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영역에서의 허무주의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서문에서 회의주의란 단지 이성의 쉼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은 인식론의 영역 - 더 넓게 본다면 존재론까지 포함하여 - 에서 흄의 철학을 염두에 둔 것이다. 흄은 인과관계라는 개념 조차도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여겼다. 칸트는 반면 인과관계등의 개념등이 모든 인간이 가진 능동적이고 선천적 (선험적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좋겠지만 칸트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선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인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흄의 철학을 반대한 이유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흄의 회의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에겐 학문이란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학문만이 문제는 아니지만)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를 쓴 목적 중 하나는 수학, 과학 그리고 철학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칸트의 주장은 오늘 날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 회의주의에 빠진 허무주의자들에게는 이에 탐탁치 못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려해볼 때,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식론과 존재론이라는 분야에서 논리싸움으로 허무주의를 이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x는 없다.”라는 주장은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실존의 영역으로, 형이하학적인 영역으로 전장을 옮긴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러한 영역에서도 물론 허무주의를 주장할 순 있다. 또 허무주의가 가진 근거들이 소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통속의 뇌를 받아들이든 말든 우리가 실천해야할 바는 달라지지 않는다. 실천에 대해 먼저 논의해보자.
철학에 대해 애매한 지식과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칸트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 최종적으로 말하는 것과 니체가 내는 결론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해본 일일 것이다. 극단적인 이성주의자로 칭해질 수 있는 칸트는 인간이 항상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러한 연유로 칸트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발전하려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이것이 『실천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다. 그 태도란 상승욕구를 가지는 태도다. 니체의 경우도 결국 우리에게 상승욕구, 끝없이 발전하려는 태도를 지니라고 거칠게 말한다. 니체의 공격은 본질적으로 칸트의 철학을 향한게 아니라 칸트의 철학을 비판적 사고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니체의 니힐리즘을 주장했다고 그가 허무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영역에서 허무주의를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에서의 허무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의 권위 중 하나였던 니체는 이렇듯, 기실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허무주의 이론 중 하나로 통속의 뇌를 예를 들어 마저 설명해보자. 통속의 뇌가 정말로 사실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통속의 뇌라면 자살할 것인가? 정말 ‘나’가 통속의 뇌라면 자살도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게으르고 무의미하게 삶을 연장하기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설령 자신이 통속의 뇌에 있더라도 그건 자신의 손해일 뿐이다. 그러한 행동 때문에 얻을 미래의 고통을 우리는 느끼게 될 것이다. 삶에서 유일하게 옳은 태도는 단 하나 뿐이다. 바로 칸트가 말하였고 니체도 연이어 간,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태도다. 허무주의는 이름 그대로 허무하다. 그 이유는 허무주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실재적인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