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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Nov 15. 2024

로마인 이야기 7권 (1)

악명높은 황제들 - 티베리우스 황제

로마인 이야기 7권 『악명높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이후 그로부터 후계 자리를 승계한 티베리우스 황제와 칼리굴라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그리고 네로 황제까지의 약 40여년 간의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소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불리는 시기의 로마 황제들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후세의 평가에 있어 논란이 많지만 카이사르가 기획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 제국을 반석처럼 튼튼하게 다져놓았다. 하지만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어린 시절 로마 병사들이 붙여준 ‘작은 군화(caligula)’라는 애칭으로 불린 ‘칼리굴라’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즉위하였지만, 짧은 4년 간의 재위기간 동안, 티베리우스가 쌓아놓은 재정을 파탄내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근위대장에 의해 암살 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역사 연구와 저술로 반생을 보내다 50세에 예상치도 않게 황제 자리에 앉은 후 13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지만 아내 아그리피나의 야망에 희생되어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후세에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붓아들로서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는데, 역사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우며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제1부 티베리우스 황제
(서기 14년~서기 37년)
[티베리우스 황제 동상 출처 구글 이미지]

카프리섬


나폴리 남쪽 30킬로미터 해상에 떠 있는 작은 섬 카프리는 지중해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라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2천 년 전에는 섬 전체가 황제의 사유지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섬을 영유하고 있던 나폴리에 이스키아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폴리만의 진주’라는 별명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카프리섬을 만끽하지 못하고 죽던 해에 나폴리만을 유람할 때 잠깐 들른 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별장(Glardini di Augusto)은 북부의 유일한 선착장(Marina Grande)에서 가까운 10미터 정도 높이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카프리섬과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그에 반해 티베리우스의 뜻대로 동쪽 끝 벼랑 위에 세워진 별장까지는 고대에는 해발 350미터 가까운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별장은 오늘날 ‘빌라 요비스’(Villa jovis, 제우스 별장)라고 불리는데, 대규모 저수조만 보아도 로마인들이 열심히 추구했던 쾌적성은 충족되고도 남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는 은퇴하여 이 별장에 틀어박힌 것이 아니라, 서기 27년부터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이곳 카프리섬에서 로마 제국을 계속 통치했다. 트베리우스는 인간을 혐오하긴 했지만, 인간을 통치하는 책무는 내팽개치지 않았던 것이다.

[빌라 요비스 평면도 출처 구글 이미지]

황제 즉위


서기 14년 8월 19일 나폴리 근교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우구스투스의 유해가 수도로 귀환한 것은 9월 초였을 것이다. 서기 14년 초에 작성되어 관례에 따라 여제사장에게 맡겨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은 회의장을 가득 메운 5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법무관(프라이토르)이 낭독하였다.


무자비한 운명이 나에게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라는 두 아들마저 앗아가버린 이상, 티베리우스에게 유산의 2분의 1과 6분의 1을 물려줄 것을 여기에 언명하노라.”


아우구스투스는 “무자비한 운명이 나에게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라는 두 아들마저 앗아가버린 이상“이라고 전제하면서 제 핏줄도 아닌 티베리우스에게 물려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삼을 작정이었던 외손자 두 명을 잃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아내가 데려온 자식인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죽기 10년 전인 서기 4년에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는 당시 16세인 친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카인 안토니아가 낳은 손자 뻘인 18세의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이렇게 굴욕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즉위 직후


어쨌든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에게 부과된 임무는 우선 황제의 지위를 확립하여 제정을 견고하게 하는 것, 둘째는 국가 재정의 건전화, 그리고 셋째는 북쪽 방위선을 라인강에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엘베강까지 확장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인 문제였다.


원로원은 반세기 전에 카이사르를 신격화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신격화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로마 초대 황제는 ‘신격(神格) 아우구스투스’(디부스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권력이양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싶었다. 그런데 다름아닌 티베리우스 자신이 신중을 요구해왔다. 티베리우스는 자기가 계승하려 하고 있는 로마 제국 최고통치자의 지위가 로마의 법률과 전통에 비추어보면 얼마나 애매모호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몇 차례 모호하게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제국 통치를 위한 권력 위탁'을 수락하였다. 비록 피는 아우구스투스한테서 물려받지 않았지만, 나이와 경험, 업적, 역량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제2대 ‘제일인자’, 즉 사실상의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55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 달 전이었다.


티베리우스는 가식과 체면치레를 지나치게 싫어한 나머지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언플능력과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그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체질적으로 정치질과 아예 담쌓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반박의 의도가 좋아도 언행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직설적이어서 툭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곤 했다. 티베리우스의 달 건이나 도미누스 호칭 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리우스(7월) 달과 아우구스투스 (8월) 달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에게는 '그럼 역대 제일인자가 열두명을 넘어가면 그땐 어쩔거냐?'라고 따졌고, 자신을 도미누스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나는 같은 공화국 시민인데 왜 노예처럼 비굴하게 도미누스라고 부르느냐?'고 화를 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분명 좋은 의도로 말을 하고도, 뒤에서는 오히려 위선적인 폭군이라고 씹혔다. [출처: 나무위키]


‘제일인자’에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의 선출장을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시민권 소유자 수가 500만 명에 이르렀던 시절, 수도 로마의 민회에서 실시하는 선거는 유명무실해져 있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엄청난 선거비를 써야 했는데 이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티베리우스가 두 번째로 한 일은 게르마니쿠스에게도 ‘로마군 최고통수권’을 주자고 원로원에 요청하여 실현한 것이었다. 이 대권을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에게 나누어준 것은 죽기 1년 전이었다. 그것을 티베리우스는 취임하자마자 실행했다.


