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사람들은 달이 무엇을 선전하는지 물어보지 않더라도, 탄도학이나 항공 거리를 떠올리면서 달을 생각하게 되었다.” - 『도구적 이성 비판』 막스 호르크하이머
0.
그날 밤, 어둠 속에서 느낀 인기척이 착각일 거라 억지로 믿어왔다. 하지만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건 진짜였다.
1.
중간고사와 과제 기간이 겹쳐있었기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리포트를 쓸 수밖에 없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꺼져있었다. 그 대신 스탠드와 모니터가 환한 빛을 쏘고 있었다. 타자를 칠 때마다 하얀 화면 위로 검은 글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은 12시, 배가 고파졌다. 아직 초안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간식이라도 먹으며 이어가기로 했다. 나는 2층에서 내려와 1층의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주전부리 삼을 만한 게 있을 것이다.
지금 집에는 나뿐이다. 가사도우미는 진작 퇴근을 하였고 아빠는 해외 출장을 나갔다. 그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 집이 어두워도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쉽다. 평생을 산 집이니까. 부엌의 냉장고를 찾는데 굳이 불을 켤 필요도 없다. 냉장고를 열자, 냉기와 함께 빛이 쏟아진다. 안에는 아침을 위해 미리 손질해 둔 채소들이 투명한 통에 갇힌 채 줄지어 서 있다. 가사도우미가 해주었던 음식들도 남아있지만 대부분 밥반찬이다. 삶은 호박과 쿠키 중에 잠시 고민했다. 나는 쿠키와 우유를 꺼내 들었다. 그때 뒤편에서 무언가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어떠한 형상이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냉장고는 곧 텅 소리를 내며 스스로 닫혔다. 빛과 함께 소리도 멎었다. 집 안은 다시 컴컴해졌다.
"누구세요? 아빠 돌아왔었어?"
성대의 울림이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대답은 없다. 곧 집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줌마 퇴근 안 하셨어요?"
다시 말을 해보았지만 집은 여전히 침묵했다. 쿠키를 올려둔 접시와 우유를 들고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집에 길고양이라도 들어온 것일지 모른다. 예전에 창문을 깜빡하고 열어둔 적이 있었는데, 거기로 돌아온 고양이를 내쫓는데 고생을 꽤나 했다. 아줌마와 기사 오빠, 나까지 셋이서 베이지색 고양이를 따라온 집을 쏘다녀야 했다. 어쩌면 단지 상상력이 작동한 걸지도 모른다. 감각의 자극이 줄어들면 몸은 그 힘을 뇌에 쓰기 시작한다. 어둠은 상상력의 촉매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았다. 쿠키를 씹자 물렁한 겉면은 이빨로 쉽게 뭉개진다. 아직 안쪽은 촉촉하다. 밀가루와 버터, 견과류의 고소함이 미뢰를 자극한다. 단맛은 적당했고, 이따금 느껴지는 아몬드 슬라이스의 식감도 재밌었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양치를 하고, 리포트를 마무리한 후 침대에 누웠다. 내가 착각한 거야, 라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피곤해서인지 최면은 잘 먹혀들었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다시피 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곧 울리기 시작할 핸드폰의 알람부터 끄고 커튼을 열었다. 아침이 되면 새들은 마당의 나무들 위에 자리를 잡았다. 포근한 햇살과 새소리는 항상 함께 들려오곤 한다. 왠지 오늘은 몸이 개운하다. 기분이 상쾌하고 살짝 들떴다.
등굣길, 봄의 온화함과 대조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일회용 용기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 차가운 감각이 좋다. 따뜻한 날에 차가운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을 역행하는 일이다. 자연을 역행하는 일은 짜릿하다. 점심에는 남자 동기 한 명과 밥을 먹었다. 보세긴 하지만 옷을 꽤 입고 키도 적당히 크다. 학식을 먹으며 내 주위에 있는 다른 남자애들을 떠올려본다.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쿠키를 구웠다. 오븐 팬을 찾기 위해 쭈그려 앉아 부엌의 수납장을 열었다. 주방 기재들과 식칼 거치대가 보였다. 거치대의 꽂이 다섯 개에 칼이 네 개 꽂혀있는 것을 보고, 원래 하나 비어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평상시에 칼을 쓰던 것은 가사도우미다 보니 확신할 수 없었다. 원래 그랬겠거니, 하고 팔을 뻗어 오븐 팬을 꺼냈다. 초콜릿 칩이 섞인 반죽을 굽기 시작하자 밀가루와 버터의 고소한 냄새와 초콜릿의 단내가 함께 풍겨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븐 맞은편에 있는 아일랜드 탁자에 엉덩이를 살짝 기대어 섰다. 반죽은 잘 익어갔다. 오늘은 좋은 일만 있었다. 아마 쿠키도 잘 구워질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어젯밤처럼 쿠키를 들고 방으로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진도를 바탕으로 요약문을 써오라는 과제가 있었다. 책을 펼친 후 독서대 위에 고정한다. 그리고 벽 바로 앞에 있는 연필꽂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샤프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연필꽂이를 들어 육안으로 확인해 본 후, 책상 밑의 서랍장도 열어 살펴본다. 샤프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평소에 잘 쓰지 않던 필기구를 들었다. 내 손가락 크기에 비해 두껍고 익숙하지 않은 샤프로 수기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손목과 손가락 끝에 통증이 생겼다.
"아, 더 못 하겠다."
혼잣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집중을 할 재간이 없었다. 다음에 입을 옷이나 골라두기로 했다. 오늘 함께 점심을 먹었던 동갑내기, 그와 또 수업이 겹치는 날은 이틀 후다. 옷장을 뒤지며 이틀 후에 입을 옷을 골랐다. 검은 천이 오버레이 된 원피스를 꺼내 옷장 맨 끝에 걸어두었다. 어쩌면 먼저 연락하여 내일 함께 밥을 먹자고 말을 꺼내 볼 수도 있다. 아직 따로 연락해 밥을 먹자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그렇게까지 투자할 정도로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 이 옷은 이틀 후에 입자. 결정을 마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봐야 하는 분량이 아직 조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 세 시에 세면과 양치를 한 후 잠에 들었다.
