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헤이리 마을에 있는 북스테이 모티프원
안녕하세요. 어릴 적부터 다양한 매체에서 연기해 온 배우이자, 파주 헤이리에 있는 아티스트 레지던스 ‘모티프원’의 호스트, 그리고 공간과 경험을 안내하는 큐레이터 이나리입니다.
저는 항상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 나누면서 성장하고 있어요. 그 경험의 폭이 배우라는 직업의 깊이를 더 깊어지게 하고요. 제 삶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고, 매일 새로운 경험과 감정들을 지나오고 있죠. 그로 인해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계속 변화하고 있어요. 이런 인터뷰는 제가 지금 어디쯤 와있고, 어떤 방향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돼요. 스윔(SWYM)이라는 브랜드만이 해줄 수 있는 질문에 제가 어떤 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누군가를 궁금해하는 인터뷰어를 만나는 건 저의 큰 즐거움이기도 해요. 좋은 질문은 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질문은 문제 해결이나 사색의 출발점이고, 질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저를 탐구하는 공부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1994년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어릴 적 저의 에너지를 알아보신 유치원 선생님께서 연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해 주신 덕분이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몸을 사용하고 움직이는 걸 좋아했어요. 현장을 놀이터라고 여겼을 만큼 그곳이 신나고 즐거웠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의 면들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게 정말 재밌어요. 때로는 그 경험이 즐거움 이상으로 이나리라는 인간을 성장케 하는 방식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공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저는 연기를 택한 거예요. 제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한 연기는 계속하려고 해요.
모티프원은 오랫동안 아버지께서 운영하셨던 공간이에요. 저는 그곳의 철학과 기조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인지, 공간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오히려 부모님께서 모티프원에서 만난 분들을 통해 큰 용기를 얻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이 더욱 컸죠.
가장 두려웠던 건 물리적인 터전을 서울에서 파주로 옮기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파주로 오지 않았을 때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내면이 깊고 단단해진 것 같아요. 스스로도 훨씬 안정되었다고 느끼고요. 이곳의 환경이 표류하고 있던 저를 잡아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표류하는 과정에서 시도했던 다양한 일들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중요한 거름이 되었어요. 요리할 때 재료를 준비해야 조리할 수 있듯, 모티프원에 오기 전 제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거예요. 지금은 그 재료들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하나둘 손님들과 나누고 있는 중이고요.
현관에 들어서면 '내게로 다가가는 느린 시간'이라는 문구를 만나게 되는데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그 문장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정된 목표에만 몰두하다 보니 마치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정작 '자기'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빠진 경우가 많죠. 이곳에서는 외부의 시선이나 기준은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자기 자신'에 집중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놓쳤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삶의 동기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저는 그 과정에 도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티프원을 찾는 모든 분들이 이곳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성찰하고, 좀 더 유연하고 평화롭게 일상을 맞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길 원하셨어요. 그러려면 각자가 가진 창의성을 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셨고요. 그래서 예술가들과 함께 삶의 방식과 생각을 나누고, 책과 작품들을 통해 깊이 사유하며, 결국 우리 모두가 자기 삶에 대해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길 바라셨죠. 그 철학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어요.
부모님께서는 저희 삼남매가 자라면서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지하고 시도해 보는 걸 항상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관습이나 습관에 갇히지 않길 바라셨고, 그 고민들을 글쓰기라는 사유를 통해 스스로 소화하고 정리하길 바라셨죠. 모티프원은 그런 시도와 과정들이 긴 시간 동안 축적된 공간이에요. 그 감각이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되어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게스트분들과 더 깊게 소통하기 위함인데요. 각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언제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서로의 삶을 조금씩 들여다보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받고 응원할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저 역시 이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요. 언제든 손을 뻗어 관심 있는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고, 명상할 때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자연도 펼쳐져 있죠. 그런 환경 덕분에 잠시 멈춰 제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어요. 저에게는 이곳이 최고의 작업 공간인 셈이죠.
어떤 누구도 같은 색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모두가 탐험가이자 철학자죠. 언제나 그들에게 배울 거리가 있고, 이런 경험은 제가 어디 가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모티프원의 방명록을 '마음노트'라고 불러요. 마음을 조금 꺼내어 놓고 떠나는 거죠. 글, 그림, 사진, 하나하나가 전부 특별하고 아름다운 조각 같아요. 그 노트가 어느덧 100권에 다다랐네요. 수많은 페이지들이 제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지금 떠오르는 게스트는 몇 년 전 방문했던 모녀예요. 어머니가 암 말기셨거든요. 따님이 어머니와의 여행을 준비해 오셨고, 그분들이 남기고 간 글은 사무치게 아름다웠어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삶에 대한 다양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죠. 아직도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스럽기도, 슬프기도 해서 마음이 저릿해요.
좋은 동료분들 덕분에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리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셨죠. 제가 하는 일은 단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에 대해 저만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그게 제게는 연기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거고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이 찾아오면 용감하게 맞이하고 싶어요. 저는 언제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러길 원하거든요. 언젠가 부모님처럼 모티프원을 떠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으려고 해요. 계속해서 새로운 재료들을 수집하는 거죠. 그게 어떤 요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저는 특정한 무엇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더 풍성한 사람,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되길 바라요.
포기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가 포기해서가 아니라 아직 부족해서니까요. 저는 분명 부족하고 미흡한 존재라는 걸 알기에,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그 부분의 근육들을 더 단련시키려고 노력해요. 꿈이나 욕망은 특정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연기나 예술도 마찬가지죠. 완전히 만족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다만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이 오면, 그걸 보완하고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생각하고 더 공부하고 도전할 뿐이에요.
모티프원이 아티스트 레지던스로 시작된 공간인 만큼, 예술가들과 소통과 교류를 더 긴밀하게 이어가고 싶어요. 지금도 요가, 음악 감상회, 프랑스 문화 산책, 뜨개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의 경험과 일상을 깊이 나누고 있는데요. 이런 새로운 경험을 매개로 더 긴밀히 교류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동기와 도전이 점화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예술가분들이 모티프원에 방문해 활발히 교류하고 있기도 한데요. 얼마 전 호주에서 작업하는 친구의 팟캐스트에 초대받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해외 예술가들과도 더 자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나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저는 배우로서 언제나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했어요. 영화나 연극에서 배역을 맡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한 사람만 선택되는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고배를 마셨죠. 1994년에 연기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벌써 31년째네요.
실패는 반복된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법이 없어요. 하지만 언제나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죠. 때로는 수업을 듣고, 워크숍에 참여하고, 바리스타로 커피를 내리면서 그 희망이 응답하기를 기다렸어요.
세상은 수많은 문으로 이루어져 있더군요. 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어요. 그런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다고 해서 저절로 열리는 문은 없었어요. 어떻게든 안간힘으로 그 문을 밀어야 열렸죠. 제게 희망은 그 문을 미는 힘이에요. 저는 지금도 매일 최선을 다해 제 앞을 가로막은 문을 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