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y강성 Jul 14. 2024

칩워(Chip War) (1)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지음

《칩워(Chip War)》는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 국제관계학 대학인 플레처 스쿨(The Fletcher School of Law and Diplomacy)에서 국제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 밀러(Chris Miller)2022년에 쓴 책으로 최근 반도체칩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더불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크리스 밀러 출처 구글 이미지]

크리스 밀러는 예일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으며, 미국기업연구소에서 진 커크패트릭 방문 펠로, 포린폴리시연구소에서 유라시아 연구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저서는 주로 러시아의 역사와 경제에 관한 책들인데, 《푸티노믹스: 되살아난 러시아의 권력과 돈(Putinomics: Power and Money in Resurgent Russia)》, 《소비에트 경제를 구하기 위한 분투(The Struggle to Save the Soviet Economy)》, 《우리가 주인이 될 것이다: 이반 대제부터 푸틴까지 러시아 동진의 역사(We Shall Be Masters: Russian Pivots to East Asia from Peter the Great to Putin)》 등이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한국어판 서문


오늘날 미국과 중국은 세계 반도체 지도를 다시 그리고자 합니다. 첨단 기술에서 한참 뒤떨어진 중국은 한국, 대만, 기타 외국산 반도체 수입 비중을 줄이고 의존도를 낮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은 중국의 군사력과 기술력이 성장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근심 어린 눈으로 전 세계 첨단 프로세서 칩의 90퍼센트가량을 만들어 내는 대만을 살피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은 지금 스스로 적응의 길에 나섰습니다. 한국이 향후 수년간 첨단 칩 제조의 핵심 생산자 지위를 유지하리라는 전망은 거의 모든 반도체 전문가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반도체 전쟁, 칩 워의 영향은 반도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연장선상에는 전자 제품 생산 업체와 그에 따르는 공급망이 있습니다.


PC와 스마트폰 생산 업체들은 이제는 정치와 안보까지 염두에 두고 공급망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한국 기업은 전자 제품 공급망 변동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칩 워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은 매출 유지에 있어 필수적인데,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한국 기업은 중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술 우위를 지켜 나가기 위해 더 노력하는 길뿐입니다.


들어가는 말


2020년 8월 18일 미군 구축함 머스틴호(USS Mustin)가 대만해협 북쪽 끝으로 집입했다. 5인치 포를 남쪽으로 겨냥한 채 대만해협을 항해함으로써 그 공해가 중국의 지배 영역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대만해협은 아시아의 공장에서 생산해 내는 제품을 전 세계로 실어 나르는 상업용 수송선으로 붐비고 있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머스틴호가 컴퓨터 기술이 집약된 무기를 고슴도치처럼 곤두세우고 대만해협으로 들어옴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보복 조치로 대만 주변에서 실탄을 이용한 사격훈련을 개시했다. 한 중국 신문의 표현에 의하면 “무력에 의한 통일 작전”의 연습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중국 지도자들의 가장 골치 아픈 근심거리는 미 해군이 아니라, 미국 기술의 해외 이전을 규제하는,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이른바 ‘수출 통제 명단(Entity List)’에 컴퓨터 칩을 넣은 것이었다.


규제 대상은 중국의 IT 대기업 화웨이였다. 화웨이 제품이 중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너무나 매력적인 가격으로 차세대 통신 네트워크의 근간을 차지하게 될 것을 우려해 미국은 화웨이가 미국 기술을 이용한 고성능 컴퓨터 칩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화웨이의 제품라인 전체가 생산이 불가능해졌다.

[화웨이 제재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트럼프 출처 구글 이미지]

머스틴호가 남쪽으로 항해하는 와중에도 대만해협 양쪽의 공정과 조립시설은 아이폰 12의 부품을 찍어 내고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가장 수준 높은 프로세서(아이폰 12s에는 118억 개의 미세한 트랜지스터가 새겨진 작은 실리콘 조각이 담겨있다)는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공장, 대만 TSMC에서만 만든다.

[아이폰12와 A14칩, TSMC 출처 구글 이미지]

반도체 산업은 일단 형태를 갖추고 난 후로 실리콘밸리를 빼놓고는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실리콘밸리의 공급망에 깊숙이 파고드는 쪽을 택한 나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의 반도체 장비 생산, 칩 아키텍처 설계, 대만 한국 일본의 생산능력은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장비, 소프트웨어, 거래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가 강타하면서 세계는 우리가 얼마나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는지 막 깨달아 가고 있었다. 몇몇 반도체 공장과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의 공장들이 재해와 코로나 락다운으로 멈춰 서자 실리콘밸리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자동차 제조사들까지 반도체 물량을 확보하지 못해 생산 설비를 놀려야 했다.


이 과정을 설명하려면 엄청나게 복잡한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설명을 풀어가야 한다. 칩의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소프트뱅크가 대주주), 영국에 본사를 둔 암(ARM)이라는 회사에서,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이, 미국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반도체 설계도를 디자인한다.

[ARM 생태계 출처 구글 이미지]

설계도는 대만의 설비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선 일본에서 온 극히 순수한 실리콘 웨이퍼와 특수한 가스를 사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공작기계가 반도체 설계도를 웨이퍼에 그려 넣는다.


이런 장비를 제작하는 기업은 다섯 곳으로 하나는 네덜란드, 하나는 일본, 나머지 셋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테스트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중국으로 보내 핸드폰이나 컴퓨터 부품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구입할 수 있는 석유와 달리 연산력 생산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몇 개의 병목지점이 존재한다. 이토록 적은 수의 기업의 이렇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영역은 오직 반도체뿐이다. 대만에서 새로운 연산력(computing power)의 37%를 제공하고, 한국의 두 기업은 메모리칩의 44%를 생산하며,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머신 공급은 네덜란드 ASML에 100% 의존한다.


미국, 중국,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아찔할 정도로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다. 이 복잡한 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2020년까지 미국의 애플과 중국의 화웨이 양쪽을 최대 고객으로 삼고 있던 그 회사를 만들어 낸 어떤 사람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이다.


모리스 창(Morris Chang, 張忠謀)은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 당시 홍콩에서 성장했다. 하버드, MIT, 스탠퍼드에서 수학한 그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하며 미국 반도체 산업의 초기부터 힘을 보탰다. 모리스 창은 미군의 전자 장치 개발을 위한 “극비의 기밀 정보 취급 허가"를 마친 인물로, 대만을 세계 반도체 제조의 핵심지로 만들어 냈다.