버스가 덜컹거린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반대 손목을 돌려보았다. 아직도 통증이 남아있다.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운전기사가 나를 데리러 오는 일은 없어졌다. 아빠는 나도 이제 성인일뿐더러, 그렇게 남들 사이에서 튀어봤자 좋을 게 없을 거라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가끔 그리워질 때는 있다.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다니는 일은 피곤하다. 승차감이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다리도 아프고 냄새도 난다. 사람들이 일제히 이산화탄소를 내뱉으면 기분 나쁜 더움이 공간을 잠식해 나간다. 그걸 체감하는 일은 진저리난다. 웬일로 버스에 자리가 났다. 냉큼 앉은 후 핸드폰을 꺼냈다. 유튜브 홈에 나온 뉴스 채널의 영상 섬네일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국의 여배우가 해외의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내용이다. 수상자는 바로 나의 친모다. 생물학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그렇다. 그녀는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다. 흥행하거나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에는 출연하진 못했지만 티비 연속극에는 자주 얼굴을 드러냈던, 얼굴만 예쁜 B급 배우였다. 티비쇼에도 몇 번 출연했다고 한다. 엄마가 사업자인 연상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하자 기자 몇 명은 그 소식을 보도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을 끌진 못한 모양이었다. 곧 버스가 멈췄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40분 정도도 걸리지 않는다.
수업이 끝나고 인문대학에서 내려오니 익숙한 차 하나가 주차되어있었다. 차체의 매끄럽고 윤택있는 피부는 광고 속 여배우의 피부 같았다. 그것 자체로 자신이 얼마나 잘 관리 받고 있는지, 남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뽐내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왔다.
“아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차로 달려갔다. 내린 차창 너머로 미소 짓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오늘 온 거야?”
“응, 아침에 도착했어.”
“피곤할 텐데 바로 나 데리러 온 거야? 아빠 최고!”
차 문을 닫자 덜컥하고 소리가 났다. 안전벨트를 하고 보니 발 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검은 매트 위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원통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립스틱이고, 명품이었다. 나는 립스틱을 발 끝으로 톡톡 치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어떤 여자와 굴러먹고 온 걸까? 여비서? 엄마보다 더 젊은 여배우? 아니면 몸파는 년? 내가 앉아 있는 시트가 온갖 체액들을 머금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불쾌해졌다. 발장난을 멈추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아빠는 여전히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앞창을 보며 핸들을 쥐고 있었다.
산후조리 후 엄마는 배우로 복귀했다. 복귀 후 일 년이 되지 않아 그녀는 영화 한 편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 영화는 적당히 흥행했다. 엄마가 스크린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연기력을 각인시켰다는 기사는 꽤 많이 남아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드라마 조연이 아니라 중요 악역이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어느 TV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경험이 더 깊어졌어요. 여러 감정들을 배우기도 하고요. 주위에서 제 연기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게 비결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들 결혼을 해보세요.”
‘그러니까’ 부터 엄마는 웃기 시작했다. 너스레를 떤 것이다. 개뿔, 그건 거짓말이었다. 날 키운 건 엄마가 아니고 가사도우미니까.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 건 외도 때문이었다. 아빠는 목과 손에 주름도 없고, 근육도 더 탱탱한 어린 여배우와 연분이 났다. 둘의 이혼에 대한 뉴스가 몇 차례 나왔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용히 끝났다. 둘의 관계 사이에 어떤 내막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흥밋거리가 되지도 못했고, 흥미가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세무사들의 타자기에는 불이 났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방송에서 뻔뻔히 날 팔아먹었던 엄마보다는 아빠가 낫다. 그녀 역시도 아빠의 외도를 눈치채자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으니 나름 쌤쌤으로 칠만도 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엄마가 이 정도로 성장할 줄 알았다면 아빠는 이혼을 택했을까? 외도를 택했을까? 적어도 아빠는 후회하는 티를 낸 적은 없다. 뭐, 세상에 몸을 섞을 사람을 많다. 하지만 사랑을 쏟을 딸은 나뿐이다. 나는 사람을 믿진 않지만 옥시토신은 믿는다. 고개를 돌리자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이 보였다. 시속 수십 킬로의 속도감 안에 있으면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이 사라진다.
“그런데 딸, 요즘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혹시 시험기간이야?”
“응, 중간고사 기간이야. 아, 맞다. 할 얘기 있어. 아줌마 좀 바꿔줘.”
“응?”
그는 계속 앞창을 내다보며 되물었다. 앞 창을 통해 희미하게 그의 표정이 보인다. 입꼬리와 안면의 근육, 눈동자의 방향 모두 그대로다. 대신 목소리에서 약간의 의아함이 묻어날 뿐이었다.
"아줌마는 쌔고 쌨잖아."
"무슨 일인데?"
그는 진지하게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냥......, 사소하게 안 맞는 게 있어. 크게 잘못한 건 아니고. 중간 업체 있으니까 금방 되잖아?"
“알겠어. 바꿔볼게.”
“고마워. 역시 아빠 최고.”
그의 대답에 나는 웃었다. 마음이 풀리니 밤잠도 편해졌다.
등교 준비를 위해 장롱 안을 살폈다. 따로 빼놓았던 원피스가 보이질 않았다. 걸린 옷을 몇 번씩 넘겨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뉴런 안에는 오버레이 원피스를 챙겨두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생물학과인 나에게 인간의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대강 서랍장에서 꺼내지 않았겠거니 하고 다른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원피스처럼 착 붙는 원단의 옷을 입고 싶었다. 니트로 짠 아이보리색 목폴라를 들어 올렸다. 반팔 목폴라와 함께 입기 위해 기장이 허리까지 오는 겉옷도 하나 꺼냈다.
