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사물답게 있는 사물은 진실로 무엇일까?"
하이데거의 생애에 걸친 문제의식이 『예술 작품의 샘』의 포문을 연다. 예술 작품은 무엇일까? 이를 탐구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기원이 무엇인지 묻는다. 왜냐하면 그 기원이 예술 작품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사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만 예술작품도 논의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사물이라고 부른다. 이는 사물에 대한 가장 넓은 쓰임새일 것이다. 예술 역시 사물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너무 넓기 때문에 무언가를 탐구하는 데는 무용하다. 이어 하이데거는 이보다는 좁은 사물의 보다 좁은 의미들을 염두에 둔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물은 인간이나 생물 등을 지시하지는 않으며 톱, 망치, 컵 등을 지시한다. 이 의미는 가장 단순한 차원인데, “우선적으로 그 사물이 순수하다는 것, 즉 그냥 사물일 뿐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에서는 사물의 사물다움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전통적 견해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견해들은 자연스럽게 사물에 대한 개념 정의를 이끈다. (화살표의 좌측은 기반 견해이고, 우측은 그로부터 도출되는 개념 정의다.)
‘그’ 사물에 ‘그’ 속성이 있다는 방식의 정의 > 사물은 특징을 지니는 것이다.
사물은 주위 속성들의 집합 (우유적) > 사물은 감각 자극의 통일체다.
사물은 핵심속성을 지님 > 사물은 형태와 재료의 혼합이다.
이 개념들은 -하이데거의 것과 비교하면- 상식적인 견해다. 또 우리는 이런 개념들을 바탕으로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풍토에 거부의사를 표한다. 그는 우선 언어적인 방식인 1번 견해를 배격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로 '그'사물에 '그'속성이 있다는 언어적 표현에는 이미 선입견이 들어있다. 둘째로 하이데거거 언어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는 주어와 술어구조가 사물의 구조를 잘 대변하지 못하기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어 술어구조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사물을 제대로 인식한다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사물에 부과하는 일이다. 우리의 생각이 사물을 덮친다.
2번 견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후설의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소리를 듣지만, 그것을 단지 소리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소리들은 항상 인식 주체에게는 무언가의 소리다. 우리는 새소리를 듣고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 설령 소리가 우리의 뒤부터 들리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어떤 소리인지 인식한다. 만약 사물이 감각자극의 통일체라면 이런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사물에 대한 마지막 견해를 살펴보자. 이러한 견해에서 "사물은 형태를 갖춘 재료"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개념이 예술에도 비교적 잘 적용된다고 본다. 『예술 작품의 샘』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면 이 개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고 받아들일만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하이데거는 이러한 견해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견해의 발전사를 추격한다. 형태란 “재료의 부분들이 공간상의 장소에 분산되고 배치된 것”이다. 자연물의 이러한 형태는 우연적으로 형성된 것일 테지만-재료가 형태를 정하지만-, 도구에는 아니다. 우리는 이 개념이 자연물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도구에서 온 것이고 이후에 외연을 넓혀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구란 용도를 가지고 만들어지고, '사물은 핵심속성을 지님;'에서의 핵심속성은 바로 그 용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도구는 용도가 먼저 정해지고 그에 맞춰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후 형태에 맞게 재료가 정해진다. 즉 이 견해는 용도를 가진 사물을 이야기하는 데만 적절하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개념이 기독교로부터 -혹은 더 이전의 어떤 종교에서- 기원되고 그 흐름을 따라 지속되었다고 보았다. 상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아마 그는 기독교의 목적론적인 자연관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이 자연관은 더 발전하여, 과학이 발전하여 종교가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지속되어 왔다. 자연은 인간의 ‘용도’를 위한 수단으로 남았다. 하지만 자연물도 예술도 도구와 달리 용도를 가지진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물의 사물다움을 감춰버린다.