티베리우스의 등극을 전후하여 일어난 ‘위기’는 도나우강 방위선을 지키고 있는 판노니아 주둔 3개 군단과 라인강 방위를 맡고 있는 8개 군단의 반란이었다. 반란이라 해도 처우개선을 요구하여 일어났으니까 경제적 스트라이크다.


티베리우스는 라인강의 8개 군단에 대해서는 권위와 권력을 충분히 나누어준 28세의 게르마니쿠스에게 위기 대처를 일임하고, 판노니아에는 26세가 된 친아들 드루수스를 파견했다. 두 명의 근위대장 가운데 하나인 세야누스가 이끄는 근위병 2개 대대 2천 명도 드루수스를 따라간다.


판노니아 군단 봉기


[판노니아 속주 출처 구글 이미지]

판노니아 군단에서 발생한 반란은 얄궂게도 군단장 브라이수스의 온정이 발단이었다. 브라이수스는 타계한 황제를 애도하고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이유로 군단병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토목공사와 군단 훈련에서 해방된 병사들은 드넓은 숙영지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은 한가해지면 생각을 하게 된다. 병사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자신들의 처지에 불안을 품게 되었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는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것이 중단된 것이다. 로마 군단병은 지원제인 직업군인이다. 그들의 불안은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생겨났다.


판노니아에서 이런 병사들을 선동한 것은 원래 극장에서 관객의 박수갈채를 유도하는 일을 하다가 군단병이 된 페르켄니우스라는 졸병이다. 입담이 좋은 이 사내는 병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백인대장들의 명령에 노예처럼 따라야 하는가. 새 황제의 지위가 아직 확실치 않은 지금이야말로 처우개선을 요구하기에 좋은 때다. 봉급은 하루에 1데나리우스, 복무기간은 16년, 단 하루도 같은 군기 밑에서, 같은 숙영지에서 근무하지 않는다. 그리고 퇴직금은 현금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한다.“

[출처 본문]

2천 명의 근위병과 황제 호위병인 게르만 기병중대의 보호를 받으며 도착한 드루수스는 아군의 숙영지가 아니라 적지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군단이라기보다는 폭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26세의 드루수스는 이런 무리 사이를 지나 숙영지로 들어갔다.


드루수스는 손을 흔들어 병사들을 침묵시키고, 가져온 티베리우스의 메시지를 낭독했다.
'선황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누그러지고 정무가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원로원에 여러분의 요구를 전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요청할 것을 약속한다. 그래서 우선 아들을 보낸다. (......)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한은 원로원에 있고, 그 권한을 무시하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이 메시지를 소개한 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것도 티베리우스 특유의 시간벌기라고 단정하고 있다. 하지만 만기 제대 문제를 제외하고 다른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면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국가의 인적, 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그 한계선에서 종합한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티베리우스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메시지가 낭독된 뒤에도 반란병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요구 관철을 외치며 드루수스를 포위한 채 수행원들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밤 월식이 일어났다. 병사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백인대장들이 병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드루수스의 명령에 따라 반란 주모자인 페르켄니우스와 그의 동료 한 명이 사령관 막사로 불려가서 살해되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숙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 어딘가에 매장되었다. 이후 과격분자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근위대 병사들과 판노니아 군단의 백인대장들이 그 일을 맡았다.


게르마니쿠스


‘게르마니아 군단’이라고 불린 라인강 방위군은 상류와 하류로 양분된다. 담당 지역을 따서 전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후자는 ‘저지 게르마니아군’이라고 불렸고, 양군은 각각 4개 군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8개 군단의 총사령관은 서기 12년까지는 티베리우스, 서기 13년부터는 게르마니쿠스가 맡고 있었다.

게르마니아 반란이 판노니아 반란과 다른 점은 처우개선이라는 경제적 스트라이크에 호소하기 전에 우선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티베리우스를 싫어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단호하게 ‘싫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 자신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 서약에 앞장서면서 병사들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숙영지로 달려간 28세의 총사령관은 병사들 앞에서 목청을 높였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병사의 규율은 어디로 갔는가. 로마의 전통인 질서 존중의 정신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대대장과 백인대장은 누가 추방했는가.”

그럼에도 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게르마니쿠스는 ‘제일인자’ 티베리우스가 보내온 것으로 꾸며 메시지를 쓰기로 결정했다. 말하자면 문서를 위조한 것인데, 이 위조 문서에는 황제 티베리우스가 승인한 것으로 다음 세 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다.


(1) 20년간의 복무를 끝낸 자에게는 즉시 제대를 허락한다.
(2) 16년간의 복무를 끝낸 자는 예비역으로 돌려,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요격전에 나서는 것 외에는 모든 임무에서 해방된다.
(3)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은 두 배로 지급한다.


