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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과 직무를 바꾸고 첫 성과평가

오랜만에 일 이야기

by Alicia

일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걸 연습하는 요즘이지만 성과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건 분명 기쁜 일이다. 이 점수가 1년마다 리프레쉬되는 연봉, 주식과 향후 승진까지 영향을 주기에 노력의 보상에 마음이 놓인 건 일차적인 반응이지만, 이번 성과평가는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작년 8월, 회사에서 팀과 직무 이동을 했다.

1월에 매니저에게 요청하고, 3월에 두 팀과 인터뷰를 하던 중 회사의 신규 헤드카운트가 동결되고 (이러면 팀의 기존 멤버가 이동해야만 헤드카운트가 나는 상황), 5월에 피플팀과 연결되어 왜 팀 이동을 원하는지, 어떤 직무를 원하는지, 회사와 개인의 상황을 고려한 방법을 함께 찾아보고, 8월 지금 팀으로 이동했다. 장장 7개월 동안 매니저와 기존 팀에게는 떠나고 싶다는 의사가 전달됐고, 이동할 팀은 확정되지 않은 채, 미래를 고민해야 했다. 기존 팀에 머무는 것도 조건으로 주어졌지만 원하지 않았고, 갑자기 회사와 팀에 문제아가 된 것 같았다.


처음 겪는 이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커리어에서 다운타임이라는 게 뭔지 처음 경험했다. 다운타임이 컨설팅 업계에서 프로젝트 사이 일시적으로 들어갈 프로젝트가 없는 상황으로 종종 쓰이는 용어고 다운타임이 주어졌을 때 시간을 잘 활용하는 법 같은 기사를 읽으며 하루는 속상하고 하루는 이 시간을 잘 쓰려고 노력하며 보냈다. 기존 팀에 머무는 건 옵션으로 아예 고려하지 않았기에, 팀에서는 떠날 사람인만큼 업무 조정이 일어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에 책을 읽으며 배움을 얻고자 했다. 이동할 가능성이 있는 팀의 업무와 관련된 온라인 강의도 들었는데 오히려 새 팀의 팀장님은 이동하고 나면 어차피 다시 많이 일할게 될 테니 조금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해 주셨다.


회사는 거대한 조직이다. 개인의 상황보다 더 중요한 건 회사의 상황, 업계의 상황이고 이 구조적인 환경에 개인은 종종 속수무책이다. 이맘때쯤 연봉이 높고 고용 정책인 유연한 미국과 싱가포르에 불어닥친 테크 업계의 레이오프 소식이 구글, 메타, 넷플릭스 등 여러 회사에서 들려오자 언제든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물론 반대로 회사의 상황, 업계의 상황이 좋으면 개인이 덕을 보는 상황도 많았다. 회사 안팎으로 테크 업계가 요동치는 분위기에서 지금 내 상황뿐만 아니라 앞으로 인생에 몇 번은 겪을 경제 침체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많이 찾아보게 됐다. 경제 위기가 오면 아무리 부자라도 행동을 바꾸고 버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심 있게 버티고 다운타임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인생의 구간구간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기간을 거치며 많이 겸손해졌다. 그간 내가 경험한 기회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운이 계속 좋았음을, 성장도 특권이었음을 깨달았다. 싱가포르에 와서 만난 노력과 성장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환경이 감사하지만 당연한 것이었다가 소중한 것으로 바뀌었다. 최근 책 '스토너'를 읽으며 '인생 전체를 성실하게 살아도 얼마든지 다른 일에 영향을 받아 삶이 표류할 수 있다.'는 말에 강하게 공감한 것도 이 시기 덕분이었다. 여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소속된 팀에서 동기가 떨어진 사람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 수도 있음을. 그들도 어떤 시기를 겪어가고 있음을.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조금 더 관대해졌다. 겪어봐야지만 더 잘 아는 건 왜일까. 아직 해나갈 인생 경험이 참 많다.


