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압류
신용정보사에 몸담고, 채권사의 위임을 받아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복잡한 법적 조치도 신용정보사 담당자가 채권사에 의뢰하면, 법원을 통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은 늘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전 11시쯤, 사무실에 긴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남지만 관리사님 좀 부탁합니다."
"아~ 네, 제가 남지만 관리사인데요.
어떤 일 때문에 전화하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통장이 압류되었는데요, 어떡해야 되죠?"
늘 듣는 이야기지만, 그 다급함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성함을 물으니 '김미정'이라고 했다.
"아, 한 달 전에 통화했던 김미정 님 맞나요?"
"네, 맞아요."
기억이 났다.
한 달 전, 채무 조정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였다.
"아니, 그때는 너무 어려워서 절대 못 갚는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살라고 통장 압류를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나는 침착하게 그때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제가 선생님이 정말 어려웠을 때 사용하신 돈이니, 지금 어렵다고 변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최소한의 금액으로 장기 분납이라도 성의를 보여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몇 번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대뜸 '나 너무 어려우니까 맘대로 하라'라고 하셨잖아요."
잠시 숨을 고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통장 압류했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건 없고요, 갚으면 됩니다."
그녀는 감면 가능성을 물었다.
"저, 그러면 얼마까지 되나요?"
"선생님 재산이 없으시면 이자 전액 탕감하고 원금에서도 감면이 됩니다.
특감 대상자가 되면 원금에서 60%~90%까지도 감면돼요."
이때, 그녀는 망설이며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근데요, 거기 통장에 5,500만 원이 들어 있어요."
"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아니, 맨날 어렵다고 큰소리쳐놓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수가 있나요?"
"아니, 다름이 아니라 옆집 세 들어 사시는 분이 자기 신용이 안 좋다고 보증금을 잠깐 저에게 맡긴 거예요."
그녀는 급히 해명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기 그게 제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감면 많이 해주시면 어떡해서든 갚을 테니 선처 바래요."
채권자가 보는 재산은 명의자를 기준으로 한다.
부동산, 동산, 차량, 예적금...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은 명의자인 그녀의 재산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채무의 이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지만, 채무자가 재산이 없으면 이자는 탕감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선생님 명의로 통장에 돈이 들어 있는 것도 선생님 재산이기 때문에 이자까지 다 받아야 돼요."
채무자는 울먹이며 "제발 살려 달라"라고 연달아 반복했다.
"그 돈은 제 돈이 아니고 보증금을 잠깐 맡긴 거예요.
다 빼가면 저 죽어요.
제발 원금에서 감면 많이 해주세요.
전에 고령자 특감 60%까지 감면된다고 하셨잖아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그때는 재산도 없고 법적 조치 하기 전에 말씀드린 거고, 지금은 그게 안 돼요.
물론 지금도 통장에 돈이 없으면 그렇게 감면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죄송해요."
채무자는 울음 섞인 한숨을 내뱉더니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전보다 조금은 안정되어 있었다.
"저, 그러면 정확하게 제 원금이 얼마고 이자는 얼마 나요?"
총액은 17,970,000원이었다.
원금 470만 원, 이자 1,300만 원, 법 비용 27만 원.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여기서 정말 조금이라도 감면이 안 되나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느껴졌다.
"선생님, 선생님은 그래도 그나마 운이 좋은 거예요.
이자 포함 총액이 통장에 있는 돈보다 작으니, 이 금액만 변제하면 되니까요.
이건 제 마음대로 받는 게 아니라 규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준하지 않으면 채무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수화기 끊는 소리가 냉랭한 바람처럼 귀를 스쳤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통장 압류를 하기 한 달 전, 나는 그녀에게 법 비용 포함 2,150,000원으로 변제가 가능하며, 이것도 힘들면 장기간 분납도 가능하다고 충분히 고지했었다.
그녀는 그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또다시 한 시간 후, 전화가 걸려왔다.
"그거 다 갚을 테니 어떡하면 되죠?"
총액을 채무자 가상 계좌에 입금하면 확인 후 법원을 통해 통장 압류 해제 절차에 들어간다고 자세히 말씀드렸다.
채무를 해결하는 데는 파산, 개인회생, 신용회복위원회 등 여러 길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결하려는 의지와 타이밍이다.
채무는 절대 그냥 놔두면 안 된다.
채무 먼저 해결하고 앞날을 계획하는 것이 순서다.
요즘 경기가 너무 어려워 난리지만, 작은 돈이라도 크게 보고 소비 생활을 줄이며, 특히 신용카드는 자제해야 한다.
뒤늦은 후회는 이처럼 때로는 큰 대가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