[모리스 창 출처 구글 이미지]

베이징과 워싱턴의 몇몇 국제 전략가는 두 나라의 기술 영역을 완전히 떼어 내는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칩 디자이너, 화학 물질 공급, 제조 설비 생산자 등으로 이루어 지극히 촘촘하고 효율적인 국제 분업 체계는 그렇게 손쉽게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며, 모리스 창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다.


물론 그건 뭔가 폭발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중국이 대만을 "재통일"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개시하거나 TSMC의 최신 반도체 제작 설비를 향한 단 한 발의 미사일 공격 성공만으로도, 세계 경제는 반도체발 충격에 크게 휘청댈 것이고, 이는 중국이 벌일 수 있는 일 중 이보다 더 극적인 일은 떠올리기 어렵다.

[출처 구글 이미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적 갈등 상황에 글로벌 경제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상황은 역사가 낳은 오류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대만, 한국, 그 외 동아시아가 최신 반도체 생산 거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은 세 대륙에 걸친 그 흐름을 역사 기록과 100여 명이 넘는 과학자, 엔지니어, CEO, 정부 관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추적한다. 반도체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규정해 왔고, 국제 정치의 향방과 세계 경제의 구조를 가를 것이며, 군사적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장 현대적인 이 장치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파트 1 냉전의 칩


1장 강철에서 실리콘까지


이 장에서는 먼저 반도체 칩의 역사에 있어 주요 인물인 일본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소니의 창업자),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모리스 창(Morris Chang, TSMC 창업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앤디 그로브(Andrew Grove, 전 인텔 CEO)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 온 역경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형편이 좋은 술도가의 아들로 태어난 모리타는 일본 해군 엔지니어링 연구소에 지원하면서 전선으로 차출되는 신세를 간신히 면했다. 하지만 B-29가 도쿄와 그 외 도심지 대부분을 파괴해 버리고 미국의 해상봉쇄로 기근이 만연하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가미카제 비행사로 훈련받고 있었다.


동중국해를 건너와 보면, 모리스 창은 어린 시절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피해 광저우, 홍콩, 충칭 등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일본이 패퇴하자 상하이로 옮겼고, 마오쩌둥의 군대가 상하이로 밀고 들어오자 다시 난민이 되어 두 번째 홍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대편 부다페스트에서는, 헝가리에서 2등 시민으로 취급받던 유대인으로 태어난 앤디는 아버지가 징집되어 소련과의 전투에서 실종된 후 소련의 붉은 군대가 헝가리 수도로 진격해 오자 방공호에 숨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모리타 아키오, 모리스 창, 앤디 그로브 출처 구글 이미지]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산업 생산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군사력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었다. 1945년 모리스 창과 앤디 그로브는 아직 학생이었지만, 모리타 아키오는 20대 초반으로 군대에서 열추적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고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자식 계산기가 수학 문제를 풀며 “계산”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계산의 역사는 호모 사피엔스까지 거슬로 올라가는데, 1800년대 말부터 1900년 초에 걸쳐 정부와 기업에는 거대한 관료조직이 성장하면서 간단한 기계식 계산기로 무장한 인간 “컴퓨터” 군단이 필요해졌고,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마침내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미 육군이 포탄의 탄도 궤적을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전설적인 컴퓨터 에니악(ENIAC)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1만8000개의 진공관이 들어가 있었는데, 진공관은 전구가 불빛을 내뿜었기 때문에 벌레가 꼬이기 십상이었고, 엔지니어들은 주기적으로 디버깅(debugging)을 통해 벌레로 생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에니악 출처 구글 이미지]

2장 스위치


“더 나은 ‘스위치(switch)’가 나온다면 그것은 반도체라는 물질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팰로알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벨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가 오래도록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전기가 흐르는 물질을 도체, 전기가 흐르지 않는 물질을 부도체라고 부르는데, 실리콘과 게르마늄 등 몇몇 원소는 특정 조건에 따라 전기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활용한 물건을 ‘반도체’라고 한다.


대부분 물질은 마치 구리선처럼 전류가 자유롭게 흐르거나 마치 유리처럼 전류를 차단한다. 반도체는 다르다. 실리콘이나 게르마늄 같은 반도체는 그 어떤 전류도 흐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어떤 물질이 추가되면 전기장을 띄고 전류가 흐를 수 있게 된다.


1945년 쇼클리는 반도체 현상을 최초로 이론화하면서 "고체 상태 밸브(solid state valve)"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연구 노트에는 실리콘 조각에 90볼트 배터리가 연결된 모습이 스케치로 남아 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실리콘 같은 반도체 물질을 전기장이 있는 곳에 두면, 내부에 저장되어 있는 "자유 전자"를 반도체의 경계선 인근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전기장에 의해 충분히 많은 전자가 유도되면 반도체의 경계선은 마치 언제나 다수의 자유 전자를 지니고 있는 금속처럼 작용한다. 도체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2년 후 벨연구소의 동료 두 사람, '월터 브래튼'과 훗날 노벨 물리학상 2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운 '존 바딘'은 게르마늄에 전류가 흐르도록 통제할 수 있는 실험을 통해 쇼클리의 이론을 확인했고, 그 직후 쇼클리 역시 직접 반도체를 컨트롤해서 '스위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벨연구소는 1948년 기자회견을 통해 과학자들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엄청나게 작은 크기의 트랜지스터가 수천, 수백만, 수십억 개씩 모여서 인간 두뇌가 수행하던 계산 업무를 대체하는 미래가 머지않아 닥쳐올 것이라는 것은 쇼클리도 상상할 수 없었다(이들 모두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3장 노이스, 킬비, 집적회로


단순화하고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다면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듯했다. 노벨상 수상 후에도 연구에만 몰두한 브래튼과 바딘과 달리 쇼클리는 야심이 컸고 단지 유명해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1955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교외 지역인 마운틴 뷰에 쇼클리반도체(Shockley Semiconductor)를 설립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늙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팰로알토와 맞닿는 곳이었다.


쇼클리는 세계 최고의 트랜지스터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런 생각이 가능했던 것은 벨연구소와 트랜지스터 특허를 보유하고 있던 AT&T가 트랜지스터 생산 라이센스를 2만5000달러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트랜지스터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했다.


트랜지스터는 컴퓨터에서 진공관의 자리를 금세 대체했지만, 수천여 개의 트랜지스터를 연결하자 회로는 정글처럼 복잡해졌다.