점심, 동갑내기와 함께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나란히 키오스크 앞에 섰다. 그는 연갈색 코트를 입고 검은 백 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친 채로 키오스크를 조작했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가방도 함께 흔들렸다.
"난 키오스크가 막 퍼지기 시작할 때 좀 무서웠어."
"왜?"
그가 번호표를 뽑으며 말했다.
"종업원 대신 식당에 들어서는 키오스크를 보면, 어른이 되어서 내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아......, 그래? "
나는 평생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걱정이 많은 편이었네, 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기술 발전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해야 할까. 괜한 걱정이었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나도 그랬었노라고 말하는 게 현명했을 수도 있다. 척만 해주어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속으니까. 고민하는 사이 우리는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대답을 할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소금에 절은 감자튀김을 먹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관계는 여기서 끝이라고.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되게 리포트를 쓰고 진도를 한 장, 한 장 치고 나가다 보니 시험 주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처음 보는 아줌마가 날 반겼다. 그녀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다. 피고용인들의 미소에는 항상 과한 친절함이 있고, 그 과함에는 항상 비굴함이 담겨져 있다. 새로운 아줌마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미소 지으며 스스로를 소개한다. 같은 미소라도 피고용인의 것과 고용인의 것은 다르다.
수능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약 2년 전 일이다. 고객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르고, 여러 편의를 봐주는 일, 즉 서빙이었다. 여름방학까지 일을 했으니 약 9개월 정도 한 셈이다. 단기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도 많았기에 꽤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는 특별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젠가 그들의 미소와 나의 미소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미소에는 어쩐지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힘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친절하다라는 서술어 이상의 것이다. 거울 앞에 대고 수 번은 연습해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 미소를 따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미소를 비굴한 미소라도 정의했다. 그렇게 웃던 많은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사라지곤 했다.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납작 숙이는 수밖에 없고, 그런 행위는 비굴할 수밖에 없으니까. 배고픈 사람들이나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이다. 이번에 온 가사도우미 역시 그랬다. 나는 이제 그 미소를 따라 할 생각이 없다.
곧 시험이 끝났다. 나의 생활도 이전처럼 평온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고, 아줌마를 바꾸고 물건들이 사라지는 일도 없어졌다. 아무래도 이전 가사도우미가 범인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외부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들어오려면 경비업체를 돌파해야 한다. 도어락 번호도 바뀌었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입지도 않고 옷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옷이 있었다. 앙증맞은 검은색 리본을 포인트로 한 작은 블라우스였다. 막상 소풍날에 입으려고 하니 방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 옷이 보이지 않았다. 어렸던 나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범임은 당시의 가사도우미였다. 그녀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었다. 그 옷을 훔쳐서 딸에게 준 것이다. 아빠는 옷을 돌려받고 가사도우미를 해고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말했다. 자기가 평생 딸 옷 하나 제대로 된 걸 사주질 못했다고. 나는 안 그래도 옷이 많으니까 한 벌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단다. 난 그 옷이 예뻐서 아꼈던 게 아니다. 엄마가 유일하게 나에게 남겨주었던 물건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당시의 나는, 아니 지금도 그 사람을 고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보복심보다는 배신감에 의한 것이었다. 엄마 대신 날 키워주었던 바로 그 가사도우미였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 됐든 간에 나의 주장은 사리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빠에게 나는 그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11시 즈음이 되어서야 잠에서 일어났다. 이상할 만큼 배가 주렸다. 긴장이 끝난 반작용일지 모른다. 우선 씻을 준비를 하자는 마음에 옷장을 열었다. 속옷을 넣어두는 칸이 평소보다 유난히 비어 보였다. 이번 아줌마는 빨래가 좀 늦네, 속으로 생각하며 갈아입을 옷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1층으로 내려왔다.
"아주머니~"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아주머니?"
나는 거실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 안은 조용하다. 부엌으로 가자 칼과 음식을 손질하고 남은 찌꺼기들이 도마 위에 올라가 있었고, 양념통 몇 개와 요리에 쓰는 숟가락과 젓가락 등이 물에 젖은 채 놓여있었다. 나는 1층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부엌을 정리하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는 가사도우미는 없다. 나무로 된 장판에 발이 붙고 떨어질 때마다 쩌억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기에 아주머니, 하고 더 자주 불렀다.
“네~ 무슨 일이세요.”
가사도우미는 긴 복도 끝에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뜀박질에 따라 분홍색 레이스가 흔들거렸다. 그 복도에는 응접실, 손님용 방,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창고 등 사용하지 않은 공간들이 몇 개 붙어있다. 가사도우미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할 뿐이다.
"아, 어디 들어가 계셔서 못 들으셨나 보네요.”
나는 떠본다. 부엌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응접실이나 창고에 들어갈 일이 얼마나 있을까?
“네, 응접실 잠깐 살펴봤어요. 정리도 좀 하고.”
“지금 점심 차려주실 수 있어요?”
“네, 네. 금방 해드릴게요. 김치찌개도 괜찮죠?”
“좋아해요. 김치찌개.”
가사도우미는 부엌으로 허둥지둥 들어와 요리를 재개하기 시작했다. 김치찌개는 다시 끓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가스레인지를 작동시키자 김치의 맵고 신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봄과 여름 사이의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만큼 음식 냄새가 빠져나갔다. 식탁 앞에 앉았다. 옆으로 몸을 돌려 그녀가 튀어나온 복도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상이 다 차려졌다는 말에 다시 똑바로 앉았다. 그냥저냥 한 맛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솜씨면 자주 먹어줄 순 있을 것 같다. 밥을 먹은 후에는 씻고 외출을 나섰다. 알루미늄으로 된 야구방망이를 샀다. 나는 손잡이가 위로 가도록 야구방망이를 책상과 옷장 사이에 기대어 세워두었다.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에는 가사도우미가 퇴근을 한다. 나는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한다. 현관문이 닫혔지만 방심할 순 없다. 가사도우미가 다시 되돌아와 내 물건을 훔치고, 식칼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주말에도 출근을 한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요즘 주식시장이 불안정한 징후를 보인다고 말했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장하고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된 회사지만 미래는 항상 불안하다. 몇 분간 가만히 서 있다가 내 방으로 돌아가 합금 질의 흉기를 집어 든다. 아빠가 내게 자주 해주었던 말이 있다.
