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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13. 2024

로마인 이야기 2권 (3)

한니발 전쟁 - 스키피오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제2차 포에니 전쟁 후기
기원전 210년~기원전 206년


칸나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지 6년째인 기원전 210년, 이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 사람 가운데 마르켈루스가 파견된 곳은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 지방이고, 레비누스(Marcus Valerius Laevinus)가 파견된 곳은 시칠리아였다.

[마르켈루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10년을 고비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도권은 이제 분명히 로마 쪽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도록 도와준 것은 기회를 활용할 줄 몰랐던 카르타고 본국의 지도자들이었다. 로마가 집정관까지 보낸 시칠리아에 대해, 카르타고 본국은 적극적인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 전선


기원전 210년, 가장 화려하게 싸움이 벌어진 전선은 한니발과 마르켈루스가 대결한 이탈리아 남부 전선이었다. 타란토를 시야에 두고 맞붙은 이 전선에는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2개 군단과 전직 집정관 켄투마르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투입되어 있었다.


맨 먼저 한니발과 대결한 것은 켄투마르스였지만, 그는 한니발의 적수가 아니었다. 로마군은 여지없이 패배하여 병력의 5분의 4를 잃고, 전직 집정관은 전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칼’은 이미 60세가 되었는데도, 37세의 카르타고 장군에게 그리 호락호락 먹이가 되지는 않았다.


한니발과 마르켈루스 사이에 지난해처럼 쫓고 쫓기는 경주가 재개되었다. 이기건 지건 마르켈루스의 천막 위에는 전투 개시를 알리는 붉은 ‘투니카’(가운 같은 겉옷)가 계속 펄럭였다. 61세가 된 ‘이탈리아의 칼’은 38세인 카르타고 장군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집요하게 싸움을 걸었다.

[로마 투니카 출처 구글 이미지]

한니발은 “오오, 신이시여. 저 사람한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나이다……. 이기면 기세가 오르고, 지면 수치라고 생각하는 저 사람한테는, 승리도 패배도 전의를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까?”라고 말하며 난감해했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전투 결과를 종합하면, 3 대 2의 비율로 한니발이 우세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의 집요함과 병사들의 희생도 허사는 아니었다. 마르켈루스가 이런 식으로 한니발의 행동을 방해하고 있는 동안, 파비우스의 2개 군단이 타란토 공략에 성공한 것이다.


지원도 못한 채 타란토를 빼앗겨버린 한니발은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떠났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마르켈루스의 죽음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거점인 칼라브리아 지방을 공격하고 있는 동료 집정관 크리스피누스에게 북상을 요구했다. 두 군대가 합류하여 한니발과 결전을 벌이자는 것이다. 크리스피누스는 2개 군단을 이끌고 달려왔다. 서로 합류한 두 집정관은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싸움을 걸었다.


이 전투에서 '어이없게' 마르켈루스는 성급하게 220명만 기병만을 데리고 적진을 정찰하러 나갔다가 누마디아 기병을 만나 적병이 내지른 창에 가슴을 찔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집정관을 경호하고 있던 12명의 호위병도 모두 전사했다. 동맹국 지휘관 두 명도 전사했다. 남은 집정관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고, 역시 부상한 마르켈루스의 아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한니발은 적장 마르켈루스의 시신을 예우를 갖추어 로마 양식으로 장중하게 화장으로 장사 지낸 다음 유골은 작은 황금 상자에 담아 아들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황금 상자에 눈이 먼 병사들이 다투는 바람에 유골함이 깨져 마르켈루스의 유골은 바람에 날라가 버렸다고 한다;;;

[마르켈루스 주화와 로마의 마르켈루스 극장 출처 구글 이미지]

에스파냐 전선


카르타헤나 기습 작전


기원전 209년 25세의 스키피오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실레누스에게 에브로강 이북의 타라고나에 남아서 본진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에브로강 이남에 있는 카르타고군과의 싸움은 자기에게 일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실레누스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와 동시에 스키피오의 친구이자 부사령관인 라일리우스(Gaius Laelius)도 병사들을 태운 30척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타라고나에서 카르타헤나까지는 보통 20일 거리지만, 스키피오는 강행군으로 이 거리를 소화하여 출발한 지 7일 후에는 벌써 카르타헤나의 성벽 앞에 도착해 있었다. 카르타헤나에서 열흘 거리에는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제1군이 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가 이렇게 빨리 게다가 적의 본거지를 맨먼저 공격해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카르타헤나는 카르타고 식민지인 에스파냐의 수도로서 기원전 228년에 건설한 도시다. 둘레가 4킬로미터쯤 되는 곳을 활용하여 세워진 항구도시로서,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열려 있고 서쪽은 석호에 면해 있고 북쪽만 육지와 이어져 있었다. 한니발은 19세 때부터 이탈리아로 쳐들어갈 때까지 10년 동안 이 성에서 살았다. 한니발 일가에게는 카르타고 본국보다 여기가 더 정든 집이었 다.

[카르타헤나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카르타헤나의 방어는 4천 명의 수비대가 맡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헤나가 있는 곶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에게 휴식도 주지 않고, 곶의 북쪽을 가로막고 있는 성벽과 평행으로 공격을 위한 기다란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또한 이 무렵 군선을 이끌고 남하한 라일리우스가 카르타헤나의 동쪽과 남쪽을 봉쇄하여 해상 봉쇄가 끝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곳의 서쪽에 펼쳐져 있는 석호(潟湖, 바다와 격리된 호수)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곶의 북쪽에서는 정석대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수비대는 로마군이 공격해올 수 있는 것은 이 방면뿐이라고 생각했고 이 북쪽 방어에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스키피오는 미리 선발해둔 2천 명의 병사를 모아 수비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쪽으로 돌아갔다. 수집한 정보를 통해, 카르타헤나 서쪽의 석호에 차 있는 바닷물은 오후가 되면 석호의 수심은 발목을 적실 정도로 얕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습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공격을 받고 수비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쪽 성벽도 당장 돌파당했다. 단 하루의 전투로 스키피오는 적의 거점이자 카르타고 본국과의 중요한 연락지점인 도시를 함락해버린 것이다. 카르타고군이 달려올 틈도 주지 않은 전격작전의 성과였다.

[스키피오의 카르타헤나 공격 출처 본문]

스키피오는 에스파냐의 카르타고인이 취한 방식과는 반대로, 온정주의 노선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항복한 수비대와 주민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들을 남자와 기능공과 아녀자로 나누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즉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몸값도 요구하지 않고 노예로 삼지도 않은 이 조치에 사람들은 모두 감격했다.

