다.” 둘의 주장은 표면적으로 볼 때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비슷하다. 결국 예술이란 억압된 자들의 자기표현이라는 점이다.


락스피릿은 상기한 견해들과 어느정도 상통되는 점이 있다. 아도르노의 예술과 락스피릿은 양자 모두 반사회적, 즉 부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들에게 아도르노의 말을 모욕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예술이라는 장소를 도피의 장소가 아니라 투쟁터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술은 진리의 도피처가 아니라 진리의 투쟁터다. 『GIRLS BAND CRY』는 예술을 투쟁터로 삼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GIRLS BAND CRY』는 일본 토에이사에서 2024년에 방영한 3D애니메이션이다. -토에이사는 대형 제작사라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아도르노의 주장과 상충하는 듯도 하지만, 많은 제작사에서 많은 자본을 투입했다는 이유로 예술이 되지 못한다면, 봉준호의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1화는 주인공인 이세리 니나와 서브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모모카가 만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세리 니나의 경우, 학교를 자퇴하고 도쿄로 상경한 -정확히 말하면 도쿄는 아니고, 서울로 치면 경기도 쯤인 곳이지만- 17살 학생이다. 그녀는 도쿄에서 홀로 검정고시와 입시 준비를 할 계획이다. 대략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 그녀는 일본에서 청소년 교육 관련 서적의 작가이자 교사로 유명한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 학교에서 이지매를 목격하고, 왕따를 당한 학생을 도와준다. 하지만 감사인사같은 조그마한 보상도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니니가 이지매를 당하게 된다. 참다 못한 이세리는 상대와 싸움을 벌였는데, 학교와 그녀의 아버지는 이 일을 덮고자한다. 첫 째로 학교에서 이 일의 대가로 이세리 니나한테 대학교 추천장을 써주기로 하였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교육자인 자신의 이름에 먹칠이 묻을까봐였다. 결국 니나는 -박박 대를 들어서- 학교를 자퇴하고 독립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하며, 스스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성공한다면 자신의 옳음이 입증될 것이라고 믿는다.


상경 첫 날부터 고생을 하고 녹초가 된 니나는 근처에서 모모카가 버스킹 공연을 한다는 걸 알게 된다. 니나는 모모카의 팬이었고 트위터도 팔로잉 중이었기 때문에 버스킹을 한다는 트윗을 금방 볼 수 있었다. 모모카는 다이아몬스 더스트라는 밴드 보컬 및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작 중 시점에서는 탈퇴를 한 직후다. 다이아몬스 더스트는 고등학생시절부터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꾸려온 밴드였으나, 기획사에서 아이돌 밴드로 노선 변경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밴드를 탈퇴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음악들의 소유권도 모두 넘겨주는 호구짓을 한다- 한다. 음악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 모모카는 도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버스킹을 할 작정이었다. 니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 모모카는 자신에게 팬심을 표출하는 니나에게 몇 가지 도움을 줄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니나의 음색을 듣고는, 다시 밴드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집을 팔아버린 탓에 니나의 집에 빌붙은 것은 덤이고.


이런 과정에서 드럼을 담당하는 스바루가 합류하고, 본래 함께 2인조 밴드로 활동하던 토모와 루파도 밴드에 합류한다. 토모는 건반전공이고, 루파는 베이스기타를 친다. 이후 토게나시 토게나리라는 밴드 이름도 정해진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 갈등이 생기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주로 다뤄지는 갈등들은 니나의 성장과 관련되어있고, 또 락스피릿과 관련되어있다. 니나가 프로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모모카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원하는 사안이었고- 모모카는 밴드를 그만 둘 것이라고 말한다. 니나는 격한 감정을 느끼는데, 자신이 밴드를 결성한 이유가 바로 모모카의 음악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홀로 상경한 모습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모모카가 프로의 문턱 앞에서 겁을 낸 이유는 자신이 또 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니나는 결국 모모카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애니메이션의 마지막은 대형 기획사에 스카우트되었던 토게나시 토게나리가 다시 인디밴드로 돌아간채 무대에서 공연이 하며 끝이 난다. 니나는 자신을 억압한 학교와 가족, 자본의 문제에 대항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견지하고 전진해 나간다. 사실 다이아몬드 더스트에 모모카 대신 온 새로운 보컬리스트는 니나와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니나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이지매 사건 이후부터 사이가 틀어졌다. 심지어 그녀가 다이아몬드 더스트의 자리도 차지했기에, 우리의 주인공이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긴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화에서 공연을 하며 니나는, 자신이 경쟁심과 복수심을 느꼈던 그녀와 함께 나눴던 우정과 추억들을 상기한다. 연출로 볼 때 그녀에 대한 니나의 감정은 꽤 누그러진 듯 하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란 스스로의 판단 하에 가치판단을 하는 인간을 지칭한다. 또 위버멘쉬 끝없이 발전하는 존재이며 자기자신마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다. 니나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채운 복수심과 경쟁심, 증오심 따위 부셔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애니메이션 내내 반복된다. 이런 점에서 이세리 니나, 우리의 귀여운 주인공은 위버맨쉬다.