1958년 여름휴가에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이하 ‘TI’) 엔지니어였던 잭 킬비(Jack Kilby)는 실리콘 혹은 게르마늄 조각 하나 위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를 발명했고, 원형의 실리콘 웨이퍼에서 "잘라 낸(chipped)" 실리콘 조각에 집적회로가 구성되어 '칩'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잭 킬비와 최초 집적회로 출처 구글 이미지]

그로부터 약 1년 전 윌리엄 쇼클리의 반도체 랩에는 그가 고용한 여덟 명의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그들은 노벨상 수상에 빛나는 보스에게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쇼클리는 재능을 알아보는 일에 탁월했지만 관리자로서의 역량은 형편없었다.


그리하여 여덟 명의 엔지니어가 동부 해안의 백만장자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페어차일드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라는 자신들의 회사를 차렸다. "여덟 명의 반란자"는 실리콘밸리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로 널리 이름을 남기고 있다.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벤처 캐피털 중의 하나인 클라이너퍼킨스(Kleiner Perkins)를 세웠고, 고든 무어(Gorden Earle Moore)는 무어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밥 노이스(Bob Noyce)로, 그는 새로운 발명을 상업적 기회와 연결 짓는 역할을 했다.

[고든 무어, 쉘든 로버츠, 유진 클라이너, 밥 노이스, 빅터 그리니치, 줄리어스 블랭크, 진 호에르니, 제이 라스트 출처 구글 이미지]

최초로 상용화된 트랜지스터는 게르마늄 블록에 다른 재료를 층층이 쌓아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급경사를 이룬 탁자 모양의 메사(Mesa)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노이스의 동료 진 호에르니(Jean Hoerni)는 트랜지스터가 반드시 메사 구조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트랜지스터의 모든 부품을 실리콘 웨이퍼에 제조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실리콘 판에 보호용 이산화규소층을 부착한 다음, 필요한 곳에 홈을 식각하고 추가 물질을 증착하는 방식이었다. 이 공정은 보호용 박막을 붙인다는 점에서 증착(deposition)으로 불리게 되었고, 불순물이 끼어들 위험을 피할 수 있어 신뢰도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몇 달 후 노이스는 호에르니의 "평면방식(planar method)"을 통해 동일한 실리콘 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즈음 킬비 역시 메사 트랜지스터를 전선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개발한 '집적회로'가 '반도체' 혹은 '칩'으로 통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초창기에 노이스의 집적회로는 별도의 부품이 전선으로 연결된 단순한 기기보다 제작비가 50배는 비쌌다. 노이스의 발명이 독창적인, 아니 눈부신 것이라는 점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했지만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이 필요했다.

[밥 노이스와 그가 만든 실리콘 웨이퍼 트랜지스터 출처 구글 이미지]

4장 이륙


노이스와 무어가 페어차일드반도체를 세운 지 사흘이 지난날 밤 8시 55분 집적회로를 누구에게 어떻게 팔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 캘리포니아 밤하늘을 거쳐 스쳐 지나갔다.


소련이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시속 2만90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지구 궤도에 올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고 있었던 것이다. 4년 후 소련은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을 우주에 보내 세계 최초의 우주 비행사를 탄생시켰고 미국인들은 또 한 차례 충격에 빠졌다.


이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인류를 달에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갑자기 밥 노이스에게 집적회로를 팔 수 있는 시장이 열렸다. 바로 로켓이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노이스의 칩을 대량 구매한 첫 고객은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였다. 나사는 달에 우주 비행사를 보내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고 MIT 계기연구소의 엔지니어들은 아폴로 우주선 유도 컴퓨터를 디자인하라는 나사의 과제를 맡게 되었다.


1962년에 MIT팀은 페어차일드가 홍보하고 있던 '마이크로로직(Micrologic)' 칩을 구매해 아폴로 프로그램의 컴퓨터에 도입했다. 이 컴퓨터는 별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루어진 컴퓨터보다 3분의 1 정도의 크기와 무게였고 전력 소모 역시 훨씬 줄어들었다. 이는 에니악보다 1000배나 작은 것이었다.


페어차일드반도체는 아폴로 프로그램에 칩을 공급하면서 1958년 50만 달러였던 매출액이 불과 2년 후 2100만 달러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나사를 위해 칩 생산을 늘리면서 다른 고객들에게는 1961년 12월 120달러에서 이듬해 10월 15달러까지 가격을 인하했다.


비록 그들의 칩이 큰 역할은 못했지만 이것 역시 TI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TI의 대표 팻 해거티는 잭 킬비의 집적회로가 결국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전자제품에 들어갈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팻 해거티와 공동 창업자 에릭 존슨 출처 구글 이미지]

1962년 가을, 공군은 미니트맨 2 미사일을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컴퓨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미니트맨 2는 핵탄두를 싣고 소련 땅에 떨어지기 전 우주로 날아가도록 설계된 로켓이었다. 해거티는 킬비의 집적회로를 이용하면 무게는 절반으로 줄이면서 두 배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고 공군에 약속했다.

[Minuteman II Missile ICs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TI는 이 계약을 따냈다. 1964년 말에는 TI는 미니트맨 프로그램을 위해 10만 개의 집적회로를 공급했다. 팻 해거티가 군대에 칩을 팔겠다는 도박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일한 관건은 반도체를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TI가 배울 수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5장 박격포와 대량생산


밥 노이스와 동문수학했던 MIT를 졸업한 후 제이 라스롭(Jay Lathrop)은 미국 정부 연구소에서 조수인 화학자 제임스 넬(James Nell)과 81밀리미터 박격포의 탄두가 목표물 위에서 자동 폭발하게 하는 기폭장치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역시 메사 모양의 트랜지스터를 소형화하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트랜지스터 하나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현미경 렌즈를 거꾸로 뒤집는다면 렌즈가 큰 물체를 작게 보이게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미경 렌즈를 이용해 큰 패턴을 포착하고 그 패턴을 게르마늄에 인쇄할 수 있다면 메사 모양의 게르마늄 블록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당시 카메라 회사 코닥(Kodak)은 빛의 노출 정도에 따라 반응하는 화학 물질인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s)를 팔고 있었다. 어떤 물질은 빛에 노출되면 녹아 없어졌고 다른 것은 단단해져서 표면에 고정되었다. 라스롭은 이러한 공정에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라는 이름을 붙였다. 빛으로 인쇄한다는 뜻이었다.