남자들 가운데서는 나이가 젊고 체격도 건장한 사람들만 골라, 로마 군의 노잡이로 배정했다. 다만, 에스파냐에서 카르타고 세력이 일소되면 그들에게도 귀가를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노약자한테는 즉시 귀가가 허락되었다. 기능공은 2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스키피오의 관대한 조치에 고마움을 느낀 장로들이 이미 약혼자가 있는 유난히 아름다운 처녀를 스키피오에게 바치고 싶다고 제의했다. 26세의 승리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기쁜 선물이 없지만, 전쟁을 하고 있는 사령관으로서는 이렇게 곤란한 선물도 없소이다.” 이렇게 말한 뒤, 그는 아가씨를 약혼자에게 돌려보냈다. 모두들 또다시 감격했다.

[아가씨를 돌려보내는 스키피오 출처 구글 이미지]

바이쿨라 - 제5회전


카르타헤나의 함락에도 불구하고 열흘 거리에 있는 하스드루발의 카르타고군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기원전 208년 봄과 함께 스키피오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로마에서 돌아와 다시 그의 오른팔이 된 부사령관 라일루이스는 해군을 맡았다. 그에게는 군선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돌아가 카디스 근처에 있는 한니발의 막냇동생 마고의 군대를 묶어두는 임무를 부여했다.


하스드루발이 카르타헤나에서 열흘 거리에 있는 바이쿨라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동생 마고의 군대와 합류한 뒤에 스키피오와 대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착한 것은 마고가 아니라 올해도 속공을 펴기로 마음먹은 스키피오였다.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마고 바르카 출처 구글 이미지]

27세의 사령관은 강 건너편에 우뚝 솟은 견고한 적진을 보고 아군한테는 불리한 지형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신속하게 로마 경무장 보병 전원과 에스파냐 원주민 참가병들에게 우선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겨우 평원에 포진을 끝낸 적의 전위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이것은 본대의 출전을 재촉하는 미끼였다. 하스드루발은 이 미끼에 덤벼들었다.


스키피오는 평원으로 몰려나온 적의 본대가 진형을 갖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강 이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무장 보병과 기병 전원이 노도처럼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우익은 스키피오가 좌익은 마고를 묶어놓고 막 합류한 라일리우스가 지휘했다. 이 양군이 이제 막 진형을 갖추고 있는 적의 본대 측면으로 돌아갔다.


격전이었지만, 전투의 주도권은 계속 스키피오가 쥐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은 상징인 코끼리 부대와 우수한 기병대도 제대로 활용해보지 못하고 격퇴당했다. 적의 주력을 무력화하는 것은 전술의 가장 중요한 요체다. 스키피오는 이 전술을 멋지게 전개했다. 하스드루발은 바이쿨라 마을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도망쳤다

[바이쿨라 회전의 포진 출처 본문]

바이쿨라 전투라고 부르는 이날 회전에서 카르타고 쪽 전사자는 8천 명에 이르렀고, 포로는 1만 2천 명이었다. 스키피오는 포로들 가운데 에스파냐인만은 몸값도 요구하지 않고 석방했다. 카르타고인 포로는 로마로 보냈다. 로마에서 노예가 되는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었다.


포로 가운데 한 소년이 있었다. 고향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라고 한다. 부모를 여의고 젊은 삼촌을 찾아 에스파냐에 온 소년은 삼촌의 이름이 마시니사라고 말했다. 스키피오는 소년에게 삼촌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스키피오는 그 소년에게 로마식 ‘투니카’와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말 한 필을 내주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기병들에게 그 소년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라고 말했다. 27세의 젊은이는 로마 장군들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기 위한 포석을 두었던 것이다.

[마시니사 조카를 돌려보내는 스키피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스두르발의 이탈리아 지원


달아난 하스드루발에게 달려간 마고와 시스코네는 하스드루발과 함께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이탈리아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한니발의 상태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스두르발이 이 기회에 아예 3만 명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류한다. 남은 마고와 시스코네는 병력을 합쳐, 앞으로는 공동 투쟁 체제로 스키피오를 공격한다.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을 피해 내륙지방을 우회한 지점에서 피레네산맥을 넘고 한니발이 지나간 길을 따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 무렵 로마에서는 기원전 207년의 집정관으로 클라우디우스 네로(Gaius Claudius Nero)가 선출되었고, 집정관 리비우스는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막기 위해 리미니에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메타우로 - 제6회전


하스드루발의 전령을 받은 한니발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스드루발이 알프스를 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걸로 예상하고 칼라브리아를 떠나 느린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네로가 이끄는 로마군이 마치 마르켈루스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추격해왔다.


한편 이렇다 할 어려움도 없이 한니발의 예상보다 빠르게 이탈리아에 들어온 하스드루발은 쉽게 고용한 갈리아 병사들을 포함하여 5만으로 증강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지만, 행군하기 쉬운 평원을 택했다. 적의 허를 찌르지 않았던 것이다.


포강 유역의 평야를 지나 리미니로 가는 도중에, 하스드루발은 처음으로 형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섯 명의 기사가 가지고 떠난 그 편지에는 그가 택할 길목과 합류 예정지점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니발이 있는 곳을 찾고 있다가 로마 병사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을 붙잡은 백인대장은 압수한 편지가 페니키아어로 씌어 있는데다 여섯 명이나 되는 기사의 소지품을 보고, 중요한 편지라고 직감했다. 그는 당장 편지를 집정관 네로에게 가져갔다.


이때 네로는, 아드리아해 연안과 가까운 풀리아 지방에 있었는데, 이 편지를 읽자 집정관 리비우스를 지원하러 6천 명의 보병과 1천 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몰래 야밤에 진영을 빠져 나갔다. 며칠후 네로가 갑자기 리비우스 진영에 합류한 것을 본 하스드루발은 예정된 진로를 바꿔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이탈리아 중부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플라미니아 가도는 해안 지방에서는 평탄하지만, 산지로 접어들면 코끼리까지 거느린 대군은 싸움이 벌어졌을 때 불리해진다는 것을 하스드루발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형과는 달리, 정보 수집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로마 플라미니아 가도(파란색) 출처 구글 이미지]

5만 병력의 적군이 플라미니아 가도로 향하는 것을 보고, 로마군은 당장 뒤를 쫓았다. 로마군은 메타우로강 어귀에 펼쳐져 있는 평원이 끝난 지점에서 적을 따라잡았다. 하스드루발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돌아서서 싸움에 응하기로 했다. 로마군이 하룻밤 사이에 늘기는 했지만, 5만 명을 거느린 그가 전력에서는 단연 우세했다.


싸움의 실마리는 로마 병사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함성으로 열렸다. 그런데 벼랑에 부딪혀 두 배나 큰 메아리로 돌아온 이 함성에 놀란 코끼리들이 아군인 카르타고군 속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하스드루발은 코끼리 부대의 전선 이탈을 명령한다. 코끼리를 부리는 병사들은 코끼리의 귀 뒤를 침으로 찔러 죽였다.