“후발주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해. 싹을 밟든, 우위를 계속 유지하든. 도희야, 너도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말 거다.”
그는 싹을 밝는 것을 선호하는 부류였다. 사무실에 앉아 기술박람회에서 발표된 중소기업의 제품과 기술을 베껴오고, 편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세금을 줄였다. 스타트업 회사를 분열시켜 주요 기술자들을 빼 왔고, 갓 상장한 회사를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직원들을 정리해고하기 위해 주말, 밤낮없이 일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응접실이 있는 복도는 항상 어둡다. 거실과 부엌의 남쪽 벽은 통유리로 되어있다. 하지만 햇볕은 항상 복도의 벽에 가로막힌다. 복도의 불을 켠 후 응접실로 향한다. 방 안에는 잘 정돈된 가구들만 보일 뿐이었다. 몽둥이를 바닥에 끌며 응접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무로 된 바닥에 알루미늄이 긁힐 때마다 끌리는 소리가 난다. 수상한 건 없었다. 이번에는 손님방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정말 정리만 한 건가.”
홀로 있는 응접실 안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나의 방으로 돌아가서는 노트 한 페이지를 주욱 찢었다. 그리고 찢은 종이를 몇 번 접었다. 이제 밖을 나갈 때면 이 종이를 방문 아래쪽에 끼워둘 생각이다. 또 누군가 내 방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전처럼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쳐갈 지도 모른다. 서랍 안에 든 옷들도 개수를 세고 외워두었다. 이렇게 하면 도둑이 든 것일지, 그저 기분 탓인지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은 오후 네 시. 아직 창밖으로는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니 갑자기 지쳤다. 긴장이 끊기면 근육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침대에 누운 채 생각한다. 어쩌면 난 신경증일지도 몰라. 시험 때문에 미쳐버린 거지….., 크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아빠처럼 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 나약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는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좀 먹었다. 와인을 먹고 신난 기분으로 근처의 인생네컷에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으로는 노래방을 갔다. 택시에서 내려 집 앞에 설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목도 조금 쉬어있었다.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내 방문 틈에 끼워둔 종이 표지였다. 표지는 바닥에 문 하단부에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휴, 가벼운 한숨. 역시 나는 신경과민이 맞았던 듯하다. 가로로 뻗은 문고리를 잡은 후 아래로 기울인다. 약간의 무게감과 함께 종이 표지가 떨어졌다. 옷장과 서랍장 등이 모두 열려있었다. 외투, 필기구, 노트, 소품, 속옷 따위가 온 바닥 위에 어질러져 있었다. 상의 하나는 책상 위에 있었다. 그 옷을 관통한 칼자국은 책상에도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늘어질수록 나의 초조함도 비례했다. 세 번쯤 시도하고 나서야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CCTV를 설치하는 게 좋겠다는 문자를 짧게 보내고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휘둘러본다. 속이 빈 800g짜리 흉기는 바람을 가르며 뭉툭한 소리를 냈다. 많은 제품을 직접 비교해 보면서 고른 배트는 손에 꽤 감겼다. 누가 범인일까? 아빠는 아닐 테다. 새로 온 아줌마인가? 나는 다시 한번 배트를 휘두른다. 배트를 휘두를 때 허리를 돌려 무게를 싣는다. 팔과 어깨의 근육은 힘에 따라 수축되었다가 다시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머릿속에서 텅하는 소리가 울린다. 새로 온 아줌마는 그 합금모양 흉기에 쓰러진다. 문득 궁금해졌다. 두개골과 알루미늄 배트 중 부딪혀서 찌그러지는 쪽은 어디일까? 알루미늄은 단단한 금속이다. 1kg도 되지 않고 속도 비어 있다. 하지만 두개골 정도는 조각낼 수 있다. 머리에 상처가 난 그녀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머리모양으로 함몰된 배트에는 피가 튄다. 상처에서 나오는 피는 중력에 따라 머리카락과 두피를 타고 흘러 바닥에 퍼져나간다. 나는 피비린내 때문에 창문을 열 것이다. 새벽 시간, 부엌에서 본 형체와 사라진 물건들은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사도우미가 범인을 가능성은 낮다. 두 가사도우미가 공범일 가능성은 있을까? 확률은 낮다. 같은 업체와 계약을 하지만 서로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아니다. 둘은 일면식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번 배트를 휘두른다. 머리를 맞은 가사도우미의 모습은 산산조각 난 후 흐물거리며 사라졌다. 몸을 좀 움직였더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명징해졌다. 이건 경고일까? 아니 도발이다. 그렇다면 직접 족쳐주는 수밖에.
옆에 배트를 내려두고 방을 정리했다. 옷을 세어보니 분류를 가리지 않고 상의, 하의, 속옷 등이 몇 벌 사라져있었다. 특별히 남긴 흔적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방 정리를 마치고 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갔다. 1층으로 내려오자, 음식 냄새가 몰려왔다. 나는 미리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아주 빠르게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놓기 시작했는데, 손이 빨랐다. 한 번 내려둔 그릇을 다시 손대는 일도 없었다. 상차림 조차도 아주 계산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혹시 집에 누가 왔어요?”
“아니요?”
그녀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초대한 사람이라도 있어요?”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나는 젓가락을 들어 애호박전을 집었다. 가사도우미는 자기도 가끔 그런다며 웃었다. 어쩐지 목이 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는 시간은 짧지만 짜릿하다.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나는 마음속 리스트에서 그녀의 이름 옆에 사선을 하나 그었다. 완전히 용의자에서 제외될 때는 하나가 더 그어져 X표가 될 것이다.