[제이 라슬롭과 포토리소그래피 출처 구글 이미지]

1958년 TI는 라스롭을 영입했고 라스롭의 리소그래피 공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TI는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공법이 필요했다. TI는 자체 원심분리기를 마련하여 코닥에서 공급한 화학물질을 재처리했고, 라스롭은 '마스크'를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또한 당시로는 가려내기 어려운 불순물이 화학물질에 들어 있었다. 기온과 압력 변화는 예기치 못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TI는 수많은 온도, 화학적 결합, 생산공정 등의 영향을 계속 실험하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 엔지니어 메리 앤 포터(Mary Anne Porter)의 공로가 컸다.


라스롭을 영입한 1958년에 TI에 모리스 창이 도착했다. 창의 임무는 트랜지스터 생산 라인 책임자였다. 당시 TI가 만드는 트랜지스터는 제조 수율이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트랜지스터였다. 거의 모든 회로에 누전이나 오작동을 일으키는 제조상의 결함이 있어서 결국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모리스 창은 각기 다른 화학물질을 결합했을 때의 온도와 압력을 변경해 가며 이상적인 조합을 찾아내기 시작했고 데이터에 직관을 더해 답을 찾아내 결국 그가 맡은 트랜지스터 생산라인 수율이 25%까지 올라갔다. IBM 경영진마저 창의 방법론을 연구하기 위해 댈러스에 찾아올 정도였다. 곧 그는 집적회로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한편 페어차일드의 노이스와 무어는 라스롭의 연구실 동료인 제임스 넬을 고용하여 포토리소그래피 기업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조 공정을 개선하는 것은 1963년에 채용된 앤디 그로브 같은 생산 엔지니어들에게 달린 문제였다.


벨연구소의 특허가 세계를 바꾸는 산업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 이론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링과 직감에 힘입은 것이었다. 쇼클리는 결국 큰돈을 벌겠다는 야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트랜지스터를 유용한 칩으로 만들고 대량 생산의 길을 연 것은 여덟 명의 반란자와 비슷한 부류들이었다.


6장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아폴로 우주선과 미니트맨 2를 유도한 컴퓨터는 미국의 집적회로 산업이 출범할 수 있는 초기 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페어차일드의 이른 성공에 군사 우주 프로그램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밥 노이스는 1965년에 "올해 생산한 회로 중 95% 이상"이 군사, 우주 장비에 사용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이스는 페어차일드 연구개발 목적을 군사용이 아닌 대량 생산 시장용 제품에 맞췄다. 민간시장을 대폭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노이스는 가격을 마구 인하하는 도박을 했다. 1960년대 초 페어차일드는 20달러짜리 반도체 가격을 2달러까지 낮췄다.


가격을 낮춘 덕에 페어차일드는 민간 영역에서 굵직한 계약을 따내기 시작했다. 1968년 컴퓨터 산업은 군대만큼이나 많은 칩을 구입했다. 페어차일드는 그 컴퓨터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 훗날 무어는 페어차일드의 집적 회로 기술만큼이나 노이스의 가격 인하 정책 역시 거대한 혁신이었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말경 아폴로 11호가 성공하고 칩 시장은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어차일드반도체는 여전히 한 억만장자의 소유였고, 그는 직원들에게 보상을 했지만 스톡옵션만은 거절했다. 그는 지분을 나눠주는 발상을 일종의 '소름 돋는 사회주의'로 취급하고 있어, 노이스를 포함해 모두가 탈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과학발전과 새로운 제조 공정뿐 아니라 재정적으로 한 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무어의 법칙을 이끄는 근본 동력이었던 것이다. 페어차일드 직원 중 한 사람은 퇴사 설문지에 퇴사의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부자가…되고…싶다." 



파트 2 아메리칸 월드의 회로망


7장 소비에트 실리콘밸리


1959년 가을, 스푸트니크호가 지구 궤도에 오르고 2년이 지난 후, 소련의 반도체 공학자 아나톨리 트루츠코(Anatoly Trutko)가 교환학생으로 스탠퍼드대학교 기숙사인 크로더스 메모리 홀에 입소했다. 그는 윌리엄 쇼클리의 수업에 참관하기도 했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건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는 실리콘밸리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59년 CIA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트랜지스터의 생산량과 푸밀에서 소련보다 고작 2년에서 4년 정도 앞서 있을 뿐이었다. 초기에 소련에서 온 교환학생들은 KGB의 첩자였고 소련의 국방 산업 목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50년대 말부터 소련은 전국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새롭게 건설하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가장 유망한 과학자들을 투입했다. 유리 오소킨(Yuri Osokin)은 이미 킬비와 노이스가 몇 년 전에 동일한 선구적 경로를 개척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62년 집적회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옥수수 생산에서 인공위성 발사까지, 미국과의 모든 경쟁에서 앞서 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는 기술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소련무선전자위원회의 회장 대리였던 알렉산더 쇼킨(Alexander Ivanovich Shokin)은 그를 활용해 마이크로 전자공학에 더 많은 투자를 끌어들였다.

[유리 오소킨의 microcircuit 관련 메모와 니키타 흐루쇼프 출처 구글 이미지]

1930년대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계 유대인인 조엘 바(Joel Bar)와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전기 엔지니어 알프레드 사란트(Alfred Sarant)줄리우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의 간첩 조직에 포섭되었다. 바와 사란트는 당대 기술을 선도하던 미국 기업에서 기밀사항이었던 레이더 및 다른 군사시스템을 연구했다.


1940년대 말 FBI는 미국 내 KGB의 간첩 조직을 색출했고 로젠버그는 그의 아내 에델과 함께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했다. FBI에 붙잡히기 전 사란트와 바는 미국을 떠났고 결국 소련에 다다를 수 있었다.


소련에 도착한 그들은 1950년대 말 그들의 첫 컴퓨터를 제작하고 러시아어로 ‘마음’을 뜻하는 ‘움(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흐루쇼프로부터 모스크바 시 외곽의 반도체 도시 건설 허가를 얻어 녹색 도시라는 뜻을 지닌 젤레노그라드(Zelenoograd)를 착공했다. 중심부에는 모스크바 전자기술대학(MIEM)이 자리 잡았다.

[로젠버그 부부와 조엘 바, 알프레드 사란트 출처 구글 이미지]

8장 베끼시오


니키타 흐루쇼프가 젤레노그라드 건설에 지지를 표명했던 그 무렵, 보리스 말린이라는 소련의 대학생이 1년간의 교환학생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TI의 sn-51을 가지고 왔다. 이는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최초의 집적회로였다.