이런 시간을 거친 팀 이동 후, 6개월이 지나 첫 성과 평가서를 1월에 제출했다. 내가 직접 나의 성과를 어필하는 셀프 리뷰, 나와 가깝게 일한 동료들의 피드백인 피어 리뷰를 모아 매니저가 나에 대한 성과 평가서를 제출한다. 내가 속한 부서의 전 지사 (미국, 싱가포르, 유럽, 한국, 중국 등), 여러 팀의 동일한 레벨 직원들의 성과 평가서가 각 팀의 매니저들에게 공유되고, 6명의 팀 매니저들이 각자의 팀과 팀원의 성과를 VP에게 어필하고, 리더들의 토론으로 점수가 오르거나 유지되거나 내려지며 최종 점수가 산출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6개월의 시간 동안 만들어낸 팩트와 임팩트를 셀프 리뷰에 담는 일이다. 그리고 어제, 내가 바라던 점수를 결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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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이동에도 큰 도움을 주신 든든한 매니저뿐만 아니라 나를 잘 모르는 본사의 리더들에게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팀을 잘 이동했구나", "우리 팀과 맞는 사람이구나.", "(문제아가 아니라) 다시 성과를 내기 시작했구나." 사실 팀을 이동하고 업무 시간이 더 잘 관리되기 시작했다. 앞서 겪은 7개월의 시간 동안 조바심이 인내심으로 바뀌고, 세상의 이치에 겸손해지고, 이때 많이 읽은 전략 서적들이 업무를 하는데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많이 장착시켜 줬다. 오히려 느리게 가는 법을 처음 배워서 책에서 읽은 것들을 하나씩 적용하며 일을 해봤다. 한 회사 같은 부서에 5년 있으며 내가 레거시가 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팀으로 이동해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찾고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하나하나 배움이어서 재미있었다.


이 과정에서 읽은 책들 중 특히 도움이 된 책은

바바라 민토, 논리의 기술: 이동한 팀에서 본사 보고용 문서 작성이 많아졌다. 프로젝트 기술서나 성과평가서를 쓸 때 피라미드 구조대로 썼는지 검토했다. 내가 작성한 이 모든 문장들로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한 문장이 뭐야? 그 한 문장이 하나의 스토리로 설명됐는지 제출 전에 검토했다. 내 문서를 처음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스토리로 남도록.
턴어라운드: 읽으며 냉전시기 미 핵 잠수함 내에서 리더십의 충돌을 다룬 영화 '크림슨 타이드'가 자꾸 떠올랐다. 장르가 스릴러일 정도로 리더십의 충돌이 죽음(핵 미사일 발사 혹은 피격)과 연결되는 상황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핵 잠수함 밖의 상황이 어떤지 모른 채 제한된 정보를 갖고 리더와 팀원은 합의를 해야 하고 하나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새로운 팀원 혹은 매니저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턴어라운드'를 이끄는 게 아닌가 싶다. 현상 유지, 기존 경로 유지, 기존에서 조금 더 개선 같은 상황이 아니라 극적인 '턴어라운드'를 만들려면 극적인 행동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변화시키는 게 또 그렇게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팀원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책 속 시나리오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더 극단적인 상황 속 사람들의 행동을 보는 게 가끔은 내가 처한 상황에 압도되지 않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 강점 검사에서 나온 내 강점은 '인풋'이다.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고 탐험하고 종종 표류도 하는 인풋의 과정을 즐긴다. 하지만 새 팀에서는 시간과 노력의 양으로 승부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풋에서 '아웃풋'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업무 방식을 바꿨다. 때마침 과거 프로그램의 확장으로 아예 새로운 파트너와 계약을 해 과거 프로그램의 목적은 가져가되 모든 걸 바꿀(개선할)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졌다.