그런데 병사들은 즉각 실행할 것을 요구했고, 게르마니쿠스와 막료들은 어쩔 수 없이 주머니를 털어 모은 돈으로 유증금을 먼저 지급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고지 게르마니아군'과 '저지 게르마니아군' 중 쾰른 숙영지 군단의 소요는 게르마니쿠스의 설득과 가족들을 내세운 시위를 통해 진화되었다.

[병사를 설득하는 게르마니쿠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지 게르마니아군' 중 크산텐(Xanten)의 제5군단과 제21군단의 병사들이 여전히 강경하게 저항하자 게르마니쿠스는 크산텐의 사령관 카이키나에게 주모자들 처형을 명했고, 한밤중에 주모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게르만 군단 병사들의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승인 없이 약속했던 항목 가운데 두 가지, 즉 복무기간을 16년으로 단축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을 두 배로 지급하는 것은 반란이 진압된 지 얼마 후에는 완전히 백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20년이 지나면 제대시켜준다는 항목은 반드시 지키려고 애썼고 실행했다.

[독일의 크산텐 출처 구글 이미지]

공중안전


55세에 사실상의 황제인 ‘제일인자’에 취임했을 당시부터 티베리우스는 자기가 인기없는 황제로 끝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는 마치 체념이라도 한 듯 처음부터 끝까지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팍스)는 외적에 대한 방위만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평화’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는 이 양쪽의 ‘팍스’를 의미했다. 황제에 즉위한 직후에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정책 중에는 본국 이탈리아의 공중안전 대책을 완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도둑, 강도, 상해, 살인, 거기에다 경기장의 ‘훌리건’까지 공중의 안전을 저해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수도 로마의 북동쪽에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ni)를 9천 명의 근위병을 대기시켜놓기로 결정하였다.


[로마 근위대 출처 구글 이미지]

‘공명정대’(유스티티아)야말로 최고의 ‘안전보장’(세쿠리타스)이다. 그리고 ‘공명정대’는 사법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야만 보장된다. 로마의 재판에서는 고발자가 그 이유를 제시하는 데 이틀, 변호인측 변론에 사흘이 소비되는 게 관례였지만, 중요한 재판에는 티베리우스가 처음부터 배심원 평결이 나오기까지 모든 과정에 몸소 참석했다고 한다.


긴축 재정


세제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생각은 시종일관 무슨 일이 있어도 세금 인상만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개개의 세율은 올리는 게 어떠냐는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속주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인상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티베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은 양을 죽여서 고기를 먹으려 하지 말고, 털을 얻는 대상으로 양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내버려두면 세입은 그대로인데 세출만 늘어나버리는 게 국가 재정의 숙명이다. 여기에는 어떻게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 경영의 합리성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병역 연한 20년을 엄수하는 것과 더불어 건전 재정을 확립하는 것이 티베리우스에게는 급선무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재정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이 더 시급하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공공사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지나치다 해도 좋을 만큼 많은 공공 건축물을 세웠기 때문이다.

[팔라티노 언덕의 로마 왕궁와 신전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티베리우스도 속주에서는 제법 많은 공공사업을 벌였다. 제국의 방위선인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판노니아 지방에서는 특히 많았고, 북아프리카에서도 그것을 보여주는 금석문이 발굴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실용성을 중시하는 티베리우스는 모두 도로나 다리 같은 사회간접자본 공사만을 추진하였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바치는 경기대회처럼 종교행사를 겸해서 열리는 것 외에는 어떤 구경거리도 제공하지 않았다. 법률로 금지한 것은 아니다. 황제가 후원자가 되어 비용을 대는 것을 그만두었을 뿐이다. 특히 검투사 시합에는 냉담했다.


게다가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하사금이라는 명목으로 평민에게 주는 보너스를 완전히 폐지했다. 다만 그라쿠스 형제 가운데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법제화한 이후 15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는 ‘소맥법’(렉스 풀멘티아)에 따라 빈민에게 밀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것은 폐지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광대한 제국 경영을 맡게 된 서기 1세기 전반에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경제권(圈)도 상당히 원활하게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따라서 국고 수입 자체도 늘어났기 때문에 긴축재정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불경기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에 비해 티베리우스는 ‘쩨쩨하다’는 평가가 정착되었다.


게르마니아 철수


현대 학자들이 ‘지나친 야심’으로 평가하는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복은 기원전 12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인 드루수스를 사령관에 임명하여 게르마니아로 군단을 파견했고, 이후 서기 13년에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이기까지 4반세기나 되는 세월을 게르마니아 제패에 바친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지정한 게르마니쿠스에게 총지휘를 맡겼다는 것은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제패하기를 아우구스투스가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도 ‘라인강’까지의 철수를 실행하는 데에는 신중했을 것이다.


29세를 눈앞에 둔 혈기왕성한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는 이듬해 봄에 대대적인 게르마니아 정벌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로마에는 전선의 총지휘관에게 모든 전략을 맡기는 전통이 있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티베리우스의 지령이 없는 한, 최고사령관 차석인 게르마니쿠스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서기 15년 봄, 게르마니쿠스는 마인츠에 주둔해 있던 4개 군단 2만 4천 명과 속주민 1만 명으로 구성된 보조부대를 이끌고 라인강을 건넜다. 하류의 크산텐 숙영지에서는 카이키나가 이끄는 4개 군단 2만 명과 보조부대 5천 명이 역시 라인강을 건넌다.