이 혼란을 틈타 네로는 지휘하고 있던 우익 병력을 이끌고 전선을 떠나, 아군의 배후를 우회하여 적의 우익 옆으로 돌아갔다. 메타우로강기슭까지 바싹 다가간 곳에서 방향을 돌려, 적의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한 것이다. 이것이 전투 결과를 결정했다.


왼쪽은 언덕에 막혀 있고, 뒤에는 오르막길인 플라미니아 가도밖에 없는 곳에서 포위된 카르타고군은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을 받아, 갈리아 병사들이 먼저 무너졌다. 포위망이 좁혀짐에 따라 단말마(斷末摩, 죽기 직전의 고통)의 비명도 늘어났다. 하스드루발이 에스파냐에서 데려온 3만 병력이 전멸했다.


전투 결과가 분명해지자,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군 총사령관의 정장으로 갈아입은 다음 적군 한복판으로 말을 달려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아들이자 한니발의 동생이라는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죽었다.”

[메타우로 회전의 양상 출처 본문]

한니발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것은 진영을 둘러싼 울타리 건너편에서 던져진 꾸러미를 보았을 때였다. 꾸러미를 펼치자, 안에서 하스드루발의 목이 나타났다. 이것이 한니발에게는 11년 만에 이루어진 동생과의 안타까운 재회였다.


그날 밤 사이에 한니발은 진영을 떠나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초여름이니까, 전쟁을 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40세가 된 희대의 전술가는 ‘장화 발부리’에 틀어박힌 채 그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거기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의 목을 확인한 한니발 출처 구글 이미지]

에스파냐의 일리파 - 제7회전


이듬해인 기원전 206년, 에스파냐의 카르타고군은 총력을 기울여 반격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에스파냐에서 바르카 가문의 세력을 지키는 의무는 마고가 짊어지게 되었다.


이 의무를 강하게 의식한 마고는 카르타고 세력을 결집하여 총반격에 나서기 위해, 총지휘를 시스코네에게 양보하는 타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합쳐서 7만 명에 이르는 보병은 총사령관이 된 시스코네가 지휘하게 되었다.


이 병력을 에스파냐에서도 남쪽에 있는 오늘날의 세비야 근처의 일리파에 집결시켜 적을 기다리게 되었다. 적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가진 쪽으로서는 전투에 호소하는 편이 유리하다. 일리파는 코끼리와 기병과 많은 병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넓이를 가진 평원이었다.

[세비야와 일리파 전투 위치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군의 진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중앙에는 비주력부대인 에스파냐 병사들이 조금 뒤로 물러난 곳에 배치되었다. 주력부대인 로마 중무장 보병이 그날은 좌우로 양분되어, 에스파냐 보병대의 양옆을 지키는 형태가 되었다.


카르타고군은 일제히 정면에 있는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로마군에서 정면을 향해 돌격한 것은 중앙에 있던 에스파냐 보병뿐이었다. 좌우로 나뉘어 포진해 있던 중무장 보병은 비스듬한 진형을 만들어서 적의 양쪽 보병을 비스듬히 옆에서 공격했다. 스키피오는 아군의 최강 전략이 적군의 가장 취약한 전력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일리파 회전 당일 스키피오의 포진 출처 본문]

이 전선에서 승패가 먼저 판가름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코끼리들도 경무장 보병이 쏘아대는 화살을 뒤집어쓰고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란에 빠진 카르타고군 기병을 로마 기병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리파에서 전투략을 충분히 발휘한 것은 로마군 기병 쪽이었다.


우선 바깥쪽에 있는 적병을 공격하고, 다음에는 그 안쪽에 있는 적병을 공격하고, 그다음에는 더 안쪽에 있는 적병을 공격한 로마군의 단계적 공격이 효과를 거두어, 아직도 건제한 적의 전력은 카르타고군의 주력부대인 아프리카 용병들뿐이었다. 하지만 앞쪽과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계속 싸울 용병은 아무도 없다.


카르타고의 7만 4천 명의 병력 가운데 남은 것은 6천 명뿐이었다. 총사령관 시스코네도, 한니발의 동생 마고도 퇴로를 차단당한 카디스로 도망치지 못하고, 먼 서쪽의 대서양 연안까지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마시니사만이 적진을 돌파하여 카디스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29세의 승리자는 카디스로 도망친 마시니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회담을 제의했다. 스키피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병 전력의 증강이었다. 이렇게 생각한 스키피오가 손을 내민 어제까지의 적은 마시니사만이 아니다. 그와 대립관계에 있는 누미디아의 왕 시팍스에 대해서도 병행하여 외교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스키피오한테서 각각 동맹을 제의받은 누미디아인은 둘 다 지금까지 카르타고와 맺고 있던 돈독한 관계 때문에 당장 스키피오한테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드는 던져졌다. 스키피오가 던진 이 카드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기원전 206년 겨울, 스키피오는 제패한 에스파냐를 방위하기 위해 2개 군단을 남겨놓고, 오랫동안 이 땅에서 싸운 고참병들과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났다. 4년 만의 귀국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


집정관이 된 스키피오


로마로 돌아온 스키피오는 우선 원로원에서 전황을 보고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로마 장군한테는 최고의 영예인 개선식을 단념했다. 그렇게 해놓고 이듬해인 기원전 205년에 집정관에 출마하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원로원에 요구했다.


집정관의 자격 연령은 40세이므로, 이듬해에 30세가 되는 스키피오는 10세나 모자란다.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집정관 출마에 당연히 난색을 보였다. 그러나 원로원 밖에서는 모든 식민도시와 동맹국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이 로마에서 열리는 민회에 참석하여 그에게 표를 던지려고 예년보다 훨씬 많이 수도로 모여들었다.


민의가 이럴진대, 원로원도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키피오는 집정관에 출마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민회는 압도적 다수로 그를 선출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임지를 북아프리카로 결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다름 아닌 파비우스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집정관이 된 이상, 스키피오의 임무는 아프리카로 가는 게 아니라 이탈리아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한니발을 공격하는 거요. 북아프리카를 공격하면 한니발도 이탈리아를 떠날 거라지만, 반드시 떠난다는 보장은 없잖소.”


시칠리아로 간 스키피오


결국 스키피오의 임지는 시칠리아로 정해졌다. 로마의 속주인 시칠리아라면, 방어전으로 규정되지 않은 경우에는 이탈리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집정관의 임지로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로 가는 스키피오는 그 이듬해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경우 아프리카에 갈 권리도 인정받았다.


