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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Aug 21. 2017

돈을 내면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나

세상에 왕은 없다



스튜어디스들이 무릎걸음으로 서빙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지난 토요일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싸움이 났다(참 다이내믹한 주말이다). 손님과 종업원이 붙은 것 같았다. 서비스에 불만을 품은 젊은 남자가 엄마뻘 되는 아주머니에게 막말을 쏟아낸 것 같았다. 목소리가 커지고 식탁 주변은 옥타곤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빙하는 아주머니는 앞치마를 집어던지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젊은 남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말리는 와이프와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을 박차고 나갔다. 유치원에 다닐법한 사내 녀석은 아빠에게 끌려가며 울음을 터트리고 식당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막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라 나도 와이프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나왔다. 마치 오소리 가족이 연기에 쫓겨 굴을 냅다 버리고 도망치듯이. 밥을 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늦게나마 사장이 개입한 것 같은데 그 후로 어떻게 수습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손님이건 종업원이건, 가끔씩 식당에서 진상들을 만나면 과연 돈을 내고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래전 유럽으로 가는 KLM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느낀 건 스튜어디스들이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그들은 세무서의 공무원을 연상시켰다. 사무적이었으며 때론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과잉친절로 느껴질 정도로 과한 우리나라 항공사 스튜어디스의 태도와 비교해봤을 때 선진국의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사실에 의아하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어리숙해 보이는 동양인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전체적인 서비스의 질은 많은 차이가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럽인들에게 ' 손님은 왕'이라는 개념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비스를 받는 자신이 언젠가는 서비스를 하는 위치로 바뀔 수 있으므로 어느 선을 넘는 것은 서로 요구하거나 받지 않는 무언의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진 것이었다.

서비스 산업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무서운 말이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에게 인격을, 나가서는 인권까지도 버리라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돈을 낸 만큼 받겠다는데 무슨 말이 많냐고 할 사람도 있겠으나, 어느 누구도 그에게 타인의 인격을 소비하거나 모독할 권리까지 팔아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모기업 회장의 전용기에 탄 스튜어디스들은 무릎걸음으로 서빙을 한다는 사실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지금이 중세도 아니고, 과연 인간이 개입된 서비스의 한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유럽 항공사를 경험하고 깨달았다. 과잉 서비스를 받게 되면 상당히 어색한 기분이 들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금방이라도 나 자신이 감정노동자의 위치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무의식 중에 나를 옥죄어왔다는 것을. 물론 모 회장님에겐 그런 상상력이 불필요하겠지만 소시오패스가 아닌, 수백억 원을 물려받지 않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자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경기가 좋지 않으니 그 타개책으로 유난히 서비스를 강조하는 곳이 많다. 만족도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이전에 현장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감정을 가진 인격이 있다는 점을 세밀하게 돌아봤으면 좋겠다. 더불어 손님은 손님일 뿐이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중세의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적인 성공과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마다하지 않겠다는 근성은 분명 친절과 배려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며 누구도 강한 자 앞에서 기는 무릎걸음을 친절과 배려의 한 형식이라 말하지는 않을 테니.






heat05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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