하이데거는 전술한 견해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자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방안은 바로 현상학적 방법론에 가까운 것으로 어떤 철학적 이론 없이 그것을 직접 묘사해 보는 일이다. 이렇게 사물을 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자세한 이유는 후술- 실재하는 도구를 묘사하는데 왜 예술작품이라는 가상의 것으로 우회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왜 그렇게 생각하였을까? 물론 그는 예술을 플라톤처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일상에서 우리들에게 도구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이에 대해 깊게 고민하거나 성찰해보진 않는다. -이는 존재와 시간에서 먼저 주장된 내용인데- 세속세계에서 인간에게 중요한 건 목적과 작업이다. 도구란 것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사용된다. 그러던 우리가 도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때가 있다. 가령 식칼의 날이 휘어져 파를 자를 수 없게 되거나 연필이 부러져 글씨를 쓸 수 없게 될 때다. 실상 용도를 가진 것이라도 그것 안에는 수 많은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가능성 중에 우리는 하나만을 받아들이고, 그것마저도 쉽게 익숙해진다. 익숙해진 존재는 시들해지고 단순해진다. 일상생활에서 도구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하지만 도구를 예술 작품으로 옮긴다면, 우리는 그 도구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 도구는 작업에 쓸 수는 없지만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원래의 화제로 되돌아와, 반 고흐의 그림을 보자. 하이데거는 이 그림을 어떤 철학적 이론 없이 직접 묘사한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신발 도구의 헤어진 안쪽의 어두운 구멍에서는 노동하는 발걸음의 고단함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질기고 튼튼하고 묵직한 신발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밭에 나란히 멀리 뻗은 고랑들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끈기가 쌓여 있습니다. 신발가죽은 기름진 땅의 물기로 눅눅합니다. 신발 바닥에는 저물녁 들길의 쓸쓸함이 밀려옵니다. 신발 도구 속에서는 대지의 침묵하는[말해지지 않은]부름이 울립니다. 즉 대지는 익어가는 곡식을 잠잠히 선물해주거나 황량한 겨울 들판의 휴경지에서 신비롭게 버티고 있습니다. 빵을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평 않는 걱정, 궁핍한 시기를 다시 넘긴 것에 관한 말 없는 기쁨, 임박한 출산 앞에서의 떨림, 주위에서 위협하는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신발 도구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도구는 대지에 소속되고 농사짓는 여인의 세계 속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받으며 소속된 가운데 생생하게 서 잇는 도구 자체는 자신 속에서 쉬게 됩니다."
우리는 이 그림에 대해 얻은 감상을 상상이나 추론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감상은 우리의 생각이라기 보단, 예술이 직접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의 본재는 존재자의 진실의 스스로를 작품 속에 작용하게 놓는 일”이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진리와 관련된다. “따라서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앞에 놓여있는 개별 존재자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아마도 사물들의 보편적인 본재를 재현하는 일”이다. 작품은 존재자를 드러나게 둔다. 즉, 대상의 존재가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예술은 진실을 열어젖힌다. 이 단계에서 하이데거는 두 가지 성과를 얻었다고 자평한다.
작품에서 사물적 성질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세 가지 사물 개념은 부족하다.
예술의 하부구조(재료,사물)만으로는 예술의 본재를 설명하는 데는 부실하다.
예술을 도구처럼 여기면 필연적으로 예술의 사물성만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예술이 사물에 합병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술작품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젖힙니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열어젖힘이 벌어집니다. 즉 막힘을 없애는 일이 벌어지고, 다시 말해 존재자의 진실이 벌어집니다. 예술작품 속에서는 존재자의 진실이 스스로를 작품 속에 작동하게 놓았습니다. 예술은 진실의 스스로를 작품-속에-작동하게 놓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술작품의 샘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이 무엇인지도 가볍게 정의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어 예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예술 작품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방법론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최대한 배제한 채 예술작품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태도들을 나열한다. 작품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태도, 작품을 이론화하는 전문가들, 또 과학적 대상으로 삼는 예술사 연구자들의 태도는 모두 예술과 작품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게 하는 태도다. 하지만 무언가를 맥락 속에서 완전히 떼어놓고 보는 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작품으로서 존재자는 작품에 속하는 유일한 영역은 작품 자체가 열어젖히는 곳”이라고. 즉 우리는 작품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작품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열어젖히며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 이제 하이데거는 작품의 사물다운 측면부터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작품을 물리적으로 세운다는 일은 그것이 하나의 세계를 열어젖히게 하는 일이다.
대지란 “작품이 그렇게 되세워지면서 출현하게 하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작품은 대지 자체를 하나의 열린 세계 속으로 밀어 넣고 그 속에서 유지”하며 “작품은 대지 일반을 하나의 대지로 있도록”한다. 일반적으로 대지, 즉 재료는 예술에서만 효과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대지는 우리의 탐구에서 계속 도망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지는 우리로부터 계속 도망친다. 우리가 바위의 내부를 알기 위해 그것을 깨부숴본다고 하자. 하지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바위의 내부가 아니라 새로운 겉면일 뿐이다. 이렇듯 대지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대지의 소멸만을 가져온다. 하지만 예술에는 상황이 다르다. 대지는 모양은 바뀔지 몰라도 익숙해지거나 소모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풍부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예술작품이 보여주는 것만은 대지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역시 보여준다. 그렇다면 양자는 어떤 차이고, 그 관계는 어떨까?