기원전 205년 봄, 일찌감치 시칠리아에 들어간 젊은 집정관은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당장 군단 편성에 착수했다. 당장 6,2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이 그의 휘하에 모였다. 개중에는 에스파냐에서 함께 싸운 귀환병들도 적지 않았다. 시칠리아에는 이미 칸나이 패잔병을 주축으로 한 2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속주민들에게 몰수된 토지를 돌려주었다. 스키피오에게 고마움을 느낀 그들은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병역에 지원했다. 이에 따라 2만 5천 명의 병사와 1만 2천 명의 선원이 스키피오의 휘하에 모였다. 시칠리아 전체를 보급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스키피오의 기질은 이 동안에도 줄곧 발휘되었다. 칼라브리아 지방의 항구도시 로크리가 내통에 의해 로마 쪽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정보를 얻은 스키피오는 당장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갔다. 하지만 한니발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스키피오가 로크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로크리 출처 구글 이미지]

이듬해인 기원전 204년 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단의 지휘권을 인정받은 스키피오는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 서쪽 끝에 있는 마르살라를 떠났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오랜만에 로마 대군을 보고 당황해하는 카르타고인들을 곁눈질하며 카르타고 제2의 도시인 우티카 근처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 즈음 스키피오에게 누미디아의 왕 시팍스가 스키피오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결정적으로 카르타고 쪽에 붙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한 시스코네 장군의 절세미녀 딸을 왕비로 주어 시팍스 왕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딸은 원래 마시니사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마시니사와 파혼시키고 시팍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시팍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시니사의 전향


스키피오가 희망을 걸고 있던 또 한 사람의 누미디아인인 마시니사는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시팍스에게 왕국을 침략당하여, 약혼녀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왕국조차 없는 이름뿐인 왕으로 몰락해 있었다.

[마시니사와 누마디아 표식 출처 구글 이미지]

200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스키피오 앞에 나타난 마시니사는 사막의 외로운 늑대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풍모를 허물어뜨리지도 않고 스키피오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대는 2년 전에 나와 동맹을 맺고 싶어 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나 자신밖에 없소이다.”


스키피오는 속으로는 낙담했겠지만, 그런 내색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오.” 이 순간, 34세의 누미디아인과 31세의 로마인 사이에 사나이의 우정이 싹텄다. 그 후 스키피오의 전략·전술은 스키피오와 마시니사에다 지금까지 모든 전선을 스키피오와 함께 담당해온 라일리우스를 더한 30대 남자 세 사람의 공동 작전으로 실현되었다.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공한 첫해는 한니발의 경우와는 반대로 전과가 빈약한 해였다. 카르타고 제2의 도시인 우티카 공략전도 실패하여 40일 만에 포위를 풀었다. 전과가 빈약해진 가장 큰 이유는 카르타고 쪽이 로마군을 맞아 싸울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203년 초여름에 누미디아 왕국과 가까운 내륙 평원에서 카르타고군과 누미디아군이 합류했다. 이런 소식을 보고받은 스키피오는 적이 공격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전체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의 합류 지점으로 갔다. 로마군의 병력은 연합군의 절반도 안 되었지만, 스키피오는 정면 대결로 승부를 낼 작정이었다.


정석대로라면 경무장 보병끼리의 격돌로 싸움의 실마리가 열려야 하지만, 여기서는 로마 기병의 맹공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팍스가 이끄는 우수한 누미디아 기병의 전투력도 로마 기병한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기세를 잃었다. 누미디아 기병이 저도 모르게 후퇴하자, 로마 기병은 계속 추격했다. 그래서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보병 군단의 양옆이 완전히 비어버렸다.

[일리파 회전 초기 배치 출처 본문]

스키피오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시칠리아에 있을 때부터 충분한 훈련을 쌓은 보병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적군 중앙부대의 공격을 경무장 보병과 중무장 보병 전위부대인 ‘하스탈리’가 막아내고 있는 동안, 중무장 보병 중앙부대인 ‘프린키페스’는 적군 보병의 우익으로 돌아가고, 중무장 보병 후위부대인 ‘트리알리’는 좌익으로 돌아갔다.


삼면을 포위당한 적군 보병은 움직일 여지마저 자꾸만 좁아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에스파냐에서 방금 도착한 4천 명의 용병들은 전멸하고, 다른 보병도 대부분 죽어서 전쟁터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일리파 회전 최종 상황 출처 본문]

마시니사와 소포니스바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가 이끄는 로마 기병은 시팍스를 따라 누미디아 영토 안으로 침입했다. 시팍스는 결국 따라잡혀 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왕궁에 들어간 마시니사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소포니스바 왕비였다. 마시니사에게는 과거의 약혼녀다. 마시니사는 망설이지 않고 소포니스바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왕국이 없는 왕이 아니었다.


마시니사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그를 맞은 스키피오는 왕국 탈환에 대해서는 축하했지만 적의 아내와 결혼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32세의 로마 장군은 세 살 위인 누미디아 친구에게 말했다.


“시팍스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카르타고 쪽에 붙었으니, 로마로 압송하지 않으면 아니 되오. 왕이 로마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그 왕의 소유물도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오. 소포니스바만 예외로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소. 따라서 소포니스바도 로마로 호송하지 않으면 아니 되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내 마음의 벗인 그대의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소.”


말없이 스키피오 앞에서 물러난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에 두고 온 아내에게 편지 한 통과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인편에 보냈다. 소포니스바는 편지를 다 읽은 다음 독배를 마셨다. 그녀가 남긴 말은 남편의 결혼 선물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겠다는 한마디뿐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내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첫 번째 의무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소. 그리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제, 나는 두 번째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구려. 그것은 아내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편지와 함께 보낸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소.”

[독배를 마신 소포니스바 출처 구글 이미지]

한니발의 카르타고 귀환


자국 영토 안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패배를 맛본 카르타고는 그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탓도 있어서 완전한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정부 안에서도 의견이 갈라져, 통일된 방침도 세우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본국 귀환을 명령하는 정부의 공식 문서를 가진 사절이 한니발이 있는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토네와 마고가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에 급파되었다. 동시에 스키피오한테도 사절이 파견되어 강화를 맺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시점에서 스키피오는 진심으로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해에 한니발은 44세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지 16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니발이 귀환 명령을 받은 크로토네(Crotone) 항구에서 남쪽으로 뻗은 곶 위에 헤라 신전이 서 있다. 44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귀국을 앞두고 이 신전의 제단 벽에 글씨를 새긴 동판을 박아넣으라고 명령했다. 동판에는 한니발이 에스파냐를 떠난 이후에 거둔 전과가 모두 기록되었다.

[크로토네의 헤라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카르타고로 귀환하면서 한니발은 1만 5천 명의 병력만 데려가기로 했다. 에스파냐를 떠났을 때부터 그와 행동을 함께한 2만 6천 명의 병사들도 16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차츰 줄어들어 8천 명만 남았을 뿐이라고 한다. 그 8천 명을 우선 데려간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집에는 축하인사를 하러 찾아오는 원로원 의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가 맞이한 최악의 시기를 지구전법으로 이겨낸 이 노장은 그러나 한니발의 철수를 안 지 한 달 뒤에 생명의 불꽃이 다 타버린 것처럼 죽었다. 향년 72세였다.