[독일 마인츠 출처 구글 이미지]

남쪽과 서쪽에서 쳐들어가는 이 협공작전은 바루스의 3개 군단을 전멸시켜 의기양양해 있던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족 통일전선을 분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아르마니우스의 장인까지 로마 쪽에 붙겠다는 뜻을 전해왔고 아르마니우스의 아내도 아버지를 따라와서 로마 군단 기지에서 아이를 낳았다.


게르마니쿠스는 이듬해인 서기 16년에도 8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라인강을 내려가 북해로 나간 다음, 엠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게르마니아의 심장부로 쳐들어간다는 당당한 전략을 세웠다. 아르미니우스는 이때 처음으로 로마군과 회전(會戰)을 벌였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전투는 모두 로마의 대승으로 끝났다.

[게르만족의 항복을 받는 게르마니쿠스 출처 구글 이미지]

라인강 연안 겨울철 숙영지로 돌아와, 내년 봄의 게르마니아 전쟁을 생각하고 있던 게르마니쿠스에게 티베리우스한테서 "수도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하라"고 적힌 편지가 날아왔다. 게르마니쿠스는 1년만 더 기다려주면 엘베강까지 제패할 테니까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티베리우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이듬해인 17년 5월 26일, 로마에서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축하하는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개선식이 끝나자마자 게르마니쿠스의 다음 임지가 오리엔트 땅으로 발표되었다.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는 전쟁을 끝내는 것을 금지당했다”고, 그리고 진짜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전공을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르마니쿠스의 개선식 출처 구글 이미지]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게르마니아 전선을 맡고 있는 총사령관에 후임을 임명해야 할텐데,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직을 아예 폐지해버렸다. 이래서는 티베리우스에게 게르마니아 전쟁을 계속할 뜻이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라인강 방위체제


엘베강까지 국경을 확대하고, 야만적이기 때문에 용맹한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에 흡수하여 북쪽의 안전을 확보하려 한 아우구스투스의 꿈은 28년 뒤에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서기 17년부터 북쪽 방위선은 다시 라인강이 되었지만, 티베리우스는 단순히 군사를 철수시킨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라인강 방위 체제를 정비하였다.


우선 라인강 연안에 군단 기지를 분산했다. 본 이북의 ‘저지 게르마니아’에서는 전에는 베테라(오늘날 크산텐 부근)와 콜로니아(오늘날의 쾰른 부근)의 두 기지에 배치했지만, 이것을 4개 기지, 노비오마구스(오늘날 네덜란드의 네이메겐), 베테라, 노바이시움(오늘날 독일의 노이스), 본나(오늘날의 본)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리고 콘플루엔테스(오늘날의 코블렌츠)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고지 게르마니아’를 지키는 4개 군단은 전처럼 모곤티아쿰(오늘날의 마인츠)을 기지로 삼았다.

[독일 코블렌츠 출처 구글 이미지]

한편 라인강과 가까운 동쪽 연안 일대에는 게르마니쿠스의 친아버지이자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었던 드루수스가 몇 개의 성을 쌓고, 중대 규모의 수비병력을 배치해놓고 있었는데, 티베리우스는 이들도 모두 철수시켰다.


그 대신 라인강 동쪽 연안에 살면서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몇몇 부족을 서쪽 연안으로 강제 이주시켜, 동쪽 연안 일대를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그 무인지대에서는 낮에 가축을 방목하는 것만 허용되고, 경작은 금지되었다. 강을 따라 띠 모양으로 무인지대를 설치한 것은 적의 습격을 신속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

[리메스 게르마니쿠스와 다뉴브 리메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1,300킬로미터가 넘는 라인강과 그보다 더 긴 도나우강을 따라 상류부터 하류까지 줄곧 이어지는 긴 띠 모양의 무인지대를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라인강에서는 동쪽 연안, 도나우강에서는 북쪽 연안에 사는 게르만계 부족들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으로 실행되었다. 즉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은 셈이다.


그리고 ‘클리엔테스’ 관계도 단순히 두목과 부하의 관계는 아니다. 부족장들에게는 처음부터 세습되는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로마군에서 ‘보조병’으로 근무하는 부족민에게도 25년 만기를 다 채우면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이렇게 티베리우스는 라인강 방위체제를 좀더 광범위하고 항구적으로 키우기 위한 상설 체제로 바꾸었다. 향후 반세기 동안 라인강의 방위체제는 도나우강의 방위체제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가 생각하고 실행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방위체제 개편 작업을 현지에 가지 않고 수도 로마에서 모두 해냈다.