밤에는 방문에 휴대용 도어락을 채우고 가벼운 가구 몇 개를 옮겨 문 앞을 막았다. 몸이 뻐근해졌지만 금방 잠들진 못했다. 칼꽂이 하나가 비어 있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심장박동을 빠르게 했고 혈관 속의 멜라토닌을 파괴했다. 나는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새벽부터 서서히 분비량이 증가하기 시작하는 코르티솔과 창 너머의 햇살이 나를 깨웠다. 얇은 커튼 위로는 은은하게 빛이 들었다. 두 손으로 커튼을 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잔디 위로 새 한 마리가 쌩하고 선을 그리듯 날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7시, 어제 가정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식사 준비를 마치기 직전에 복도에서 뛰어왔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랐다. 마침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방에서 나와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복도에는 이미 조명이 켜져 있었다. 인기척을 줄이기 위해 조심히 움직이며 문고리를 하나씩 당겨보았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고에도 아무도 없다. 대신 내부가 평소와 달리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본래 잡동사니에 가려져 있던 벽에는 처음 보는 문이 하나 있었다.
“뭐야 이거……,”
홀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게 평생 살면서 이런 문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물건마다 쌓인 먼지층의 높이가 달랐다. 누군가가 일부로 정리를 해둔 것이다. 문을 열자 낡은 경첩이 찌뿌둥한 소리를 내었다. 당기어 연 문 바로 앞에는 가정부가, 그 뒤에는 지하로 뻗은 계단실이 보였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디 갔다 오세요?"
"아......, 그, 그게.......,"
가정부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대신 나의 얼굴과 배트를 번갈아 보았을 뿐이다.
"어디 갔다 오시냐고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여튼 눈치는 좋은 편인 듯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함께 내려갔다. 계단실은 좁고 낮았다. 천장에는 백열전구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그와 연결된 전선들이 밖에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계단이 끝나자 가정부가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풍성한 방은 아니었지만 침대, 옷장, 책상과 서랍 등 필요한 가구들은 다 배치되어 있었다. 책상 위로는 책 몇 권이 비스듬히 서 있었고, 아이패드에 연결된 충전기가 놓여있었다. 계단실과 달리 방 내부는 제법 사람이 사는 듯 꾸며져 있었다.
침대와 옷장, 책상과 서랍 등의 가구가 놓여져 있었다. 책상 위로 도서 몇 권이 비스듬히 서 있었고, 멀티탭에는 휴대용 단말기에 사용하기 위한 듯한 충전기가 몇 개 꽂혀있었다. 충전기에는 아이패드가 연결되어 있었다. 계단실과 달리 방 내부는 제법 사람 사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저......, 안 계신 사이에 청소를 좀 했, 했어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가사도우미의 떠는 목소리는 이제 더 듣기 힘들 정도로 답답했다. 방 안에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사라진 옷들이 그곳에 개어져 있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펜과 샤프 같은 소품들도 방 안에 있었다. 나는 야구배트를 휘둘렀다. 자기로 된 컵 몇 개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여기저기 파편이 튀었다. 책상 위의 선반은 우지끈 소리를 내었다. 남은 가구 몇 개도 배트로 내리쳤다. 방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근육은 혈관에서 급하게 에너지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심장은 몸의 출력을 늘리기 위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근섬유들이 찢어져 통증이 생겼다. 곧 엔도르핀이 분출되어 통증을 덮었고 기분이 산뜻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패드를 내리쳤다. 나는 숨을 고르다가 물었다.
"여기 사는 거 누구에요?"
가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만히 서서 손을 떠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배트 끝으로 바닥을 몇 번 툭툭 두들겼다. 그제가 되어서야 가정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따님이 한 명 더 사세요. 여기에."
"무슨 소리에요. 그게?"
"혜선이라고, 사장님이 자기 딸이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청소나 밥 같은 것 좀 챙겨달라고."
"근데 왜 아무도 없어요?"
“잠깐 나가셨어요. 사장님이랑 같이. 자기가 있을 때 청소하시는 게 불편하다고 하셔서. 되도록이면 안 계실 때 하고 있어요.”
나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배트를 휘둘렀다. 의자의 앞쪽 다리 두 개가 으깨졌다. 두 발을 잃은 의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다시 몸을 휙 돌리고 계단을 올랐다. 불 켜진 복도로 나와보니 거실이 어두웠다. 그 잠깐 사이에 먹구름이 져 있던 것이다. 나는 차리리 비가 내려주길 바랐다. 비가 와도 여전히 명랑한 기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앙갚음이란 따뜻한 날씨에 찬 물을 들이키는 것보다 몇 배는 짜릿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2.
강의를 들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닫아놓았던 방문이 훤히 열려있었다. 아줌마가 청소 중인가? 생각하며 문전에 섰다. 온화한 바람이 훅하고 불어왔다. 활짝 열린 창문 앞에는 많이 쳐줘 봐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한 명이 방문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커튼과 함께 바람 따라 휘날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셔츠는 넓적다리까지 기장이 내려와 있었다. 셔츠의 로고와 봉제선을 보니 내 옷장 안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이게 내가 갖게 될 방이구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창틀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누구야 너?"
내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옆에 있던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몸을 90도 정도 돌렸다. 옆으로 보이는 코의 윤곽은 매끄럽고 오똑했다. 화장기 없는 볼은 파리했지만 투명할 정도로 하얬다.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배트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는 빛을 받아 반질거렸다.
"이거 나 때매 사둔 거야? 휴대할 수 있는 걸 구하는 게 낫지 않았어?"
그녀는 배트를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눈매는 매끄러운 곡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작은 얼굴 안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얇은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동시에 힘이 들어가 있기도 해서 무척 미묘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창문에서 바람이 훅 끼쳤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검게 불타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를 가리었다. 바람의 결을 따라 유려하게 휘날리던 머리카락은 어쩐지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듯 보였다.
"너가 혜선이야? 내 방 들어왔던 게 너지?"
"맞아, 그리고 옷에 구멍 뚫어놓았던 것도 나야. 그날 너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운은 좋더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저 뻔뻔한 년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기겠네?"
"무슨 뜻이야?"