자마 - 제8회전


그런데 강화를 위한 휴전기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사르데냐에서 스키피오에게 보낸 보급선단이 태풍을 만나, 수도 카르타고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으로 피난했다. 카르타고인은 이 선단을 나포하여 수도 항구로 예인했다. 이것을 안 스키피오는 당장 반환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들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카르타고 장로회의의 의견이 갈라져 있을 때, 한니발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것이 카르타고인들의 태도를 강경한 쪽으로 돌려놓았다. 장로회의는 스키피오의 항의와 요구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강화 따위는 아무도 입밖에 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스키피오도 전쟁 재개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이동 경로 출처 본문]

자마에 도착한 한니발은 적이 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나라가라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은 적정을 정찰하러 세 명의 척후병을 내보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로마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스키피오는 척후병에게 너희 진영으로 돌아가 한니발에게 모든 것을 보고하라면서, 기병대의 호위를 붙여 세 사람을 도중까지 바래다주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회담


자마로 돌아온 세 사람은 한니발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로마군에 관한 보고 외에 스키피오의 언행도 보고했다. 한니발은 그 보고를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보고가 끝나자 스키피오에게 회담을 제의하는 사절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비슷한 재능을 가진 장군끼리의 대결도 드문데, 하물며 그 두 사람이 대회전 전날 회담한 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회담을 제의한 한니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중한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다가오는 위험에 굳이 맞서겠소. (……) 그래서 나는 제안하고 싶소. 로마인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 지금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다툼거리가 된 모든 지방의 정식 소유자가 되는 거요. 카르타고인은 이런 지방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두 번 다시 전쟁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겠소.“


한니발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제는 그보다 12세나 연하인 스키피오가 입을 열 차례였다.

“이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쪽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장군께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오. 만약 로마군이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에 장군께서 자발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면, 그리고 내가 제안한 강화 교섭이 결렬되기 전이었다면, 장군의 제안은 장군께서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졌을 거요. 한니발 장군, 장군께는 내일의 전투를 준비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소.”

[회담을 하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02년,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자마와 나라가라의 중간에 펼쳐진 평원 전체에 양군의 포진이 끝났다. 한니발이 총지휘를 맡고 있는 카르타고군의 전력은 보병 4만 6천 명에 기병이 4천, 합해서 5만 명이다. 거기에 코끼리 80마리가 가세했다. 누미디아 기병 2천을 이끌고 참전하겠다고 약속한 시팍스의 아들은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한편, 스키피오가 총지휘를 맡고, 라일리우스가 좌익, 마시니사가 우익을 맡고 있는 로마군의 전력은 마시니사 휘하의 누미디아 병사를 합하여 보병 3만 4천 명에 기병 6천 명, 합해서 4만 명이다.


전체 전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려면 기동성이 풍부한 기병 전력이 필수적인데, 그 전력이 부족한 것이 자마에 포진한 카르타고군의 실정이었다. 한니발은 선두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배치하고, 두 번째 대열에는 보병 1만 2천으로 이루어진 용병 혼성군을 배치했다.


세 번째 대열에는 소수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아프리카와 마케도니아 용병인 1만 9천 명의 보병을 배치하고,이 보병대 양쪽 옆에는 기병을 2천 명씩 배치했다. 후방으로 200미터나 떨어진 전선에는 한니발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1만 5천 명의 정예병력을 배치했다.


지금까지 대결했던 로마 장군들이 상대였다면, 이 전술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로마인이면서도 로마인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로마인의 허를 찔렀지만, 스키피오는 그 카르타고인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전개했다.

[자마 회전 초기 배치 출처 본문]

스키피오도 누미디아 병사를 포함한 3만 4천 명의 보병 군단을 중앙에 배치했다. 하지만 자마에서는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이 없는 전술을 도입했다. 자마에서 스키피오는 경무장 보병도 소대 단위로 편성했다. 이 경무장 보병소대를 중무장 보병소대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싸움은 로마군의 좌익과 우익에 배치된 기병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당장 코끼리 부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하는 코끼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스키피오의 명령대로 경무장 보병소대는 중무장 보병소대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이리하여 가로로 길게 이어진 느낌이었던 로마군의 전열에 소대별 간격이 생겨났다. 이 통로가 코끼리의 돌진력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스키피오의 보병 배치 출처 본문]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쟁터 한복판에서는 양군의 보병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중무장 보병 2만 2천 명과 누미디아 병사 6천 명을 합하여 2만 8천 명에 이르는 로마군에 대해, 한니발은 첫째와 둘째 대열의 병사를 합친 3만 1천 명을 투입했다. 병력으로는 카르타고가 우세하지만, 전투력은 로마군이 우세하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가 시작된 직후부터 과감한 공세로 나온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의 로마군 기병이 그 무렵에는 이미 카르타고 기병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카르타고군 중앙의 양옆이 완전히 비어버렸다는 뜻이다.


스키피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로마군 중무장 보병에게 정면과 양옆의 세 방면에서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의 주력이 세 방면에서 공격하자, 혼성군인 카르타고 용병들은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죽은 적병들이 흘리는 피로 풀밭이 미끄러워졌다. 적의 시체가 로마군의 전진을 방해할 정도였다.

[자마 회전 중반 양상 출처 본문]

한니발은 로마 병사들이 지친 지금이야말로 카르타고군의 주력을 투입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싸움에 투입하지 않고 대기시켜둔 정예병력 1만 5천에게 대형을 짜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33세의 로마 장군은 다른 장군이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일을 감행했다. 다가오는 적을 앞에 두고, 군대 전체에 진형을 다시 짜라고 명령한 것이다.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우선 부상자를 후방으로 운반하여 경무장 보병이나 누미디아 보병에게 맡기고, 적병의 시체를 옆으로 치웠다.


그런 다음, 지금까지 종대로 싸우고 있던 ‘하스탈리’와 ‘프린키페스’와 ‘트리알리’가 다음의 그림에서처럼 활 모양의 횡대로 진형을 바꾸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적의 고참병 부대에 대해, 그동안의 싸움으로 지치긴 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아군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스키피오의 모든 보병이 다시 세 방향에서의 포위망을 완성했을 때, 적군 기병을 격파한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의 기병대가 싸움터로 돌아왔다. 14년 전에 칸나이 평원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상태가 자마 평원에서 재현되었다. 다만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45세의 고대 최고의 명장은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한 부하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만 5천 명의 한니발 전사들은 이 자마에서 전멸했다. 한니발 자신은 기병 몇 기만 거느린 채 하드루메툼으로 도망쳤다. 로마 쪽 전사자는 1,500명.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였다.