카메오 이야기


카메오 파리 국립도서관에 ‘프랑스의 카메오’(보석이나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드는 장신구의 한 종류)라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세로가 31센티미터, 가로가 25.5센티미터나 되고, 서기 17년에 제작되었다. 이 대형 카메오는 상중하로 나뉘어, 맨 위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인 드루수스 등 게르만족과의 관계에서 선구자가 된 인물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중간은 게르만족을 제패한 당사자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와 그 가족들의 초상으로 메워져 있고, 맨 밑에는 정복당한 게르만족의 군상이 새겨져 있는 구도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지금도 서기 17년 봄에 게르마니쿠스를 맞아 거행된 개선식으로 로마의 게르만족 제패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해가 로마군이 게르마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해가 되었다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Gemma Augustus)도 역시 고대 로마 시대에 제작된 유명한 카메오지만, 이 작품은 정확하게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6년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옆에 서있는 여신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시민관(corona civica)을 씌워주는 모습으로 카메오를 제작하였다.
[프랑스의 카메오와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 출처 구글 이미지]

게르마니쿠스, 오리엔트로


로마 제국의 동방(오리엔트) 문제는 결국 파르티아 문제다. 파르티아의 군사력은 로마를 이길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웃한 여러 왕국에 영향을 줄 만큼은 강했다. 파르티아의 이웃나라들은 로마의 ‘클리엔테스’였고, 로마의 오리엔트 방위체제는 바로 이런 동맹국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아르메니아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를 재조정할 필요가 생긴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르메니아 왕위를 둘러싼 분쟁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자란 보노네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올랐지만, 그에게 싫증이 난 아르메니아 국민들이 그를 쫓아내고 폰토스 왕의 아들이자 오리엔트식 군주인 제노네스를 추대하려 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인정하되, 단지 그리스식 이름인 제노네스를 아르메니아식 이름인 아르탁시아스로 바꾸라는 조건만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쿠스에게 부여된 임무는 수도 중 하나인 아르탁사타까지 가서 새 왕인 아르탁시아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것뿐이었다. 국민들은 왕의 대관식을 환호했다.


파르티아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르티아 왕인 아르타바누스는 현실적인 군주였는지, 당장 사절을 보내 유프라테스강의 섬에서 만나 로마와의 우호조약을 갱신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다만 보노네스의 망명지를 아르메니아에 가까운 시리아에서 좀더 먼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전왕의 망명지를 소아시아의 로마 속주로 결정했다. 그런데 거기로 호송되는 도중에 보노네스는 도망치려다가 백인대장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파르티아를 염두에 두고 아르메니아 문제를 처리한 이 해의 외교는 로마 외교의 성공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서기 34년에 아르탁시아스 왕이 죽을 때까지 아르메니아 왕국은 계속 평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 아르메니아를 로마 쪽으로 끌어당겨두는 데 성공했다.


카파도키아와 콤마네게


게르마니쿠스에게는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로마의 동맹국(사실상의 속국)인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 왕국에 대한 조치가 그것이었다. 서기 18년 당시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의 왕위는 둘 다 비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 두 왕국을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만 카파도키아의 초대 총독에 집정관을 지낸 벨라니우스가 부임한 것을 보면, 카파도키아는 항구적인 속주로 만들 작정이었던 것 같고, 콤마게네의 초대 총독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법무관 세베루스인 것을 보면 이 약소국은 시리아 속주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왕위 후계자가 자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카파도키아(위)와 콤마네게(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피소 총독


오리엔트에 파견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불상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르마니쿠스와 시리아 속주 총독인 피소와의 사이가 험악해진 것이다.


게르마니쿠스와 비슷한 시기에 시리아에 온 신임 총독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런 원로급 인물을 시리아 총독으로 보낸 것은 정치력이 의심스러운 게르마니쿠스의 감찰관 역할을 겸하게 할 속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피소가 배후 조정자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겉으로 너무 나서서 참견했다.

[게르마니쿠스와 피소의 대립 출처 구글 이미지]

게다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손이라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어 어디에나 얼굴을 내밀고, 군단 열병식에도 참석했다. 그런 아그리피나에게 피소의 아내인 플랑키나가 경쟁심을 불태운 것이다. 이러다보니 남자들 사이의 험악한 관계는 더한층 수습하기가 어려워졌다.

[대 아그리피나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분위기때문인지 서기 18~19년의 겨울을 게르마니쿠스는 가족과 함께 이집트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토였기 때문에, 로마의 요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황제의 허락을 얻어야만 이집트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규칙이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오리엔트 전역의 최고사령관이니까 이집트도 자기 관할이라고 생각했는지, 로마의 티베리우스에게 허가를 요청하지도 않고 이집트에 들어가버렸다. 이제 32세가 된 게르마니쿠스와 그 가족의 이집트 방문은 이 ‘열의가 넘치는 딜레탕트’의 성격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바란 대로 진행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소도 참배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함께 묻혀 있는 영묘도 방문했을 게 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 거리를 호위병도 거느리지 않고 그리스식 투니카(짧은 옷)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이집트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나일강 유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배를 타고 나일강을 내려가면서 연안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열심히 보고 다녔다.

[게르마니쿠스의 이집트 방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도나우강 방위체제


그 사이 서방(오키덴트)에서도 드루수스가 티베리우스의 정략대로 도나우강 방위선을 확립하고 있었다. 도나우강 유역에서 로마의 상대는 강대한 부족으로 알려진 마르코만니족이었다. 그 족장인 마로보두스는 로마에서 성장한 사람이라 로마의 국력을 잘 알고 었었기 때문에, 로마와의 정면 대결을 애써 피해왔다.