혜선은 배트를 들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배트는 잔디, 흙 위로 떨어졌는지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빠의 첫 번째 딸이 나야. 심지어 첫사랑이 낳은 딸. 너네 엄마랑은 정략결혼 한 거였잖아? 심지어 이혼도 했다며?"
그녀는 날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정확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는 나를 막 가로질러 가는 혜선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쥐기 쉬웠다. 아직 성장도 끝나지 않은 몸을 내팽개치는 일도 쉬웠다. 그녀는 바닥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깡마른 몸은 반격할 힘도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혜선에게 다가가 다시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얼굴 앞에 대고 말했다.
"아빠 딸은 나야. 빌어먹을 년아."
혜선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심지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래 한 번 해볼까? 우리 중에 누가 죽나?"
"해봐, 자신 있어?"
나는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질질 끌었다. 삼각근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과 연결된 힘줄은 계속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혜선은 내 팔을 붙잡고 발버둥 쳤다. 그래 봤자 손톱 때문에 피부가 약간 벗겨질 뿐이었다. 나는 잡고 있는 머리카락을 질질 끌고 가 방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또 깝죽거리기만 해봐."
방문을 닫자 쾅, 소리가 났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1층에서 아빠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는 피 묻은 휴지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손톱을 뜯다가 피가 많이 나서 한참을 휴지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나 할 얘기 있어."
"잘됐네. 아빠도 너한테 할 얘기가 있었단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아빠는 어딘가로 가더니 혜선을 데리고 왔다. 세 명이 앉아 있는 식탁은 어색하다. 초가 흐를 때마다 어디선가 뚝, 뚝 물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목이 타는 듯 연신 물을 들이켜기나 했다.
“아빠, 이제 시작해 줘.”
아빠가 마시던 유리컵에 혜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춰 보였다. 그녀의 앙상함과 상반되는 짙은 분위기는 유리컵 위에서도 여전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숨을 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가라앉는 속도조차도 일정했다. 진짜 돌아버린 년 같으니. 아빠는 마지막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소개가 늦었구나.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빠는 그즈음에서 쩝-하고 입소리를 한 번 내었다.
"우선 이 아이의 이름은 혜선이란다. 도희야, 너의 언니니까 잘 지내렴."
"다른 걸 먼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 얘가 왜 내 언니인 건데?"
아빠는 수긍했다는 듯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며 운을 뗐다.
"아빠가 너 엄마랑은 재혼이었던 건 알고 있지? 첫 번째 결혼은 22살 때였단다."
"그 딸이 얘인 거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선은 옆자리에 있는 아빠한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갑자기 언니가 생겨서 혼란스럽겠지만, 그래도 얘라니 도희야. 난 너랑 정말 잘 지내보고 싶은데."
혜선을 보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표정을 아빠가 보아야만 하는데, 라고. 나는 왜 그녀가 이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 말대로면 무엇보다 20대 중반은 된 거잖아? 그리고 얘 엄마는?"
"죽었다. 혜선을 낳다가 출산 쇼크로."
그 대답에 나는 말을 잃었다. 아빠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는 냉동되어 있었단다. 아마 적응하기 어려울 거야. 너가 잘 도와주렴. 그래도 가족이니까."
"냉동이라니?"
"혜선이 10살 무렵 때 희귀병이 발견되었단다. 수술도 약도 통하지 않는 병이었지. 그런데 의사가 몰래 귀띔해 주더구나. 돈만 충분히 주면 딸을 냉동시켜 줄 수 있다고, 부작용은 생길 수 있지만 미래에 치료 방법이 개발될 때까지 딸의 상태를 유지해줄 수 있다고. 그래서 몇 달 전에 해동을 하고, 병원에서 치료와 재활을 하다가 나온 거란다. 20년 넘게 얼어있었지만 사실상 15살, 16살 정도인 셈이지. 냉동되었을 때가 15살 때였으니."
아빠는 내내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혜선은 얕은 미소를 유지한 채 앉아 있었다. 둘의 어조와 표정이 날 미치게 했다. 나는 슬슬 따지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해동해도 괜찮은 거야? 부작용 같은 건 없어?"
“생명에 위험은 없겠지만 해동 과정에서 뇌세포라던가 일부 장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의사가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장담했다. 재활도 잘 끝나서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그럼 더 나중에 꺼내는 게 낫잖아”
“도희야,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식을 갖게 되면 알게 될 거다. 지금 이 아빠가 어떤 심정인지. 혜선이 얼어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지.
그 말을 하는 아빠의 목이 점점 메어졌다. 심장이 경화된 듯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도 일 순 쉴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물어봐야 할 건 하나뿐이다.
"첫 번째 부인이 아빠 첫사랑이었어?"
아빠는 침묵했다. 침묵의 의미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혜선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러다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것은 아니다.
"잠깐만 중요한 전화라서."
아빠는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그는 사무적이고 정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언제 목이 메었냐는 듯. 나는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아빠 등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혜선이 있다.
"네가 가진 건 원래 다 내 거야. 아빠의 사랑도, 돈도 전부."
"뭐?"
윤혜선의 눈빛이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 말을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자리로 되돌아갔다. 눈송이처럼 작은 목소리에 나는 신경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그 사이 아빠는 전화를 마치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이제 혜선이도 이층에서 지낼 거야. 빈 방이 많은데, 도희방의 맞은편이 젤 낫겠지?"
"뭐? 왜 하필 그 방이야?"
"가구가 가장 완벽하게 구비된 곳이 거기잖니? 손님방을 줄 수도 없고."
"하지만......, 하지만 거긴 엄마 방이잖아!"
내가 소리를 치자 아빠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만해. 거긴 몇 년 전부터 빈방이었어.”
"아빠 고마워요. 아, 근데 도희야. 혹시 하루만 방 바꿔주거나 할 수 있을까? 나는 동향이 좋던데, 아 미안. 언니가 너무 앞서갔니?"