[자마 회전 최종 양상 출처 본문]

하드루메툼으로 도망쳤던 한니발이 도착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장로회의 구성원들 앞에서, 패장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로마와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마에서 승리하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돌아가고 있는 스키피오에게 강화 제의가 전해졌다. 스키피오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주요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로마는 앞으로 카르타고를 독립된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카르타고 국내의 자치권을 존중한다.
  2.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에스파냐에 있는 카르타고 해외 영토의 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한다.
  7. 앞으로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안팎을 불문하고 어디서든 로마의 승인 없이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카르타고는 강화를 승인했다. 로마에서도 원로원과 민회가 추가 주문도 하지 않고 단번에 승인했다. 16년 만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그 후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마침내 끝을 내렸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장군들의 경로와 전투 출처 본문]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기원전 200년~기원전 183년


자마 전투의 영웅 스키피오의 개선식이 남긴 여운도 사라지지 않은 로마에 아테네를 선두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대표가 찾아왔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행동을 침략이라고 비난하고, 로마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원로원의 이 같은 결정에 민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로마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서라 해도 군대를 파견하는 데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기원전 200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갈바가 연단에 올라가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가 지금 아테네에 대해 하고 있는 짓은 19년 전에 한니발이 사군토에 대해 한 짓과 똑같지 않은가.” 당시 로마가 미연에 대응하지 않아 한니발의 공격을 받았듯이 마케도니아도 초기에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정관 갈바의 연설이 끝난 뒤에 실시된 재투표에서, 민회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로마의 개입을 알게 된 마케도니아의 왕은 아테네에 바싹 다가가 있던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군사행동을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침략 목표를 동쪽의 페르가몬 왕국과 로도스섬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왕국


기원전 2-3세기 그리스 남부의 도시들끼리 결성한 아카이아 동맹과 그리스 중부의 도시들로 결성된 아이톨리아 동맹이 지배자인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런 그리스인들이 신흥세력인 로마에 주목했다. 그들은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쫓아내주면, 자기들은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로원에 세력을 갖게 된 스키피오와 제1차 그리스 전쟁을 직접 담당하게 된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Titus Quinctius Flamininus)는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이름난 그리스 애호가였다. 그들은 마케도니아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테네라는 이유만으로, 하다못해 의용군으로라도 참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플라미니누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케도니아와 로마의 첫 번째 군사적 충돌은 기원전 197년에 테살리아 지방의 티노체팔레에서 벌어졌다. 이때 로마 쪽 병력은 2만 명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그 절반은 그리스 도시들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맞서는 마케도니아군은 2만 6천 명.


마케도니아군 중무장 보병은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무적이라는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로마군의 전술 앞에서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전 결과는 지중해 동부 지역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케도니아군의 전사자는 8천 명. 포로는 5천 명. 반면에 로마 쪽 전사자는 700명에 불과했다.


마케도니아 영토 안으로 달아난 필리포스 5세는 전사자 매장과 강화 교섭을 위한 휴전을 제의했다. 총사령관 플라미니누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마케도니아와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 무렵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은 패권국이 된 로마를 제외하면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시리아와 이집트였다. 스키피오가 생각한 ‘온건한 제국주의’는 로마의 패권하에 독립국인 이들 나라의 공존공영이었다.

[헬레니즘 왕국들 출처 본문]

카르타고를 떠나는 한니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자인 카르타고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한니발이 국내경제 회복의 선두에 서 있었다. 재원이 부족하면 세금을 늘려 구멍을 메우는 것이 카르타고의 관례였지만, 한니발은 경비 절약과 사용법 재검토를 통한 경제 재건책을 실시했다. 이것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한니발에게 반감을 품는 정적도 생겨났다.


반대파는 그를 로마에 고소한다. 고소 이유는 한니발이 시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현황 조사단이라는 이름의 시찰단을 카르타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한니발은 시찰단의 목적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51세가 된 한니발은 저 혼자 빈 손으로 조국을 탈출한다. 한밤중에 말을 달려 해안까지 간 그는 미리 준비해둔 배에 올라탔다.


시리아와의 결전


그리스 중부에 살면서 마케도니아 왕국과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이톨리아인은 기원전 197년에 마케도니아와 강화를 맺을 당시부터 불만이 높았다. 그들은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고스란히 놓아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톨리아인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안티오코스도 마케도니아 세력이 쇠퇴한 지금이야말로 오랜 경쟁자인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고, 그리스에 자국의 세력을 진출시키는 데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동료의 힘이 약해지자마자 당장 그 기회를 이용하는 것은 헬레니즘 국가들이 늘 써먹는 방식이다. 게다가 이 무렵 시리아에는 한니발이 있었다.


기원전 193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단장으로 하는 원로원 의원 3명이 시리아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에페소스에서 안티오코스 왕과 만났다. 이 기회에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대면에서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누구를 최고의 장수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가 사실이라면, 한니발은 그해에 54세, 스키피오는 42세였을 것이다.


"스키피오: 가장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이지요. 적은 병력을 가지고 대군을 무찔렀고 인간이 일찍이 가보지 못한 세상의 끝까지 갔기 때문이오.
스키피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 세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그건 물론 나요
스키피오: (웃음을 터트리며) 만약 당신이 자마 전투에서 나를 물리쳤다면 그 땐 뭐라고 말했겠습니까?
한니발: 그랬더라면 내가 알렉산드로스, 피로스를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거요"


그로부터 2년 뒤인 기원전 191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헬레니즘 국가들 중에서도 최대의 영토를 가진 군주다. 한편 로마도 이제 시리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불가피한 경우 군단 파견을 승인해달라고 민회에 요구했다.


그리스로 건너가 아이톨리아인과 합류한 시리아군은 병력에서 훨씬 열세인 로마군한테 그리스의 테르모필라이에서 어이없이 패퇴하고 말았다. 스키피오에 뒤이은 젊은 로마 장군들의 기동력있는 전술 앞에서, 수만 많으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헬레니즘 국가들의 군대는 궤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는 도망쳤고 결국 시리아 영토 내에서 결말을 낼 필요가 있었다.


로마군은 처음으로 아시아에 건너가게 되었다. 로마는 수중에 있는 최고의 카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90년의 시리아 전선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투입하기로 결정되었다. 시리아와 로마의 전쟁은 우선 바닷길 확보를 둘러싼 해전으로 시작되었다. 두 세력 사이에 에게해가 끼여 있는 이상,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해 여름, 로도스의 해군과 합류한 로마 함대는 시리아 함대와 충돌했다. 시리아 함대를 지휘한 것은 다름 아닌 한니발이었다. 양군 모두 100척의 군선을 투입한 대규모 해전이었다. 그 유명한 한니발도 바다에서는 사정이 달랐던지, 시리아 함대가 패주했다. 그 후 해전은 다시 한번 벌어졌지만, 이번에도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마그네시아 평원 전투


양군이 대결하는 전쟁터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에페소스에서 내륙으로 들어간 마그네시아 평원으로 결정되었다. 로마군이 오리엔트에서 처음 치른 전투는 그에 어울리게 웅장한 규모였다. 마케도니아 용병을 주력으로 삼은 시리아군은 시리아 전역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합해 6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다. 여기에 54마리의 코끼리가 가세했다.