그녀에게 이러한 찬사를 내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GIRLS BAND CRY』가 훌륭한 성장물이고, 니나가 위버맨쉬라는 비평말이다. 그리고 필자는 남과 같은 이야기를 할 생각은 도저히 없다. 필자가 이 작품에 감명받은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는 『GIRLS BAND CRY』가 예술이란 무엇인지, 또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지 훌륭히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이유다. 『GIRLS BAND CRY』는 곧 예술은 도피처가 아닌 투쟁터라는 살아있는 증거다 .




우선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멤버 들이 각자의 상처와 콤플렉스,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니나와 모모카의 사연을 이미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하자. 드럼담당인 스바루는 일본의 유명배우인 할머니 때문에 눈칫밥을 먹고 살고 있다. 주위에서도 스바루는 당연히 배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압박을 주고, 할머니 역시 스바루가 배우가 되길 바란다. 할머니의 소원은 자신의 손녀와 함께 촬영을 하는 것이기에 스바루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음에도, 일반적인 고등학교가 아니라 배우학원으로 진학한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에게 배우가 될 생각이 없다는 걸 숨기고 있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으면 유난히 발끈한다. 스바루는 이런 숨막히는 상황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밴드를 택했노라고 스스로 밝힌다.


-토모와 루파의 경우 뒷배경이 제대로 묘사되진 않았으나- 토모의 경우 가족과의 갈등이 있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독립한 상황이다. 친모가 집에서 볼륜을 저지르는 걸 보고 정이 떨어진 듯 보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음악활동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데, 이전 밴드멤버들과의 마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다. 루파의 경우 동남아시아 혼혈-정확하진 않다-이다.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일본의 인종차별은 꽤 유명하다-을 당하면서도 부드럽고 성숙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작 중에서 꽤 인상깊게 나온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락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여기서 쉽게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이 토게나시 토게아리라는 밴드에 모인 이유는, 모두 타인 그리고 사회와의 갈등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갈등이란 사회라는 ‘긍정’이 등장인물들을 ‘부정’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토게나시 토게아리가 모모카의 음악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기 위한 밴드임을 상기해본다면, 이들은 결국 ‘부정’된 자신이 실은 ‘부정’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음악을 하는 셈이다. 사실 호르크하이머는 언어가 박탈당한 대상을 ‘자연’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인간도 사실은 자연임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연한 자신’이 있지만, 사회에 의해 우리는 나 스스로를 억압하고 변형시키며 언어를 박탈한다. 즉 토게나시 토게아라는 밴드는 사회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 자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임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의 내면’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다.

또 토게나시 토게나리라는 밴드의 예술가적 태도가 이세라 니나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된 장면이 있다. 소설을 쓰는 필자에게 이 대사는 꽤 인상깊었다. 사실 인상깊음을 넘어 필자의 세상을 변화시킨 정도다.


”할퀸 자국이라는 말 좋지 않아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마구 날뛰고, 내가 상처받으면서 상대도 상처 주겠다는 느낌이지 않아요?”


필자는 『GIRLS BAND CRY』를 시청하기 전부터, 아도르노의 테제에 불만이 있었다. 나는 결코 예술을 도피처로 여긴 적이 없다. 나에게 항상 예술은 투쟁터였다. 하지만 위의 대사를 보고, 그리고 『GIRLS BAND CRY』를 끝까지 감상한 후 더 명징해진 것이 있다.


나에게 예술이란 투쟁터이고, 상처줌이며, 세상에 대한 복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정된 진리를 들춰낸다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균열은 필연적으로 독자에겐 상처로 남거나 외면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관심도 가지지 않았고, 또 부정해왔던 것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으면 큰 충격에 빠진다.충격을 넘어 상실감에 빠지는 이들도 있고, 자살을 하는 이들도 있으며, 평생 그 사실에 덜덜 떨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의지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개인을 그러한 개인으로 결정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학설은 인류 단위의 상처였다. 개인들은 수프에 빠진 오래된 빵조각처럼, 지배이데올로기에 젖어 흐물흐물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예술 작품은 두 가지로 나뉜다. 상처를 치유하는 예술과 상처주는 예술. 양자 중 후자가 더 위대하다고 필자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을 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흉터를 만드는 일이다. 위로는 일회적이고 휘발하는 것이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상처가 아픔과 함께 성장의 기회를 준다면, 위로는 한낱 멈춰서게 만들 뿐이다. 그런 까닭에 위로란 언제나 공허하고 기만적이다. 이런 까닭에 위로와 애도로는 세상의 부조리를 전복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부정의한 사회를 재상산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세상의 가시는, 찔러보기전까지는 불가해하다. 세상의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상처가 필요하다.


