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심리학과 다니기 2-ep1
흔히 일본 만화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집안일하는 캐릭터가 나올 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시간 00시25분. 대야에 손빨래를 하며 몰입을 경험했다.
시원하게 엎어버린 밀크티. 그 때문에 젖어버린 흰 탑과 셔츠. 하루 종일 그냥저냥 빨지 뭐, 하고 돌아다니다가 비가 쏟아지는 밤이 되었다. 천둥이 치고 홍콩은 블랙레인 경보가 떴단다.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언덕을 오르며 노래를 지어불렀다.
도무지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2절 후렴구까지 부르다가 기숙사에 도착했다.
식탁에 앉아있다가 인턴 프로젝트 기획서 피드백이 온 걸 발견했다. 룰루랄라 보다가 갑자기 투고 반려 피드백이 온 기분이 몰려왔다. 움찔 바로 뒤로가기를 누른 나.
나보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이 상냥하고 성공적인 기분.
나에게만 흠이 많은 기분.
당연한 것까지 준비하지 못한 듯한 기분.
실망시킨, 나도 실망한. 알고 있었던, 알지 못했던 모든 요소들이 밀려오는데.
괜찮아?
그녀가 부엌으로 와 내게 물어봤다. 피곤해? 이것도 아니고
괜찮아? 기분 안 좋아보여.
아. 아냐. 좀 피곤해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나한테 말해도 돼.
말하면 울 것 같은데요.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늘 놀라고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눈물이 그냥 나올 것 같았다. 나야 워낙 잘 우니까 눈물 정도야 괜찮지만 그 후에 감당하지 못할 상대방의 반응과 그 갈무리를 나혼자 해야 하는 이 밤이 굉장히 피곤했다.
피곤해. 그냥 피곤해. 물어봐주는 건 정말 고맙고 감동인데. 그 후의 내 감정이 피곤해. 흔들지 말아줘.
고맙다는 표현을 하려다가 너무 선을 그은 것 같아 그녀가 좀 꼬치꼬치 캐물다가 굿나잇 인사를 했다. 역시 같은 학과 특성인가. 생각하다가 세제로 옷을 빨았다.
빨다가 대야에 다른 세제로 한 번 더.
문지르고 피부는 아파오는데 기분이 멍하다.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다. 얼룩이 사라져서 기쁘다.
순간 다른 소일거리 할 거 없나 생각했다. 생각하고 마음 쓰는 일은 피곤해. 손 움직이고 단순한 것이 마음 편하다.
아. 이래서 집안일로 스트레스 푸나.
순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