혜선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는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냈다.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듯한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주먹을 쥔 손이 덜덜 떨려왔다. 단순히 분노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이미지가 떠올랐다. 거기서 나는 알루미늄 배트를, 아니면 식칼을 들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윤혜선을 밀어버리기도 했다. 나의 손에 혜선은 날아가듯 부상했고, 바닥에 떨어져서는 산산조각났다. 자동차에 치인 인간 모양 마네킹처럼. 짓밟아야 한다. 아니라면 모든 것을 빼앗길 테다.
그날은 집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나는 대화가 끝난 후 방에서 지갑과 옷가지 몇 개를 챙긴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모텔촌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복사열이 꽤 식어있었기 때문에 걸을 만한 날씨였지만 종아리가 좀 아팠다. 그렇게 찾은 모텔의 내부는 깔끔했지만 방음이 잘 되진 않았다. 오른쪽 방에서는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에서 나오는 소리는 새되었고 내용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왼쪽 방에서는 남녀의 신음소리가 들렸는데, 여자 쪽이 음량이 컸다. 이런 환경은 처음이었을뿐더러, 혜선에 대한 열패감이 내 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탓에 잠에 들지를 못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술을 마시는 쪽이든, 섹스를 하는 쪽이든 여자가 이렇게 증오스럽긴 처음이었다. 아침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시간에 가정부는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빠와 혜선은 식탁 위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어디 갔다 지금 온 거니? 너도 이제 성인이니 왈가왈부하진 않겠지만.”
나는 아빠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니 손에 힘이 풀렸다. 가방이 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제 쟤도 식탁에서 밥 먹는 거야?"
"그럼 도희야, 우리 가족이잖아."
"우리가 왜 가족이야?"
"같은 피가 흐르는데 당연하지."
혜선은 생글거리는 표정을 한 채, 목소리에는 약간의 콧소리를 넣어 말했다. 아까 했던 생각은 취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년은 이년이다.
“내숭 작작 부려.”
그렇게 말하자 이 집에 있는 유일한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윤도희 그만! 너도 앉아. 밥 먹자.”
“됐어. 먹고 왔어.”
나는 계단을 올랐다.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간 탓에 턱을 디딜 때마다 큰 소리가 났다. 짐을 챙기고 나는 곧장 학교로 향했다. 아침 8시의 교정은 아직 사람 소리보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를 더 자주 들려왔다.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화장을 한 후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거기서 샌드위치를 씹으면서도, 커피를 마실 때도, 피로한 눈이 초점을 잃을 때조차도 뇌는 윤혜선에 대해 생각했다. 며칠 째 노르에피네프린이 뿜어져 나왔다. 각성상태에 빠져있는 탓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주의력과 반사신경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뇌의 노폐물이 쌓여감에 따라 피부도 푸석푸석해졌다.
어떤 호신용품을 사야 할까? 내가 가장 고민한 것 중 하나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가서 가스분사기 소지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골목에 들어가 가스 분사기를 쥐어보았다. 한 손에 들어가는 원통형 장치 위에는 버튼이 하나 달려있다.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자 진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가스가 나왔다. 치익- 치익- 이것으론 부족하다. 집으로 돌아가 공구함을 찾았다. 여러 크기의 망치들을 차례차례 잡고 휘둘러본다. 부웅- 하는 바람 소리 조차 둔탁하다. 팔뚝만 한 망치는 사용하기가 어렵다. 무겁기도 무겁거니와 손목이 아프다. 그렇다고 너무 짧으면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건 먼저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기의 길이가 중요하다. 내가 고른 망치는 20cm다. 길이도 어느 정도 있거니와 가장 휘두르기 편했다.
아빠를 통해 혜선을 공식적으로 받은 후 여러 변화가 있었다. 혜선은 이제 대놓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씻기 위해 욕실의 문을 두드려보면 혜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 있어요, 하고. 방도 옮겼다. 가구 위에 덮어놓았던 흰 보를 걷어내자 먼지가 일었다. 뽀얗게 쌓여있던 먼지들은 살랑살랑 부유하며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일단 가구들은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옷과 책들이 옮겨졌다. 아빠는 혜선에게 가정교사를 붙어줄 것이라 말했다. 검정고시를 딸 것이라며 둘은 히히덕거렸다. 문득 내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화장실로 가 꿀렁꿀렁 솟아 나오는 피를 세면대로 흘려보냈다.
어느 날은 둘이 손마다 쇼핑백을 두어 개씩 들고 집 안에 들어왔다. 안에는 개진 옷들이 삐죽삐죽 보였다. 회사 일로 바쁜 아빠가 혜선을 위해 몇 시간을 쇼핑에 투자한 것이다.
'나랑은 같이 백화점 간 적도 없는데.'
둘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모습을 거실에서 지켜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컵에서는 물이 찰랑거렸다. 나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짜릿한 감각 대신 두통이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청소를 하고 있던 황급히 현관으로 다가가 짐을 나눠 들었다. 부엌으로 가서 컵을 싱크대 안으로 던지듯 넣자 텅, 하는 소리가 났다.
혜선은 언젠가부터 열린 문 사이로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때로는 문틈 사이로 칼을 들고 있기도 했다. 칼보다 날 섬뜩하게 만든 건 그녀의 눈빛이었다. 혜선의 안광은 칼날에 반사되는 형광등의 빛보다 더 반짝이고 날카로웠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 잡고 있던 펜을 떨어트리기도 했다. 위치에너지가 실린 펜은 잠시 바닥 위에서 도르르 굴렀다. 이후로는 그렇게 손에 힘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적응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식탁에서 밥을 먹기 시작한 윤혜선은 점점 주제도 모르고 나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식사 자리에 내 옷을 입고 나타났다. 소매가 길어서 손까지 가리고도 천이 6cm는 넘게 남았다. 윤혜선은 아빠한테 잘 어울리냐고 묻고는 자리에 앉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옷 뭐냐?"
"어때, 언니한테 잘 어울려?"
욕지거리가 턱 밑까지 올라왔을 때 아빠도 함께 있음을 상기했다.