그런데 함께 싸우자는 아르미니우스의 권유를 계속 거부한 이 게르만 지도자도 휘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마로보두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지원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마로보두스와 그 가족이 안주할 땅을 북이탈리아의 라벤나에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마로보두스를 내쫓고 족장이 된 카투아르다스도 얼마 후 쿠데타로 쫓겨나, 로마에 보호를 요청해왔다. 티베리우스는 이 사람도 받아들인다. 카투아르다스가 안주한 곳은 남프랑스의 항구도시인 포룸 율리(오늘날의 프레쥐스)였다. 로마가 활용할 수 있는 카드는 이제 두 장으로 늘어난 셈이다.

[프랑스 프레쥐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면서도 티베리우스는 그 후 마르코만니족을 통솔한 바니우스를 로마 제국의 ‘친구’(아미쿠스)로 인정하고, 이 독립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냉철한 외교 덕택에 로마는 라인강 동쪽 연안과 마찬가지로 도나우강 북쪽 연안에도 우군을 갖게 된다. 그 무렵에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까지도 로마의 패권 밑에 들어가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서기 19년 봄, 이집트를 떠나 시리아로 돌아온 게르마니쿠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반발심을 드러내는 피소 총독이었다. 시리아 속주의 수도인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서는 격론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피소는 자기가 관할하는 소아시아 서해안으로 가고, 게르마니쿠스는 팔미라로 떠났다. 이때 팔미라에서 더욱 동쪽에 있는 유프라테스강까지 가서 파르티아와의 우호조약 갱신식에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름철의 사막 여행을 끝내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자마자 게르마니쿠스는 고열로 쓰러져버렸다.


주위에서는 이 갑작스러운 병의 원인에 대해 피소 총독이 독약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게르마니쿠스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처음 고열이 덮쳐온 지 열흘도 지나기 전에 그는 병상 주위에 모인 아내와 친구들에게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서기 19년 10월 10일, 향년 33세였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죽음에 대해 타키투스는 독살이라기에는 독약의 작용이 너무 느리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티베리우스의 밀명을 받은 피소가 독살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죽음의 원인 등 여러가지 면에서 알렉산로스 대왕과 비슷하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그들의 사인이 모두 말라리아였다는 게 정설이다.


게르마니쿠스의 유해가 로마로 돌아오자 로마 전체가 기능을 멈추었다. 재판도 무기 연기되고, 무역업자들의 사무실도 문을 닫았고, 상점들도 문을 닫았고, 학원들도 휴교했고, 신전 근처에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이런 상태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을 때, 티베리우스는 수도 주민에게 포고령을 발표했다.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번에 국민 여러분이 보여준 것과 같은 격렬한 애도는 받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비탄은 아버지인 나를 비롯한 고인의 가족 모두에게 대단한 명예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절도를 지킬 필요가 있다. (......) 지도자 개개인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불멸의 존재는 국가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각자 자신의 직무로 돌아가자. 로마 시민이 낙으로 삼고 기다리는 대지의 여신 축제일도 다가왔다. 일상생활은 직무와 즐거움의 두 가지로 성립되는 법이다.”


피소 재판


게르마니쿠스가 병으로 쓰러졌을 당시 피소 총독은 안티오키아에 없었다. 하지만 소식을 듣고 당장 안티오키아로 달려가지도 않았다. 게르마니쿠스가 죽자 아들과 친구들은 그에게 로마로 가라고 권했다. 피소는 원로원의 유력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 의원들한테 변명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피고석에 서게 되었다.


고발자는 카이키나, 벨라니우스, 비텔리우스 등 세 사람인데, 모두 게르마니아 전쟁 때 게르마니쿠스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았던 인물들이다. 오리엔트에 파견된 게르마니쿠스를 자원해서 따라간 장수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피소는 다음과 같은 죄로 처벌받아 마땅했다.


첫째,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4개 군단 병사들에게 방종한 행위를 허락한 것.
둘째, 동맹국 왕들에게 횡포를 부린 것. 이로써 오리엔트 전역의 최고책임자인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이들(동맹국 왕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고, 군단 내부는 무질서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피소는 군단 내부의 불량분자들한테는 군단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지만, 선량한 병사들한테는 경멸당하게 되었다고 탄핵한 것이다.
셋째, 마법과 독약을 사용하여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 고발자들이 강조한 것은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가 동양의 마법에 빠져, 주술을 부리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피소가 군단병을 사주하여 조국에 대해 활시위를 당길 작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피소에 대한 고발장 출처 구글 이미지]

독살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발자들은 안티오키아의 총독 관저에서의 잔치에서 피소가 직접 게르마니쿠스의 술잔에 독약을 넣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도 설득력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나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곳에서는 노예들의 시선까지도 피소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경멸과 적개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피소만이 아니라 피소의 아내인 플랑키나한테도 민중의 분노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거리를 두면서, 황태후 리비아의 무릎에 매달려 목숨을 건지려 하고 있었다.


피소는 자결을 결심한다. 변호에 나서준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으로 독살죄는 면할 수 있었지만 명령 불복의 죄를 면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자결만이 아들들을 구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판결은 피고의 생사에 관계없이 내려졌다.