“세계는 대지 위에 근거하고, 대지는 세계를 통해 솟아”난다.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양자의 상호작용을 하이데거는 투쟁이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이 투쟁은 서로를 제거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투쟁은 양자를 서로 돋보이게 하고 단단해지게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작품에 통일성이 생기며 일종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진실이란 이러한 운동에서 나온다. 이 진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여기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진실한 것의 본재가 하이데거가 찾고자 하는 그것이다. 이는 어떠한 보편개념이 아니다. 진실이란 그러한 개념들의 근간이자 토대로 존재의 막힘없음이다.
이 진실은 예술이 가진 틈에서 나온다. 이 틈이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일종의 베일이 되기도 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진실은 진실이면 진실은 진실이면서도 진실이 아니며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진실을 가린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본재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 때문에 생겨난다. 세계는 틈이지만, 대지는 자기자신과 틈 모두를 숨기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작품은 숨김과 드러냄 사이의 투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진실이 막힘없이 본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투쟁에서 아름다움이 나온다.
다음 질문은 도구와 작품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제작과 제작된 것, 창작과 창작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창작된 것과 작품은 얼마나 긴밀한가? 왜 진실의 본재와 작품이 향하는 곳은 같은가? 결국 진실은 왜 사물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가?
당연하다시피 작품과 도구는 모두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즉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바탕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 명료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단어의 어원, 즉 고향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리스인은 예술을 포함한 수작업을 테크네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오늘 날의 사고방식과 달리 테크네는 실천적 방식이 아니라 앎의 한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의 앎이란 또 오늘날의 앎과는 달랐다. 그들은 존재를 막힘 없이 보았다-최소한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스인들에게 테크네란, 존재를 막힘 있는 곳에서 막힘 없는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즉 예술가가 테크니테스인 이유는 수작업과 손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를 막힘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창작하기”는 “산출된 것 속으로 분출시키기”이다. 그리고 “작품이 작품으로 생성되는 것은 진실의 생성됨과 벌어짐의 한 방식”이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술한 근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실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 사이에 생긴 틈과 막을 통해, 즉 예술의 근원적인 투쟁을 통해 발생한다. “이렇게 열린 곳과 열림이 진실”이다. 존재자들은 그 틈으로 나왔다가 후퇴한다. 즉 진리란 대립이고 그로 인해 생긴 틈 안을 채운다. 진리는 열며 채우고 이 방식이 “진실의 스스로를-작품-속에-작동하게-놓음”이다. 물론 본재는 오히려 최고 등급이 존재가 되거나, 가장 기본적인 등급의 것이 되기도 한다. 예술의 진리는 이렇듯 유동적이다. 반면 과학의 탐구방식은 본질적으로 진실을 고정하는 성향이 있다.
전술하였듯 진실은 예술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고 틈만듦이며 채움이다. 즉 진실은 작품에 스며있으며 또 스며드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하나의 작품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존재자를 산출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작품이다. 즉 “이런 산출작업이 창작”이다. 그렇다면 창작된 존재란 무엇일까?
“자라나는 세계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무질서를 출현시키고, 그것으로서(척도)를 세우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감추어진(막힌)필연성을 열어젖”힌다. 또 “대지는 모든 것을 지니는 것으로서, 또 자신의 법칙 속에 담긴 채 끊임없이 숨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세계는 그 속에서 결정과 척도를 요구하고, 존재자를 세계의 열린 궤도들에 다다르게”한다. “투쟁은 투쟁하는 것들이 서로에게 긴밀히 속하는 상태”다. 이 투쟁하는 양자를 가르는 금이 있다. 이 금은 대지에 의해 형태가 변화한다. 대지의 의해 숨겨지고 보호되다가 솟아나며 정립된다. 이 정립이 바로 형체다. 작품이 창작된다는 것은 정립된 금들의 짜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짜임이 바로 창작이다.
사실 작품의 창작과 도구의 제작 간의 차이는 앞서 논의한 바에서 이미 단서가 있었다. 도구의 제작은 그것의 용도에 적합해지면 완료된다. 나무는 나무가 아니게 되고 지팡이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팡이는 지팡이가 아니라 걷기 위한 것으로 익숙해진다. 하지만 작품은 그대로 작품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구는 점점 익숙해지지만 예술은 점점 낯설어지고 고독해지며 자신을 드러낸다. 즉 작품은 다른 것들 과의 관계에서 생소할수록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진다. 그리고 작품이 드러나는 진실은 작품이 그 자체로 감상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감상은 돈, 비평, 관리등의 사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진실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마지막으로 질문하는 것은 작품은 자연과 관계를 가져야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작이란 대지에 금을 긋는 과정이기 대문이다. 우리는 금을 어떻게 그을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은 감상되어야 유의미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예술의 틈이 생겨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정을 시짓기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짓기가 단지 일반적인 언어사용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언어를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고려해 보면, 하이데거의 언어는 물감이나 대리석 따위를 지칭할 수도 있다. 또 하이데거는 언어에 단순한 의사소통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전술했듯 예술의 역할은 존재를 옮기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시짓기다. 즉 시짓기란 대지와 세계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도록 옮기는 과정이다.