"그거 내 옷 아니야? 내 방에서 가져온 거지?"
혜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소매도 접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흰 소매 뒤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뻔뻔한 모습에 나는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나는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일어나 부엌 개수대에 쏟아내듯 버렸다. 그릇들과 수저들은 서로 부딪히며 쨍한 소리를 냈다.
"더 안 먹니?"
아빠는 돼지갈비의 살코기를 혜선에게 발라주며 내게 말했다. 내게 말하는 동안에도 아빠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식탁에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 가방을 챙기다가 창가에 섰다. 거기 한참을 서서 손가락을 물어뜯다가 생긴 상처를 밴드로 대충 틀어막았다. 교재를 가방에 마저 쑤셔 넣던 중 짜증이 치솟았다. 양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씩씩거리고, 주먹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얼굴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턱이 아팠다. 어느 새부터 피는 밴드를 넘어 손톱과 피부 사이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등교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와보니 아빠도, 혜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설거지를 하는 가사도우미뿐이었다. 집으로 나가기 위해 포장된 길을 따라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다가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파편 몇 개가 나에게도 튀었다. 뒤를 돌아보자 도자기가 조작 나 있었고, 혜선은 2층 테라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햇빛이 강해 그녀의 얼굴이 보이진 없었다. 하지만 무슨 표정일지는 뻔했다. 아마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이겠지.
"미친년."
근육은 더 이상 여유가 없어질 정도로 팽팽해졌다. 손가락을 대면 휘지 않고 부러질 것처럼. 심지어 입술 주위의 근육조차도 움직이지 않아 뭐라고 따지지도 못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따지지도 못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 아늑하고 편안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선잠조차도 간절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안심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그런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후발주자들을 항상 경계 해야 해. 싹을 밟든, 우위를 계속 유지하든. 도희야, 너도 항상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안 그러면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말 거야.’
학교에서 수업을 모두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콧노래가 들렸다. 콧노래를 얇은 실처럼 붙잡고 따라가자 부엌이다. 윤혜선은 몸을 숙인 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콧노래를 불르고 있었다. 가사도우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란 식탁 위에서 양파와 파가 올라간 도마와 칼이 모로 누워있었다. 윤혜선은 몸을 숙이고 서랍장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지 보이진 않지만, 기재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났네?"
내 목소리를 들은 혜선은 콧노래를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부트러블 좀 봐. 어떻게~. 너무 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 아니야? 팩이라도 몇 개 사. 내 꺼 냉장고 안에 있는데 빌려줄까?
"......,"
혜선은 내 앞에 다가와 킥킥거렸다.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그녀의 목과 눈빛은 뻣뻣했다.
"오늘 좀 예민하다? 막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없고 그래? 뭐 그럴 만도 하지. 아빠는 날 더 사랑하니까. 아빠의 돈도, 애정도 딸이라는 자리도 다 내 꺼야. 구경이나 하고 있어. 미리 짐이라도 싸두는 게 어때?"
나는 옆으로 팔을 뻗어 칼을 집었다. 손잡이의 견고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전에 상상 속에서 해봤던 대로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생물을 죽이기 위해선 베는 것이 아니라 찔러야 한다. 칼날이 근육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근육은 수축을 시작한다. 수축한 근육은 외부 물질을 꽉 붙잡는다. 칼을 쥔 손끝으로도 근섬유의 쫀쫀함과 탄력감이 느껴졌다. 팔에 억지로 힘을 주자 칼날은 근섬유 하나하나를 뚫고 들어갔다. 상처가 깊어질수록 흐르는 피도 많아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비명을 질러야 하는 만큼 더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몸이 굳었다. 순간 현관이 열렸다. 집에 들어온 건 아빠였다. 아, 당했다.
3.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곧 문을 열고 혜선이 들어왔다. 헤선과 함께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붙어있었다. 정장까지 차려입은 걸 보니 운전기사인 모양이다.
"지내기엔 어때? 언니는 마음이 찢어져.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
혜선은 건너편에 앉아 씨익 웃었다. 날 안내해 주었던 간호사는 면회실 밖으로 나갔다. 혜선은 면회실 내부를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정신병원은 어때? 그래도 아빠가 비싼 곳으로 해줬대. 입원해 본 적 처음이지. 어때? 언니는 틈 만나면 입원했는데."
"왜 왔어, 나 약 올리려고?"
혜선의 눈이 웃음에 감겼다.
"나 행정 처리가 완료됐어. 대충 어딘가 고아원에서 입양된 걸로. 아! 방도 바꿨다. 너 방으로. 쓰던 가구 다 버렸는데, 괜찮지? 퇴원하게 되면 이참에 새 가구로 맞추자. 뭐, 어차피 이제 되돌아오지도 못하겠지만."
"......,"
"이제 너가 올 곳은 없어. 그냥 콱 죽어버리는 게 어때? 자살을 한다거나. 평생 여기서 썩을 생각 하니까 힘들지 않아? 나도 냉동고에 들어간다고 누워있을 때까지 그런 기분이었는데. 아, 드라마 같은데 보면 몰래 약 같은 거 모아두던데. 너는 그럴 재주 없나?"
나는 잠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혜선에게 한 방 먹여주지도 못했고, 책상을 내리치지도 못했다. 나의 주먹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가 곧 책상 위로 안착했다.
"그럼 갈게, 과외 들어야 하거든."
혜선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와 함께 면회실을 나갔다. 그녀의 언행은 의기양양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소리 없이 울었고, 눈물 없이 울었다.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날 데리고 나갈 때까지. 그러고는 내 손가락에 억지로 붕대도 말았다.
정신병원의 생활은 규칙적이다. 혜선의 면회 날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곳에 들어오고 첫 면 달은 수면제를 먹고도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병원으로 와 약을 올리고 가는 날이면 새벽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매일 침대에 누워서 상기한다. 전공수업 때 인간의 심장과 급소가 어디 있다고 배웠었는가? 어디를 찔러야 사람을 한 번에 죽일 수 있을까?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