(1) 피소의 이름을 공식 기록에서 말살한다.
(2) 피소의 재산 가운데 절반은 몰수하여 국고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로마에 있어서 사건과는 관계가 없었던 피소의 맏아들 그나이우스에게 남긴다.
(3) 시리아에 부임한 아버지와 동행한 둘째 아들 마르쿠스는 원로원 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아버지의 재산에서 50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받고 수도 로마에서 10년 동안 추방된다.
(4) 아내 플랑키나는 국모 리비아의 탄원도 있었기 때문에 죄를 불문에 부친다.


이 판결에 대해 티베리우스는 일부 항목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 우선 피소의 이름을 공식 기록에서 삭제한다는 판결을 물리쳤다. 또한 피소의 둘째 아들 마르쿠스의 원로원 의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판결과 10년 동안 수도에서 추방한다는 판결도 철회하고, 그에게도 형과 마찬가지로 상속권을 인정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반대할 수 없는 법이라는 게 티베리우스가 내세운 이유였다. 아내 플랑키나에 대해서는 원로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 최종 판결 내용은 후세의 로마인들에게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품게 했고, 미망인 아그리피나의 가슴에 티베리우스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녀는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사주하여 남편을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그리피나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맏아들 네로를 원로원에 데려가, 의원들에게 게르마니쿠스가 남긴 아들에 대한 특별 배려를 요청했다. 네로 카이사르는 성년식을 끝내긴 했지만, 공직을 맡기에는 아직 어린 14세였다.

[네로 카이사르(형)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동생) 출처 구글 이미지]

티베리우스는 가부장권을 행사하여 네로 카이사르의 약혼녀도 결정했다. 약혼녀는 드루수스의 딸 율리아였다.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인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누이동생과 결혼했으니까, 네로 카이사르는 고모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로마 민중은 이것으로 만족했다.


서기 21년, 집정관 취임을 사양했던 티베리우스가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드루수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제인 아버지가 나선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에 티베리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한 것은 서기 19년이었고, 그해의 동료 집정관은 게르마니쿠스였다. 아그리피나가 보기에 이것은 자기 아들 네로가 황제 자리를 계승할 가능성이 후퇴한 것을 의미했다.


또한 드루수스는 2년 전에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중 하나는 살아남아 두 살이 되었다. 티베리우스에게는 첫 손자까지 생긴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한테 와야 할 황제 자리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계통으로 흘러갈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아그리피나의 걱정에는 나름 훌륭한 대의명분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바랐던 것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황제의 대를 잇게 된다는 명분이었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출처 구글 이미지]

사막 민족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소요는 로마군 보조부대에서 군무를 경험한 타쿠팔리나스라는 사내가 사막 민족을 이끌고 로마의 속주를 침략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사막 민족으로서는 로마의 경작지 확대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동형 민족은 언제나 정착형 민족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는 법이다.


오늘날의 튀니지와 리비아 서부에 이르는 당시의 ‘아프리카 속주’는 원로원 관할로 이른바 ‘원로원 속주’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속주 총독도 원로원 의원들이 호선으로 결정한다. 하지만 원로원 속주를 통치하는 총독에게는 군단 지휘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서기 21년,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군단 지휘권을 부여받은 총독을 파견하여 침략자에 대한 대책을 일개 군단장의 관할에서 총독의 임무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타쿠팔리나스가 궁지에 몰린 끝에 전사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드루이드교


같은 해 갈리아 동부 지역, ‘장발의 갈리아’(갈리아 코마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고리대금 이자에 대한 불만이 계기였다. 본국에서는 이율의 상한선이 연리 12퍼센트였는데, 속주에서는 무제한이었다.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것도 로마가 속주세를 징수하기 때문이라 하여 창끝이 로마 중앙정부로 돌려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0년대 무렵 갈리아를 재편성할 때, ‘장발의 갈리아’의 최대 부족인 하이두이족의 수도 비브라크테(오늘날의 오툉)를 학문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그때까지 갈리아의 종교와 사법과 교육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던 ‘드루이드’(갈리아인의 민족종교인 드루이드교의 사제계급)로부터 교육을 빼앗는 것이었다.

[프랑스 오툉 출처 구글 이미지]

아우구스투스의 ‘드루이드’ 대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드루이드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로마 시민이 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금지령으로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갈리아 지도층에 대한 영향력도 잃어버린 셈이다. 지도층의 거의 대부분이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존망의 위기에 몰린 사제들은 여기에다 갈리아인의 민족주의를 결합시킨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민족자결이라는 이상(理想)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간단했다. 이리하여 고리대금에 대한 불만과 갈리아 민족주의가 합류했다.


동부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8개 군단 가운데 2개 군단과 보조부대만으로 진압되었다. 4만 명이 넘는 반란군을 2만 5천 명의 병력이 반 년도 지나기 전에 진압한 것이다. 주모자인 세 명의 갈리아인 ‘율리우스’들은 모두 자결했고, 학생들도 대부분 전사했다.


이후 오툉의 고등교육기관을 존속시킨 것 외에 또 한 가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은 티베리우스가 갈리아 전역에서 ‘드루이드’들을 추방한 것이다. 갈리아(그리스식으로 읽으면 켈트)의 민족종교 사제들은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로 달아났다. 드루이드교에서는 그 땅에 남아 있는 스톤헨지는 이들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드루이드교 하지 제사와 스톤헨지 출처 구글 이미지]

종교관


로마인의 종교에 대해서조차도 티베리우스는 합리주의로 일관하였다. 대신 종교가 정치 분야를 침범하는 일도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해, 테베레강 서쪽 연안 유대인들의 행동이 정치에 대한 침범으로 여겨지자 티베리우스는 긴급조치령을 발동하여, 로마에 사는 유대인 젊은이 4천 명을 사르데냐 섬으로 보내 산적에 대한 경비를 맡기고, 나머지 유대인들도 이탈리아 본국에서 추방해버렸다.


