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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S'가 환상문학을 읽을때 생기는 일

보르헤스 <픽션들>을 읽고

by J제이
화면 캡처 2025-02-13픽션들.png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소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강제로 읽은 책 중에 더러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으나

대체로는 즐거운 독서생활이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르헨티나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인물을 검색해 보니 아는 사람은 '체 게바라' 뿐이다.

보르헤스가 이번에 추가가 되었다. 내겐 생소한 작가이지만 무척 유명한 작가인가 보다.


문학사 측면으로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가 익히 들어봤던 영화들도 모두 보르헤스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고 한다. 작가들에게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을 행사했나 보다.

메트릭스, 인셉션, 인터스텔라, 벤자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등 현실과 상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통점이 있다.


MBTI에서 제일 어려웠던 S와 N의 차이를 최근에 구별하게 되었다.

S인 나에게 이 책은 참 어려웠다.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의 나열, 상상력이 빈약한 나에게 자꾸 비현실을 설명한다. 책을 여러 번 덮고 싶었다. 완독 한다고 해도 그저 '글자들을 읽었다' 수준이 될 거 같아서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p10)


이 소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소설과는 다른 태도로 읽어내야 한다.

문학사에는 큰 공헌을 했더라도 독자에게는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다른 리뷰들을 봐도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크게 2개의 챕터로 나뉜다. 2개의 안에 총 17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2부인 <기교들> 은 좀 나았다. 스토리가 있는 단편들이어서 그나마 읽기가 수월했다.



읽으면서 질문이 떠올랐던, 화두를 던져주었던 몇 가지 단편을 소개해 보겠다.


1.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이슬람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란 법대생이 주인공이다. 힌두교 vs 이슬람교 전쟁을 피해 이리저리 떠돈다.

알모타심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만나러 전 세계를 여행하다가 마지막에 그를 찾아낸다.

만나러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끝나는 소설'을 리뷰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게 이 단편이다.


"알모타심이 있느냐고 묻는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법대생에게 들어오라고 말한다.
법대생은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거기서 소설은 끝난다." (p46)


기존에 존재하는 소설에 가상의 인물을 1명 추가시키고 이야기에 조금 살을 붙여 소설로 완성한다.

모든 소설은 작가의 창작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그런 기본적인 틀을 깨고 소설이 탄생할 수도 있구나 싶다.



2.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그대로 베껴서 20세기 메나르 작가가 완성한 또 다른 돈키호테.

표절이 아니라 시대와 작가가 다르면 다른 작품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오히려 메나르 작가의 작품이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1명의 해석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과거의 작품은 해석되고 평가를 받는다.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n명의 해석을 이해한 상태로 소설을 썼으므로 더 대단하다는 것이다.


이상한데 싶다가도 맞는 말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랑'에 대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베끼는 아이템이다. 장소와 직업과 사람만 바뀌고 계속 반복해서 변주되는 이야기다.

우연히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갈등을 겪고 사랑이 더 깊어지고 "영원히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해피엔딩을 맞는다.

우린 이걸 표절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해와 해석, 차이와 반복에 대해 혼란스러운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3. 바빌로니아의 복권

처음 오락처럼 사용됐던 복권이 나중에는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중독의 무서움을 얘기하는 건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부조리를 얘기하고 싶었을까?

복권 시스템을 보이콧하거나 연대해서 막으면 되었을 텐데 소설 속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지옥을 산다.


운명, 우연, 복불복, 평등한 기회가 오염되고 점점 더 폭력성을 띤다.

더 자극적이 되어가고 폭력은 확대되고 잔인해져 간다. 내 목숨을 보장받지 못한다.

내게 해가 되지 않으면 쾌락은 더 커져가고, 쾌락의 강도는 더 쎄져야 엔도르핀이 나온다.

해를 입었으면 갚아줘야 한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점점 지옥으로 치닫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현재의 우리도 이런 복권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살고 있다면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주식, 대학입시 경쟁, 비트코인, 도박, 사채, 수십억 연봉의 스포츠스타, 회당 억대 출연료 받는 배우



4. 바벨의 도서관

'모든 것은 이미 쓰여있다, 모든 책은 바벨도서관에 존재한다'는 전제.

창의성의 죽음인가. 한 차원 높은 영감을 끌어낼 수 있는 매개체인가.

무한히 많은 것은 장점일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걸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우주만큼 무한한 자원도 쓸모가 없으면 무의미하다. 가치가 없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쓸모가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AI와 바벨의 도서관이 손을 맞잡으면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지식의 홍수 속에서 진리가 숨어버리는 역설.



5. 기억의 천재 푸네스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과잉기억증후군. 현대는 이런 병명으로 부른다.

완벽한 기억은 항상 진실인가? 인간성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푸네스에게는 무한한 바벨의 도서관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물론 한번 이상 눈으로 봤어야 하지만.


우영우처럼 법 조항은 물론 한 번 본 판례까지 쭉~ 읊고 있으면 성공은 보장되겠다.

개인적 측면으로는 사소한 상처까지도 잊을 수가 없으니 슬픔과 우울이 떠나지 않겠다.

나이 들어 어떤 인간성을 갖게 될까? 미쳐서 정신병원에 들어가거나 만성두통에 시달리지 않을까.

남들보다 말을 많이 해야 해서 (기억을 설명하고, 바로 잡아주고, 오류를 지적하고, 진실을 깨우치고...)

의욕이 떨어지고 무기력 증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시니컬하고 세상 모든 타인이 하찮아지지는 않을까.




2월의 독서토론 책으로 선정되어 강제로 읽었다. 함께 나눌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여러 번 읽는다.

여러 번 읽으니 좀 이해가 간다. 애정하는 단편이 처음 읽었을 때 꼽은 것에서 바뀌었다.


두어 명에게 받은 질문지와 내가 뽑은 서너 개를 합쳐서 독서토론 발제를 마무리한다.

한 달에 한 번씩 치러지는 이 즐거움(이라 쓰고 때때로 고통이라 읽는다)이 무겁고 버겁다.

독서 토론 당일이 되면 몰입과 머리 회전이 최고의 속도를 낸다.


몇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되면 자신감이 급격히 상승한다. 토론 진행자의 베네핏(benefit)을 생각한다.

책임감 있게 읽고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하다 보면 남들보다 더 깊게 읽을 기회가 강제로 주어진다는 점,

어려워도 꿋꿋하게 독토 진행을 이어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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