당시 소련의 마이크로 전자공학을 총괄하던 관료 알렉산더 쇼킨(Alexander Ivanovich Shokin)은 이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를 확보하자 그 칩을 현미경 아래에 놓고 “하나씩, 그 무엇도 변경하지 말고. 석 달 주겠오.”라고 '베끼시오' 명령을 내렸다.

[TI의 sn-51, 알렉산더 쇼킨 출처 구글 이미지]

이에 대해 소련 과학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미국의 화학자나 물리학자에게 뒤처지지 않는 과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보낸 소련 교환학생들은 윌리엄 쇼클리의 수업에서 별로 배울 게 없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소련에는 최고 수준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잭 킬비가 2000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당시 러시아의 과학자 조레스 알페로프(Zhores Alferov)가 공동 수상했다. 반도체 소자로 빛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기초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또한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고 1961 유리 가가린을 배출했으며 1962년 오소킨이 집적회로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조레스 알페로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쇼킨의 ‘베끼시오’ 전략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었다. 핵무기 제조에서는 모방 전략이 통했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고작 수만 개의 핵탄두를 만들었을 뿐이었지만 미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이미 반도체 대량 생산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고 그 핵심 요소는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다.


쇼클리 수업을 들은 교환학생들은 똑똑한 물리학자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어떤 화학물질을 어떤 온도에 맞춰야 하는지, 포토레지스트를 얼마나 오래 빛에 노출시켜야 하는지 같은 지식은 앤디 그로브나 메리 앤 포터 같은 엔지니어들의 것이었다. 이런 유형의 노하우는 많은 경우 문서로도 정리되지 않는다.


게다가 연산력은 대략 매년 두 배씩 늘어났다. 다른 그 어떤 기술영역도 이토록 빠르게 바뀌지 못했다. 다른 기술분야와 달리 작년의 설계를 훔치고 베끼는 것은 가망 없는 것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며 실질적인 공장 밑바닥 경험을 쌓아나간 반면에, 소련은 모스크바의 장관 책상에서 명령을 하달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어째서 ‘베끼는’ 전략이 그들을 뒤처지게 만들고 있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소련 반도체 산업은 모두 일종의 방위 산업체처럼 작동했다.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고, 베끼시오 식의 자세는 예기치 못하게 소련 반도체 산업이 정신적으로 미국에 복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9장 트랜지스터 세일즈맨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가 화려한 엘리제궁에서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과 만났던 1962년 11월, 그의 손에는 작은 선물이 들려 있었다. 바로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드골은 이케다가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처럼 굴었다고 조롱했다. 그렇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는 일본을 질시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1962년 이케다와 드골 출처 게티 이미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 일각에서는 일본의 하이테크 산업을 모두 해체해 버리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끔찍한 전쟁을 시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항복한 지 몇 년 후, 워싱턴의 국방 관료들은 "약한 일본보다 강한 일본이 더 낮은 리스크"라는 공식 정책을 채택했다.


일본이 핵물리학을 연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짧게 있었으나, 그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이 기술과 과학 강대국으로 재탄생하도록 지지해 주었다. 관건은 일본이 경제를 재건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시스템의 일원으로 포섭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을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으로 만드는 것은 미국의 냉전 전략의 핵심이었다.


도쿄의 미 군정은 일본의 과학자들에게 《벨 시스템 테크니컬저널》 《응용물리학저널》 등을 구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1953년에 미국 과학자들이 도쿄에 왔을 때 일본의 젊은 물리학자 기쿠치 마코토는 존 바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해 소니의 모리타 아케오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 학위를 따고 전 동료인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소니를 설립했는데, 1948년 벨연구소의 새로운 트랜지스터에 대한 기사를 읽고 바로 그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뉴욕에서 그는 AT&T의 경영진을 만나 트랜지스터 생산에 대한 라이센스를 취득한다.


소니의 첫 번째 큰 성공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일본 기업이 몇 년은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미국의 칩 제조사들은 기꺼이 기술 이전에 동의했다. 미국 기업이 최고의 컴퓨터를 만드는 동안, 소니나 샤프 같은 전자회사들은 반도체 소비를 견인하는 소비재를 만들어냈다.

[소니 공동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와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들 출처 구글 이미지]

계산기 역시 일본 기업들이 바꿔 놓은 또 다른 소비자 전자 제품 중 하나였다. TI의 회장 팻 해거티는 1967년 잭 킬비에게 휴대 가능하며 반도체로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으나 그들은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한 반면, 일본의 샤프전자는 생각이 달랐고 훨씬 간단하고 저렴하게 계산기를 만들어 큰 성공을 이뤄냈다.


해거티는 당시의 일을 후회했다. 만약 TI가 자체 브랜드를 일찍 내놓을 수 있었다면 “소비자 가전에서 소니가 갖는 위치를 차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니의 제품 혁신과 마케팅 능력을 따라 하는 것은 미국의 반도체 생산력을 모방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복잡한 갈등 조정 절차를 거쳐 반도체 공생 관계가 성립했다. 서로의 생산자이며 소비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늘 원활하게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본이 전자산업을 일으켜 세우게끔 하는 것은 미국의 냉전 전략의 일부였으므로 1960년대 내내 워싱턴이 도쿄를 강하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반도체 공생관계가 작동하게끔 하기 위해 일본의 경영자들은 헌신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소니의 모리타의 도움으로 규제의 빨간 테이프를 끊고 녹차를 마신 끝에, 일본의 관료들은 결국 TI가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열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일본은 모리타 같은 용감무쌍한 전자 경영인들 힘입어 세계 무대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이 드골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10장 트랜지스터 걸스


“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의 애정 의식은 동양의 고대 쾌락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964년 호주에서 나온 싸구려 소설 《트랜지스터 걸스》의 표지 문구다. 중국인 갱단, 국제적 음모, 그리고 “과외의 야간작업으로 소득을 높이려 하는” 생산 라인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룬다.

[동아시아의 반도체 공장과 소설 'The Transistor Girls' 출처 구글 이미지]

반도체가 개발되던 초창기에는 거의 모든 설계는 남성의 몫이었고 그걸 조립하는 일은 대부분 여성이 맡았다. 무어의 법칙이 현실화되려면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그걸 조립할 더 많은 더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전 직장 GE에서 공장의 조립 라인 공정을 변경하려다 노동조합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후 페어차일드로 온 찰리 스포크(Charlie Sporck)는 시가를 피우고 운전을 거칠게 하는 뉴요커였는데 효율성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노동자와 기계로부터 생산성을 쥐어짜 내는 전문가였다.