한편 로마군은 로마의 중무장 보병을 주력으로 하면서도, 아카이아 동맹과 마케도니아에서 온 그리스 병사, 그리고 페르가몬과 로도스 및 누미디아 기병까지 합하여 총병력 3만 4천 명. 이쪽에도 누미디아에서 도착한 16마리의 코끼리가 가세했다.


승리는 병력이 절반밖에 안 되는 로마군에게 돌아갔다. 로마 측 장교들의 기민한 전법이 로마군의 승리를 가져온 원인이었다. 2천 명 정도의 지휘를 맡고 있는 장교들한테까지 스키피오식 전술이 침투해 있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한니발은 로마에 인도되기 전에 도망쳤다. 처음 얼마 동안은 크레타섬에서 살았다. 스키피오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추격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 후 한니발은 지중해에 떠 있는 섬 크레타에서는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곧 흑해 연안에 있는 비티니아로 망명했다. 이곳에 로마의 손길이 뻗어온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의 일이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은 이제 로마의 것이었다. 수도 로마는 ‘로마 연합’의 맹주 로마의 수도를 뛰어넘어 ‘세계의 수도’로 탈바꿈했다. 로마에는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왕국이나 도시의 대표자가 진정하러 찾아오게 되었다. 패권자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판정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스키피오의 재판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원로원의 ‘제1인자’ 자리를 오랫동안 독점했으며, 일단 유사시에는 역시 스키피오가 최상의 카드라는 데 모든 사람의 의견이 일치해 있던 스키피오. 그의 약점은 건강 악화였다.


기원전 187년, 시리아를 굴복시키고 귀국한 스키피오는 호민관 두 사람의 고발을 받았다. 시리아의 왕이 지불한 즉시 배상금 500탈렌트를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그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혐의였다. 피고석에 불려나간 것은 형 루키우스이지만, 고발자의 진짜 목표는 그 자신이라는 것을 스키피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원로원에서 증인을 심문하는 날, 원로원 의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파피루스 종이를 묶어서 만든 두꺼운 출납부를 북북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원로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의 기소 이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소. 스키피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할 자유는커녕 육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스키피오의 이런 언행을 역사가 리들하트는 정치적으로는 서투른 방식이었지만 인간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나이는 아직 48세지만, 병 때문에 완전히 쇠약해진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스키피오의 이 말을 사람들은 오만불손으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 호민관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스키피오 반대파의 리더격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역사에서는 대(大)카토(Marcus Cato the Elder)라고 불리는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방의 평민계급 출신으로 당시 로마 정치계에서는 ‘신인’으로 불렸다.


농사를 짓고 있던 이 젊은이를 발탁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시킨 것은 그 지방의 귀족인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였다. 스키피오가 속해 있는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던 발레리우스 가문이 학식도 풍부하고 변설이 특히 뛰어난 이 젊은이를 자기 파벌의 논객으로 활용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 카토 출처 구글 이미지]

두 호민관은, 기원전 205년, 즉 스키피오가 시칠리아에서 겨울을 보낸 17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스키피오를 탄핵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키피오가 이탈리아 남부 로크리에 달려가 내부의 한니발 반대파 시민들과 공동 작전을 벌여, 로크리를 탈환한 사건까지 문제삼았다. 임지가 시칠리아로 결정된 집정관 스키피오의 월권행위라는 이유였다.


“시리아에 포로로 붙잡힌 스키피오의 아들을 안티오코스 왕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돌려보낸 데에도 무언가 내막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대가는 없었을까요. 또한 안티오코스는 걸핏하면 다른 사람을 제쳐놓고 스키피오와 직접 교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마치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것은 로마의 민회가 아니라 자기 혼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독재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스키피오는 무엇 때문에 시리아 전선에 참가했을까요. 자기 혼자 로마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되었지만, 로마가 실제로는 스키피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도 과시하고 싶어서 참전한 게 아닐까요."


이 논고를 묵묵히 듣던 스키피오는 그 다음 날 많은 친구와 ‘클리엔테스’들을 거느리고 도착해서 의사당을 한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질병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목소리까지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호민관, 그리고 로마 시민 여러분, 오늘은 내가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싸워 다행히 승리를 얻은 날로부터 정확히 15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나는 이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가겠습니다. 거기에 모셔져 있는 최고신 유피테르와 유노 여신과 미네르바 여신을 비롯한 여러 신께서 우리 모두에게 조국 로마의 자유와 안녕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베풀어주신 데 감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원한다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원로원을 떠났다. 그를 따라간 것은 친구와 클리엔테스들만은 아니었다. 로마 시민들도 잊어버렸던 과거를 생각해냈다. 원로원 의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청객들도 원로원을 떠났고, 서기까지도 철필을 놓고 스키피오의 뒤를 따랐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호민관 두 명과 카토뿐이었다.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은 스키피오를 선두로 한 시민들의 행렬로 가득 메워졌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렇게 썼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날은 스키피오가 찬란하게 빛난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스키피오는 로마를 떠났다. 나폴리로 가는 도중의 바닷가에 있는 리테르노(현재명 빌라리테르노)에는 그의 별장이 있었다. 그는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 별장에 틀어박힌 채, 재판을 위해 소환해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183년, 그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스키피오는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스키피오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기를 거부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그 가족묘지가 로마 영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의 유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 스키피오의 무죄가 증명된 것은 그가 죽은 지 2년 뒤였다.

[스키피오의 별장과 무덤 출처 구글 이미지]

우연히 같은 해에 한니발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곳은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고 카르타고에서도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였다.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한 로마군의 한 부대장이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Prusias I)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해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알게 된 한니발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마셨던 것이다. 희대의 전술가는 64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후세의 로마인들은 로마가 더 강해지도록 일조한 적으로서 한니발을 경외하기도 했고, 한니발 동상을 도심에 건립하기도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한니발이 문 앞에 있다(Hannibal erat ad portas)>,라는 말이 '위험이 임박했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한니발이 와서 너를 데려가 버린다"고 꾸짖을 때도 있다고 한다.