이 책이 이 과정에서 가장 도움이 됐다. '하이 아웃풋'을 내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찾으며 새 프로그램의 구조 단순화에 들어갔다. 프로그램의 단계별 활동당 결과물이 높은 활동을 찾고, 나는 그 활동의 결과물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찾는데 시간을 집중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내 노동력(시간) 비용이 가장 높기에 나는 시간 당 결과물이 높은 활동에 내 시간을 쓰고, 레버리지가 낮은 활동은 최대한 위임하는 게 맞았다. 위임 대상의 시간도 한정되어 있기에, 레거시로 반복되고 있던 활동들의 피드백을 받고 그 누구도 필요하다고 보지 않으면 이번에 없앴다. 모두의 시간을 자원으로 보고 레버리지가 낮은 활동에서 높은 활동으로 이동하는 행동 변화가 일어났고, 새 프로그램의 생산성이 1분기 후 향상됐다. 그리고 이번에 개선한 프로그램 구조는 '하이 아웃풋'을 위해 다른 프로그램으로 확대된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이 책은 내용보다 '제목' 자체가 힘이 됐다. 다운타임을 겪고 있을 때 피플매니저님이 선물로 주신 책이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누구나 있다. 단지 그런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나간다. 내가 생각한 인생으로 바뀌고, 또다시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기도 한다. 그런 순간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제목'만으로도 건네봄 직한 책이다.
이토록 멋진 휴식: 영어 제목이 Time off 인 이 책은 '타임 오프'를 내면을 에너지로 채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떼어놓은 시간으로 본다. 타임 오프란 자신의 시간을 의식하는 것이다. 더 많은 일을 위한 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고귀한 여가는 창의적인 지식 업무의 토대를 형성한다. 워라밸의 본질은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균형이다. 어떻게 업에서 '하고 싶은 것'의 양을 늘리며 살아볼까.


다운타임 기간에 업무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으며, 좋은 책을 읽고 원리 혹은 방법을 바로 적용하는 행동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업무 시간 중 1시간이라도 공백 시간을 가져야지만 배움을 적용하는데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읽고 배워도 일주일에 1시간이 안 주어지면 못 적용하고 휘발된다. 다운 타임을 가진 후, 같은 레벨에 머무르지만 레벨 업한 기분이다. 노력과 인풋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장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잊고 있던 한 가지,


이 글을 쓴 다음 날, 한국의 리더분과 커피챗을 하게 됐다. 팀 이동 후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항상 회사의 가장 좋은 프로젝트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깨달았어요. 과거에 좋은 프로젝트에 들어갔음을 감사하고, 회사가 커지며 새로운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와 변화를 리드할 때, 그들이 그 시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는 걸 배웠어요.". 그런 때가 있었다. 계속 성공 케이스를 만들며 승승장구하고 싶고, 변화하는 조직에서도 인정받고 싶었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점점 강해지며 천천히 가려는 매니저와 필요 이상으로 부딪히기도 하고 차분하고 겸손한 태도로 소통하는 내 강점을 잃었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특히 미국 본사에서 외국인 리더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아시안은 자신의 강점과 성과를 소극적으로 소통하는 게 부족한 점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괜히 더 당당한 척 애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잃어가고 있지 않았나 싶다. 2년이 흘러 그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하며 '많이 어렸구나' 싶고, 열심히 쌓아온 걸 또 열심히 조금씩 뭉갠 거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기 전에는 몰랐다. 성공으로 인한 자만심으로 무너진다는 게 한 순간일 수 있음을, 더 가지 않고 (자만심을 갖기엔 성공도 스스로도 많이 부족하다는 걸 그때도 알았지만) 지금 확실히 깨달은 게 다행이다.


리더분이 조언을 해주셨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지금 하는 생각들을 다른 리더분들과도 말해보세요. 적절한 톤 앤 매너로 이런 변화와 배움을 말해 보세요. 본연의 인간적인 모습을 다시 보여주세요. (꽤 많은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시기를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한국인 리더들이 알아봐 주는 나의 모습과 인간적인 신뢰를, 외국인 리더들과도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게 올해 나에게 주어진 과제 같다. 한국인 리더분들과 나누듯 책 이야기, 인생 이야기, 배움 이야기, 삶의 좋아하는 부분까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그런 관계를 몇몇 리더와는 만들어보고 싶다. 팀 이동과 성과 평가라는 첫 단추는 잘 꿰었으니 겸손하고 밝게 나다운 모습으로 시간과 에너지 관리하며 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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