노동력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던 동부 해안의 전자회사들과 달리, 실리콘 밸리의 경제가 과일 통조림 공장에 의존하고 있던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항공 산업이 활발했던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지금까지도 산타클라라 밸리의 생산 라인에서는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다.

[찰리 스포크와 밥 노이스, 신문 기사 출처 구글 이미지]

칩 회사가 여성을 고용한 이유는 더 낮은 임금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자는 남자보다 노동 조건 개선 요구가 심하지 않았다. 생산 관리자들은 남자에 비해 손이 작은 여자가 반도체 조립 및 완성된 반도체를 테스트하기에 유리하다고 믿고 있기도 했다.


1960년대, 플라스틱 기판에 실리콘 칩을 부착하는 과정은 이러했다. 칩이 올라가야 하는 위치를 노동자가 현미경으로 확인한다. 조립 노동자가 두 부품을 고정시키면 기계에서 열과 압력, 초음파 진동이 가해져 실리콘이 플라스틱 기판과 결합하게 된다. 칩에 전력을 공급하는 얇은 골드와이어 역시 손으로 붙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칩을 테스트하려면 일종의 미터기에 꽂아야 했는데 그 역시 손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칩의 수요가 하늘 높이 치솟음에 따라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사람 손의 수요 역시 급등했다. 이에 페어차일드는 스포크의 보고에 따라 메인주와 세제 혜택을 노리고 뉴멕시코주 나바호 원주민 보호구역에도 공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조차 임금으로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해외 제조 공장을 아시아(홍콩)에 연 것은 반도체 기업 중 페어차일드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모토로라, 그 외 다른 기업도 재빨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미국의 칩 제조사들이 해외 조립 설비를 운영했다.


스포크는 홍콩 바깥으로 눈길을 돌렸다. 시간당 임금 25센트는 미국의 10분의 1이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1960년대 말, 대만의 노동자는 시간당 19센트, 말레이시아는 15센트, 싱가포르는 11센트, 대한민국은 고작 10센트를 받고 있었다.


스포크의 다음 행선지는 싱가포르였다. 중국계가 주류를 이루는 도시국가는 리콴유라는 상대적으로 계몽된 독재자가 다 스리고 있었는데, 한 전직 경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고맙게도 노동조합이 "사실상 거의 불법인" 곳이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페어차일드 공장 출처 구글 이미지]

페어차일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레이시아의 도시 페낭에 조립 시설을 열었다. 반도체업계는 세계화라는 말을 아무도 쓰지 않았던, 그런 말이 등장하기 10년 전부터 세계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시아 중심 공급망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페낭 반도체 공장 출처 구글 이미지]

스포크 같은 관리자들이 세계화의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만약 비용이 같았다면 메인주나 캘리포니아주에 공장을 지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에는 농촌에서 탈출하여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수백만의 농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당분간은 저렴한 노동력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의 대외 정책 전략가들에게 홍콩, 싱가포르, 페낭 같은 도시의 중국계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전복될 날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포크에게 그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존재로 보였다. 그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우리는 실리콘밸리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겪었다. 동양에는 노조 문제가 전혀 없었다."


11장 정밀 타격


TI의 첫 대형 계약은 미니트맨 2 같은 거대한 핵미사일에 사용되는 집적회로였다. 그러나 베트남전은 다른 유형의 무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가령 ‘천둥 번개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수행된 베트남전쟁 초기의 폭격 작전이었는데 여기에 폭탄 80만 톤 이상이 투하되었지만 이 화력전이 북베트남군에게 준 타격은 제한적이었는데 대부분의 폭탄이 목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도 무기의 문제는 진공관이라는 것이 공군이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베트남 상공을 날아다녔던 스패로우 3 대공미사일 같은 경우 손으로 납땜한 진공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남아시아의 습한 기후, 이, 착륙 시 충격, 속도와 방향을 급격하게 바꾸는 공중전 등을 겪고 나면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미군이 베트남에서 맞닥뜨린 가장 어려운 과제는 지상의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것이었다. 공군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적기를 피해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의) 폭탄 투하 고도는 평균 128미터였는데 차량을 조준해 폭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시 34세로 TI의 프로젝트 엔지니어였던 웰든 워드(Welden Word)는 이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그는 1960년대 초부터 마이크로 전자 기술의 군사적 사용을 통한 킬 체인(타격 순환 체계, 움직이는 목표를 탐지하고 파악하여 결정을 내리고 공격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의 혁신을 구상하고 있었다.

[웰든 워드와 페이브웨이 미사일 출처 ‘칩워’ 96쪽]

워드는 1965년 6월 플로리다 에글린공군기지에서 조 데이비스 대령을 만나 북베트남 마강(Song Ma)을 가로지르는 길이 165미터의 철교인 ‘타인호아 다리(Thanh Hoa Bridge)'를 명중시킬 수 있는 폭탄의 설계를 제안했다.


워드는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방향 제어가 가능하도록 작은 날개를 부착했고 그 날개를 조작할 수 있는 간단한 레이저 유도 시스템을 설치했다. 작은 실리콘 웨이퍼를 4등분하여 렌즈 뒤에 배치했고, 목표물에서 반사된 레이저는 렌즈를 통해 반도체에 전달된다. 궤도에서 벗어나면 4개 중 하나 반도체에 더 많은 레이저가 조사되며, 이는 날개를 움직이고 렌즈에 레이저가 똑바로 비출 때까지 폭탄의 궤적을 수정하는 시스템이었다.


9개월의 제작 기간과 9만9000달러의 연구비가 제공되었고 1972년 5월 3일 미군 전투기는 타인호아 다리에 24발의 폭탄을 투하하여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췄다. 단순한 레이저 센서와 몇 개의 트랜지스터 덕분에 638발을 쏘고도 한 발도 못 맞추던 무기가 정밀 폭격의 도구도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폭탄과 마이크로 전자 기술이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탐구해 본 실험장이었으며, 그리하여 군사 체계와 미국의 군사력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페이브웨이 폭탄 투하 및 파괴된 타인호아 다리 출처 구글 이미지]

12장 공급망과 외교의 기술


TI의 임원 마크 셰퍼드(Mark Shepherd)는 TI의 반도체 비즈니스를 이루는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잭 킬비가 최초의 집적회로를 발명할 때 그 부서의 관리자 노릇을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그의 과제는 생산 기지를 아시아로 확장하는 TI의 전략을 이끄는 것이었다.