[자살하는 한니발 출처 구글 이미지]
마케도니아 멸망
기원전 179년~기원전 167년


필리포스 5세가 향년 58세에 죽고 왕위에 오른 페르세오스는 아버지 필리포스한테서 마케도니아 왕의 긍지는 물려받았지만, 현실에 대한 통찰력은 물려받지 못했다. 재군비를 실현한 마케도니아는 우선 동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페르가몬 왕국에 창끝을 돌렸다. 페르가몬에서는 당장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당시 용맹스럽다는 평판을 아직도 잃지 않은 마케도니아 중무장 보병을 주력으로 하여, 오리엔트 전역에서 끌어모은 용병을 추가한 마케도니아의 전력은 5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한편, 다국적군의 형태를 띠는 로마군의 전력은 전부 합해도 3만 명을 겨우 넘을 정도였다. 게다가 기원전 171년 그리스에 상륙한 로마군의 태도에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살핀다는 느낌이 늘 따라다닐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페르세오스와의 회전


하지만 점점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이 로마군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드디어 로마는 결전을 준비했고, 이에 기원전 168년 6월, 보충 군단을 이끌고 브린디시항을 떠난 아이밀리우스는 코르푸섬을 지나 그리스 서해안에 상륙했다. 그리고 로마 집정관이 그리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페르세오스한테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아이밀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페르세오스의 숙영지인 피드나 평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회전 전날 밤에는 월식이 있었다. 미리 월식을 예상한 로마군과 달리 마케도니아군은 월식에 놀랐고, 그것을 흉조로 여긴 병사들의 사기는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이미 떨어져 있었다. 이튿날 아침, 피드나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양군이 투입한 병력 규모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개전한 뒤 한 시간 만에 승부가 나버렸다.


패장 페르세오스는 자국의 수도인 펠라까지 도망쳤지만, 주민들은 그의 눈앞에서 성문을 닫고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페르세오스는 할 수없이 사모트라키섬까지 달아났지만, 여기서도 배신당하여 추적해온 로마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의 3대 왕국 가운데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멸망을 결정했다. 로마의 ‘제국주의’는 조금씩 엄격해지고 있었다.


반란군 진압과 코린트 파괴


이후 기원전 149년경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선왕 페르세오스의 서자를 자칭하는 필리포스라는 사나이가 그리스인들의 반(反)로마 감정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공식 석상에서도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로마인이 그리스에 오는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와야지, 주인으로 와서는 안 된다.”


기원전 148년, 로마는 이 그리스에 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에 대한 세 번째 군사 개입이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타민족을 너그럽게 대해봤자 반대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 것에 짜증을 내고, 그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1년도 지나기 전에 필리포스가 이끄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기원전 146년경,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코린트를 방문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코린트 시민들한테서 무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우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코린트에 급파된 로마군은 코린트를 철저히 파괴하고, 미술품을 몰수하여 로마로 보내고, 주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도시 전체가 송두리째 소멸해버린 코린트는 오만불손한 그리스인 전체에 대한 본보기였다.


카르타고 멸망
기원전 149년~기원전 146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주가 되지 않고 독립한 자치국가로 존속했지만, 분명 이류 국가로 전락해 있었다. 군비도 약소국밖에는 상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로마의 승인 없이는 외국과의 교전권도 행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로마의 ‘클리엔테스’, 즉 피보호자가 된 카르타고는 역시 로마의 ‘클리엔테스’인 누미디아 왕국의 세력 확장에 고민하고 있었다. 같은 로마의 ‘클리엔테스’였지만 로마가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당시의 누미디아 왕국은 ‘마시니사 왕의 훌륭한 지도로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탈바꿈했다’고 할 만큼 강대국으로 변모해 있었다.


누미디아의 세력 확장에 시달린 카르타고는 용병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당장 6만 명의 용병이 모였다. 이 사실은 당장 로마에 알려졌다. 로마는 스키피오 나시카를 수석대표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고 그는 일단 누미디아군을 누미디아 영토 안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인은 스키피오 나시카가 성립시킨 타협책이 로마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누미디아 국경을 돌파하여, 누미디아 수도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갔다. 로마 원로원은 격분했다. 누미디아 침공은 분명한 로마와의 조약 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원전 149년의 집정관 임지는 아프리카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에서 파견한 대표 30명에게 최후 통첩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수도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주민은 해안에서 10로마마일(약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내륙지방으로 전원 이주할 것.”


대표단이 로마의 가혹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귀국하자, 지도층에 분노한 카르타고 민중이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표단들은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고, 분노한 민중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로마와 카르타고는 마지막 결전의 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실제 공격은 마케도니아의 반란군 진압 후인 3년이나 흐른 후에 이루어졌다.


카르타고 함락


튀니스만의 서쪽에 불쑥 튀어나온 곶의 끝을 차지하고 있는 카르타고 시가지는 천연의 요충지에 세워져 있다. 우선 넓은 곶 전체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북쪽에는 산지가 바싹 다가와 있고 동쪽은 바다가 지켜주고 있어서, 북쪽과 동쪽에서의 공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다. 이 도시를 공략하려면 항구도시 카르타고의 정면 현관, 즉 항구 쪽에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다.

[고대 카르타고 상상도(위) 카르타고 수도와 시가지에서 로마군의 행로 출처 본문]

기원전 146년에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Africanus Numantinus)의 지휘 아래 바다 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로마군에 대해, 수비군은 우선 외항 주위에 늘어서 있는 창고와 조선소에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대항했다. 그 불길 속에서 시가전이 꼬박 엿새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이레째 되는 날, 신전이 늘어서 있는 ‘비르사’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카르타고는 완전히 정복되었다. 신전을 에워싸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내던져,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카르타고인도 적지 않았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이후 600년이 넘도록, 로마는 패자라 해도 지상에서 말살하는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146년에는 코린트와 카르타고를 잇따라 지상에서 말살했다. 게다가 13년 뒤에는 에스파냐의 누만티아도 카르타고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이때의 총사령관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누만티아 학살과 유적지 출처 구글 이미지]

카르타고를 멸망시킴으로써 로마는 곧 새로운 문젯거리를 떠안게 된다. 누미디아(오늘날의 알제리)의 세력 팽창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존재를 없애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멸한 카르타고 영토는 그 후로는 우티카에 주재하는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제 이 지방의 호칭은 ‘속주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마레 노스트룸


로마가 카르타고를 속주로 삼고, 에스파냐를 속주로 삼고, 그리스도 사실상의 속주로 삼은 것과 같은 시기에, 후계자를 낳지 못한 페르가몬의 왕이 자기가 죽은 뒤의 왕국을 로마에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리하여 페르가몬 왕국이 있는 소아시아 서해안 일대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제 로마는 영토의 넓이에서도 지중해 세계의 확고부동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지중해는 로마인에게 ‘마레 노스트룸’(우리 바다)이 되었다.

[기원전 130년경 지중해 지도 출처 본문]

로마의 궤멸을 생애의 소원으로 삼았던 한니발은 결국 로마가 강대해지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도와준 셈이다. 지중해 전체를 이토록 짧은 기간에 로마인의 ‘우리 바다’로 만들어버린 장본인도 결국 한니발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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