더불어 토게나시 토게아리가 작 중에서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자신들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에 대한 저항심으로 가득차있다. 토게나시 토게아리라는 이름도 한자로는 刺無し刺有り, 한국어로는 가시 없음 가시 있음이다. 겉으로는 가시가 보이지 않더라도, 밴드 구성원들의 내면에는 가시가 가득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예술은 왜 도피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토게나시 토게아리의 치열함이 있다. 결코 ‘도피’로 전락시킬 수 없는 치열함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명은 근거 없이, 너무나도 쉽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 보인다. 이미지 두 가지를 준비했다.



모모카는 니나가 프로가 되고 싶다고 하자 경계심을 들어냈다. 전술했듯 자신이 또 실패할까봐기도 하지만, 니나가 자신처럼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저찌 서로 화해하고, 프로지망을 하기로 결정을 한 후에도 비슷한 일이 연유로 갈등이 한 번 더 발생한다.


니나가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경쟁상대라고 선언할 당시, 다이아몬드 더스트는 떠오르는 루키였다. 그러니까 엄청난 속도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음악으로 프로가 되는 것도 낙타가 바늘 구멍 뚫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런 바닥에서 이미 기반을 충분히 다진 상대를 결투상대로 삼는 일은 어떤가? 모모카는 니나의 마음을 꺽기 위해, 다이아몬드 더스트는 잘못된게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아이돌 노선을 취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니나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모카는 니나를 보고 있으면 예전의 자신이 떠오른다며 말한다. 과거 즐겁게 음악을 하던 자신 말이다. 그러니 니나 역시 계속 즐겁고 해맑게 음악을 하길 바란다고 고백한다. 니나는 그 말에도 지지 않고 오히려 뺨을 날린다. 자신을 추억에 가둬두지 말라고, 도망치지 말라고. 그녀는 자살을 결심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우울했지만, 모모카의 음악을 듣고 버텼었다. 그런 모모카의 음악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니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모모커가 밴드를 함께 시작한 친구들에게 자퇴를 하자고 설득하는 장면이다. 자퇴까지 할 것이 있냐는 친구들에게, 모모카는 말한다. 도망칠 곳이 생기면 안일해질 것이고 치열함을 잊을 거라고. 어려우니까 퇴로를 끊어야한다고. 도피란 일종의 물러섬이며 이들에겐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그러니 모모카와 니나를 보고 우리가 예술은 도피처라고 선언하는 일은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


토게나시 토게아리는 진리를 외친다. 그 진리란 「빈상자VOID」라는 노래에서 가장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가사를 인용하자면 “정답이 뭐야, 가치 따위 없어 나는 평생 내가 아닌 누군가로는 살 수 없어.” 이 있다. 사회란 언제나 어떠한 가치를 지향한다. 즉 사회에는 늘 정답이 설정되어있다. 가치란 사회를 유지하고, 개인의 복지를 증진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가치를 지향한다는 건 언제나 다른 가치를 무시하고 억압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헤겔이 연이어 선언하였듯 긍정은 곧 부정이다. 물론 가치를 따르는 사람은 많고, 그걸 헛된 무언가로 치부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나 자신’을 지향한다는 건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행하는 일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나’란 ‘무가치’함에도 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 뒤에 따라나온다. 그 누가 토게나시 토게아리와 멤버들의 Live를 보며 그 누가 예술을 도피처라고 말하겠는가?




『GIRLS BAND CRY』는 단순히 밴드를 중요 소재로 한 성장드라마다. 요즘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꽤 흔하지만 『GIRLS BAND CRY』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토게나시 토게아리는 거대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 아우라에서 우리가 또 하나 상기할 수 있는 건 예술이란 무엇인지, 또 예술가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하는지 이다. 예술은 회피가 아니다. 예술은 상처를 위로하는 일이 아니다. 예술은 도피처가 아니다. 예술은 직면이다. 예술은 상처줌이다. 예술은 투쟁이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개별자의 보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GIRLS BAND CRY』를 보며 눈가를 훔쳐야만 했다. 끝나고 한 번 더 돌려보기도 했다. 며칠간 OST도 계속해서 들었다. 사실 이런 짓이 바보짓이라는 건 안다. 작품의 엔딩을 보고 생긴 공허함, 작품을 보며 생긴 상처는 이런 짓으로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짓이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GIRLS BAND CRY』는 분명 상처주는 예술이다. 또 투쟁하는 예술이다. 『GIRLS BAND CRY』라는 작품은 “예술은 진리의 도피처다.”라는 아도르노의 테제에 대한 살아있는 반증이다.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많이 재생되는 「빈 상자」의 가사를 한 번 더 인용하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정답이 뭐야, 가치 따위 없어 나는 평생 내가 아닌 누군가로는 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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