[마크 셰퍼드아 잭 킬비 출처 구글 이미지]

창과 셰퍼드가 대만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반도체 조립 시설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대만 방문은 최악이었다. 당시 대만 경제부 장관 리궈딩(李國鼎)과의 첫 만남에서, 장관이 지식재산권을 “제국주의자들이 저개발국을 괴롭히기 위한 수단”쯤으로 선포하면서 험악한 분위기로 끝났다.

[리궈딩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미국을 자신의 나라에서 쫓아내고자 했던 북베트남인들과 달리 리궈딩은 결국 대만이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수록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경제적 불만이 커지면 국민 중 일부가 공산주의에 경도될 수 있으므로 일자리와 투자를 얻는 것도 중요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TI가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음을 리궈딩 장관은 깨달았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미국이 지원하던 남베트남이 무너지면 그 충격파가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여기에 1964년 베이징은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고 수소폭탄 실험이 곧 이어졌다.


핵을 가진 중국 앞에서 대만은 미국의 안전보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을 질질끌면서 미국은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우방국에 대한 경제 지원을 끊기 시작했다. 미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나라들 처지에서 매우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제철소를 운영하고 나서 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대만 경제 발전을 이끌던 리궈딩 같은 대만 관료들은 미국과 경제적으로 단단히 통합되는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 계획의 중심에 반도체가 있었다.


댈러스에서 모리스 창은 TI의 동료들에게 대만에 생산 설비를 세우라고 재촉했고, 1968년 7월 TI 이사회는 대만에 새로운 설비를 건설하는 안을 가결시켰다. 1969년 8월 그 공장에서 첫 번째 기기가 조립되어 나오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10억 번째 제품이 출하되었다.

[TI 타이완 공장 55주년 출처 구글 이미지]

반도체 공급망이 경제 성장과 정치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나라는 대만뿐이 아니었다. 1973년,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에서 싱가포르의 "실업을 일소하기 위해" 수출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 아래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세미컨덕터 (National Semiconductors)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에 조립 설비를 건설했다. 다른 칩 제조사도 그 뒤를 따랐다.

[닉슨과 만난 리콴유, 싱가포르 Bendemeer plant 설립 20주년 기념식 출처 구글 이미지]

1970년대 말, 미국의 반도체 기업은 해외에서 수만 명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칩 제조사들과 아시아의 독재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시아 반도체 조립 설비를 채우고 있던 화교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국제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1980년대 초, 전자산업은 싱가포르의 국민총생산(GNP) 중 7퍼센트, 제조업 일자리의 4분의 1을 담당했다. 전자 제품 생산을 놓고 보면 60퍼센트가 반도체 소자였고, 나머지도 반도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제품이었다.


홍콩에서 전자 제조업은 섬유업을 제외하면 그 어떤 산업 영역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페낭, 쿠알라룸푸르, 믈라카에서 반도체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말레이시아 노동자 중 15퍼센트가 반도체로 인해 새로운 제조업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만까지, 싱가포르에서 필리핀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지도 위에 놓고 보면 마치 아시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해당 지역의 군사 기지를 철수한 후에도, 태평양 전역에 흩어진 반도체 공급망은 지속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13장 인터넷 혁명가들


1968년은 혁명의 해처럼 보였다. 베이징에서 베를린을 지나 버클리까지, 극단주의자와 좌파가 기존 질서를 몽땅 들어 엎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해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팰로알토타임스》가 보도한 기사였다. “페어차일드를 떠난 창업자들, 새로운 전자 회사를 차리다.”


밥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페어차일드를 떠나, 직접 전자 공학(Integrated Electronics)을 줄여서 인텔(Intel)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인텔은 창업 후 2년 만에 첫 제품을 출시했다.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dynamic random access memory) 혹은 D램이라 불리는 칩이 그것이었다.


1970년대 이전 컴퓨터는 일반적으로 실리콘 칩이 아니라 전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연결된 작은 금속 링의 매트릭스인 자기 코어(magnetic core)라는 장치를 사용하여 데이터를 "기억"했다. 그런데 자기 코어 메모리는 부품을 손으로 꿰어서 만드는 방식이었기에 수작업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작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1960년대, IBM의 엔지니어 로버트 데나드(Robert Dennard)는 집적 회로가 작은 금속 링보다 더 효율적으로 “기억(remember)"하게끔 하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귀를 덮을 정도로 길고 검은 그의 머리카락은 바깥으로 심하게 뻗쳐서 흔히 떠올리는 괴짜 천재의 모습이었다.


데나드는 작은 트랜지스터를 콘덴서와 짝짓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 결합 소자에 전하가 충전되면 1이고 아니면 0인 것이다. 콘덴서의 전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기 때문에 데나드는 트랜지스터를 이용해 콘덴서를 주기적으로 충전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이렇게 주기적인 충전을 하는 '다이나믹(dynamic)' 랜덤 액세스 메모리D램(DRAM)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로버트 데나드 출처 구글 이미지]

D램은 오늘날까지도 컴퓨터 메모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전류의 도움으로 0과 1을 저장한다는 점에서 D램 칩의 작동 방식은 구형 마그네틱 코어 메모리와 흡사하다. 하지만 D램 회로는 전선과 고리를 엮은 게 아니라 실리콘에 새겨 넣은 것이다. 손으로 꿸 필요가 없으니 고장이 날 가능성이 낮고 훨씬 작게 만들 수도 있다.


노이스와 무어는 데나드의 통찰에 새로 만든 회사 인텔의 운명을 걸었다. 반도체 칩은 그 어떤 마그네틱 코어보다 치밀하게 만들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얼마나 줄여 나갈 수 있을지 파악하려면 무어의 법칙에 따라 그려진 그래프를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D램이 컴퓨터 메모리 산업을 정복할 참이었다.


인텔은 D램 칩 시장을 지배할 계획이었다. 메모리 칩은 기기에 맞춰 특화될 필요가 없으므로 같은 설계를 수많은 종류의 기기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모리 칩을 큰 단위로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기억"이 아닌 "계산(computing)"을 하도록 되어 있는 다른 유형의 칩은 모든 기기마다 각기 다른 연산 과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장비에 맞춰 특별히 설계되어야 한다. 예컨대 계산기는 미사일의 유도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므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다른 종류의 논리 회로를 필요로 했다.