이렇게 예술의 본재가 밝혀진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시짓기라고 규정한다.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다. 하이데거는 마지막으로 시짓기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선물함으로써의 시짓기가 있다. 시는 기존에 없던 진실을 선물한다. 2, 근거를 주는 시짓기가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대지에 숨은 근거를 보여준다. 3. 마지막으로 시짓기는 때론 시작함이다. 시짓기는 진실의 투쟁을 일으킨다. 솔직히 말하면, 하이데거의 이러한 주장에는 논리성이 부재한다. 논리가 부재한 자리에는, 왜 하이데거가 나치를 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대신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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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작인 『예술 작품의 샘』에서 자신 고유의 예술 철학을 전개한다. 이 글은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에 대한 요약이고 정리이다.
하이데거 이전까지 예술 작품의 재료, 가령 그림의 액자나 물감 따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중요한 건 바로 작품의 재료였다. 반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재료를 대지라고 명명했다. 중요한 건 바로 작품의 재료였다. 반면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재료를 대지라고 명명하며 중요성을 부과한다.
그는 예술을 ‘세계’와 ‘대지’ 간의 관계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세계는 대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들어낸다. 반면 대지는 스스로 숨는 것으로 발견된다. 그는 예술이 ‘세계’와 ‘대지’ 모두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며, 이 투쟁을 통해 둘은 한쪽이 사라지거나 패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하이데거적 용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세계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체계에 있어서 체계란 사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의미들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오도적일 수도 있으나- 대중적인 표현으로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다. 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후에 더 설명될 것이다.
대지란 사물성이다. 가령, 라오콘 군상의 대지는 대리석이다. 그림의 사물성은 색깔이고, 음악의 사물성은 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적인 의견과 달리 하이데거는 라오콘 군상에서 대리석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이라고 주장했다. 즉 대리석 안에 수많은 조각상들이 품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예술 작품에서 대지는 드러나면서도 숨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라오콘 군상에서 ‘한 라오콘’을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시의 맥락, 즉 세계를 역으로 인식한다. 예술작품에서 세계는 그렇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대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나면서도 감춰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리석으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라오콘 군상의 추정 제작 시대는 기원전 100년이다. 당시의 대리석은 ‘조각’을 위한 것이었다. 즉 대리석은 당시의 의미체계에서 조각을 위한 재료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의미체계가 바뀌면 대리석의 의미도 바뀐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대리석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즉 고대 그리스인의 맥락 속에서 대리석이란 건축 재료다. 반면 오늘날 대리석을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는 곳은 없다. 오늘날에는 콘크리트와 철근이라는 더 훌륭한 재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함에 따라 의미체계가 바뀐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대리석은 그저 예쁜 돌이나, 과거에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돌 정도의 지위를 가질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예술의 특징을, 어찌 보면 과감하게도 다른 사물들에게 까지 확장한다.
가령 유리로 된 콜라병을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이 물건은 액체를 담는 용도, 특히 음료수를 담는 용도로 쓰인다. 실제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즉 세계, 콜라병을 음료용기로 사용하는 맥락이 이렇게 드러난다. 하지만 모두가 콜라병을 동일한 의도로 사용하진 않는다. 가령 어떤 수렵부족은 콜라병을 악기로 사용한다. 어쩌면 한 예술가가 마치 마르셸 뒤샹이 하였던 것처럼, 콜라병에 서명을 하여 예술작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설령 그것이 무척 진부 한 일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즉 콜라병은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악기가 될 수도 있으며 예술작품으로 쓰일 수도 있다. 이 모두의 가능성이 콜라병이라는 대지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콜라병을 용기라고만 생각하지 다른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맥락 속에서 사물의 의미가 하나로 확정되면 다른 의미들은 은폐된다. 즉 하나의 대지가 드러나면 다른 대지들은 숨겨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랑 막힘없이 존재한다는 것, 즉 진리의 한 양태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고향이다. 고향은 수많은 의미세계를 창출하는 근원이다. 예술은 그 고향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참고문헌: 『예술 작품의 샘』 마르틴 하이데거, 한충수 옮김, 이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