이렇게 개별화된 수요는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텔은 메모리 칩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대량 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밥 노이스는 엔지니어 과제를 풀어야 하는 퍼즐 게임이 보이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메모리 칩에 집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서 수백만 달러의 투자를 받아 새 회사를 차렸지만, 바로 새로운 생산 라인을 추가해 버렸다.


1969년, 비지컴(Busicom)이라는 일본의 계산기 회사가 노이스에게 최신형 계산기를 위한 복잡한 칩 설계를 의뢰했다. 최신 컴퓨터 기술의 집약체가 저렴한 가격에 생산되며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수많은 이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1970년대의 휴대용 계산기는 오늘날의 아이폰과 다를 바 없었다.


신경 회로 연구를 끝으로 학계를 떠나 인텔에 온 테드 호프(Ted Hof)는 부드러운 말투를 지닌 엔지니어였다. 노이스는 테드 호프를 불러 비지컴의 의뢰를 처리하도록 했다. 인텔 직원은 대부분 물리학이나 화학 전공자였고 그들은 칩 안에서 전자가 어떻게 돌아다니는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아키텍처(computer architectures) 전공자였던 호프는 칩이 아닌 컴퓨터의 관점에서 반도체를 바라보았다. 비지컴은 호프에게 각각 2만4000개의 트랜지 스터가 탑재된 칩 12개가 필요하며, 그 칩들 모두가 맞춤형 설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비지컴의 계산기를 고민하던 호프는 맞춤형 논리 회로와 맞춤형 소프트웨어 사이에서 컴퓨터가 맞닥뜨리는 양자택일 문제를 깨달았다. 칩 제작은 개별 기기에 최적화된 회로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주문형 사업이므로 고객은 소프트웨어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은 메모리 칩 분야에서 큰 진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성과는 더욱 커질 전망이었다. 표준화된 로직 칩(logic chip)을 개발하고 강력한 메모리 칩을 탑재하여 각기 다른 과제에 맞게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를 올린다면 다양한 연산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본 호프는 자신의 판단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1971년 인텔은 이 다목적 로직 칩에 4004라는 이름을 붙이고, "칩에 탑재된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의 홍보에 나섰다. 새로운 칩은 일반적인 연산 기능을 제공하며 수많은 다양한 유형의 장비에 사용 가능했다.

[인텔 4004 칩과 테드 호프 출처 구글 이미지]

14장 펜타곤의 상쇄전략


앤드류 마셜(Andrew Marshall)* 같은 전략가들은 소련의 양적 우위에 맞서는 유일한 답은 "질적으로 더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는 것뿐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한가?


마셜은 일찌감치 1972년부터 미국이 컴퓨터에서 "실질적이고 영속적인 우위를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적어 두었다. 마셜은 거의 완벽한 정확도로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병기를 그려 보면서 미사일에 "신속한 정보 수집", "정교한 명령과 제어" 및 "종말 유도"를 구상했다. 마셜은 여기에 승부를 걸었다.

[앤드류 마셜과 학자 로버타 월스테터의 저택에서 토론을 벌이고 있는 이른바 ‘성 앤드루 학당 동창회’ 멤버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셜은 1973년 국방장관 직속의 싱크탱크인 총괄평가국(ONA) 초대 국장에 취임한 후 2015년 93세 때 공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42년간 이 조직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1949년에 들어간 국책기관 랜드연구소(RAND) 재직 기간을 포함하면 무려 66년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그는 대통령 8명, 국방장관 13명에게 각종 안보 전략을 제공했다. 그의 경력을 두고 미국과 유럽에선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에 비유했고, 옛 소련에선 ‘펜타곤의 추기경’, 중국에선 ‘은둔의 제갈량’, 일본에선 ‘전설의 전략가’로 불렀다. [출처: 서울신문]


윌리엄 페리는 연산력의 소형화 덕분에 마셜의 미래 전쟁 구상이 머잖아 실현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혁신에 친숙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만든 회사의 기기에 인텔 칩을 사용하고 있었다.


페리가 볼 때 미국은 이런 칩을 미사일에 탑재함으로써 소련을 훌쩍 앞질러서 승부를 내야 했다. 페리의 추론에 따르면 유도 미사일은 단지 소련의 양적 우위를 "상쇄(offset)"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었다. 유도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엄청난 비용의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페리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펜타곤이 배치할 예정인 3000기의 순항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 모스크바는 5년에서 10년, 300억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터였다.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소련은 날아오는 미사일 중 고작 절반가량만 요격할 수 있다. 앤드류 마셜이 찾고 있던 기술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윌리엄 페리 출처 구글 이미지]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과 손을 잡은 페리와 마셜은 펜타곤이 신기술에 큰 투자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유도 미사일에 집적회로를 이용하며, 인공위성을 별자리처럼 깔아서 지구 위 어느 지점이건 겨냥할 수 있게끔 하고, 가장 중요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의 시동을 거는 등, 그런 작업을 통해 미국이 기술 첨단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해럴드 브라운 출처 구글 이미지]

페리가 주도하는 가운데 펜타곤은 미국의 마이크로 전자 기술 우위에 방점을 둔 새로운 무기 체계 개발에 돈을 퍼붓기 시작했다. 순항 미사일부터 포탄까지 모든 발사체를 유도 무기로 전환하는 페이브웨이 정밀 무기 프로그램이 발족했다.


소형화된 컴퓨터가 연산력을 제공하면서 센서와 통신 기술 역시 한 단계 도약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적의 잠수함을 탐색하고자 할 때 군의 음향 전문가들은 충분한 연산력을 확보한다면 먼 거리에서도 고래와 잠수함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었다.

[페이브웨이 미사일 출처 구글 이미지]

유도 무기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 토마호크(Tomahawk) 미사일 같은 새로운 체계는 페이브웨이보다 훨씬 복잡한 유도 체계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레이더를 이용해 지상을 스캔하고 미사일의 컴퓨터에 미리 입력되어 있는 지형도와 대조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경로를 이탈한 미사일도 알아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유도 체계 이론은 수십 년 전에 등장했지만, 순항 미사일에 탑재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강력한 칩이 등장한 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토마호크 미사일 출처 구글 이미지]


<2편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돈의 심리학 (최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