사회적 불안 요인이 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것은 유대교도만이 아니다. 같은 무렵, 이집트의 이시스교도도 추방되었다. 이들의 경우에는 기부라는 명목으로 신자들에게 돈을 받는 방식이 상식을 넘어섰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어떤 종교를 믿든지 자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피해를 주는 것은 싫어했다. 유대인 사이에는 유대식 재판이 있으니까 사법권을 인정해달라는 그들의 요망을 받아들여, 유대 땅만이 아니라 오리엔트 일대에 뿌리박은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사법권까지도 인정해주었다.


발빠른 재해 대책


서기 17년, 소아시아 남서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다. 주요 도시인 사르데스, 마그네시아, 필라델피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에페수스까지도 여진 피해를 면치 못했다. 이 지방은 ‘아시아 속주’라고 불리는 원로원 속주다. 여느 때라면 원로원에서 토의를 거쳐 대책이 결정되겠지만, 이번 일은 시급히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사르디스 아르테미스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보고를 받자마자 티베리우스는 5명 내지 10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그리고 위원회에 그가 생각한 아래 대책을 제출하고 승인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현지로 달려가 실행에 옮기는 임무도 부과되어 있었다. 재해가 일어났을 때는 이 체제가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1) 긴급원조와 사회간접자본 설비를 재건하기 위해 1억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에서 지출한다.
(2) 피해자에게는 5년 동안 속주세를 면제한다.


티베리우스의 재해 대책은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의 로마 황제들도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이때와 같은 대책으로 대응하게 된다. 서기 17년의 재해 대책이 큰 효과가 있었다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르데스는 3년 만에 복구되어 속주세도 다시 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친아들과 친손자의 죽음


서기 23년, 예기치 않았던 불행이 티베리우스를 덮쳤다. 얼마 전에 후계자로 공인받은 드루수스가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64세의 아버지에게 35세의 아들의 죽음이 얼마나 큰 타격이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황제로서는 후계자의 죽음이기도 하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티베리우스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격하고 냉철한 태도로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을 부탁했다. 17세의 네로 카이사르와 16세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원로원 의원들 모두가 아버지가 된 심정으로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드디어 ‘권력 반환’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이고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이며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였다.


티베리우스의 눈에는 며느리의 이런 행동이 어떻게 비쳤을까. 그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64세의 황제는 아들을 잃은 해 말에 쌍둥이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네 살배기 손자마저 잃어버렸다. 그래도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책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안전보장(세쿠리타스)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카이사르로부터 시작된 로마 제정 체제의 '손질'을 담당하는 3번 타자를 맡기에 딱 알맞은 인재였다는 것은 현대 연구자들 사이에 거의 정착된 의견이다. 그리고 이런 ‘손질’의 좋은 예가 바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기 위한 방위체제의 손질이었다.


라인강 전선에서 상류인 고지 게르마니아를 지키는 4개 군단과 하류인 저지 게르마니아를 맡고 있는 4개 군단의 임무는 이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처럼 게르마니아 땅을 정복하고 엘베강까지 패권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라인강 방위선을 사수하는 것이 8개 군단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광대한 갈리아 전역의 안정화를 위해 로마는 리옹에 1천 병력만 상주시키고 있었을 뿐이다. 엘베강을 포기하고 라인강으로 물러선 것은 갈리아의 로마화를 정착시킨다는 관점에서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8개 군단이 모두 엘베강에 못박혀 있으면, 여차할 때 갈리아로 출동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프랑스 리옹 출처 구글 이미지]

독일 역사가 몸젠은 서기 1세기 당시의 로마인에게 도나우강은 ‘정치적 국경’이었지 ‘군사적 국경’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도나우강을 방위선으로 삼기로 결정했을 뿐, 거기에 이르는 모든 지역에 패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지도상의 국경선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도나우강은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흑해로 흘러드는 큰 강 도나우의 남쪽 일대를 로마인들은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가장 상류의 라이티아부터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서 차례로 노리쿰, 판노니아, 달마티아, 모이시아, 트라키아가 있었다. 여기에 투입할 7개 군단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역할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적재적소와 능력 위주로 일관했다. 군단장에는 군사 능력, 행정관에는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했고, 속주 총독에는 공화정 시대부터의 명문 귀족을 등용했다. 속주 총독의 임무에는 외국과의 교섭도 포함되기 때문에, 명문 출신이 유리해지는 경우도 고려한 것이다.


타키투스는 드루수스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서기 25년에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서 행한 연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원로원 의원들이 티베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우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나 자신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하는 일도 모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높은 지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평가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전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남을 조상(彫像)이다. 후세의 평가가 좋지 않으면, 대리석에 새겨진 석상조차도 묘소를 짓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의 소망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들이 계속 나에게 마음의 평정과 함께 인간의 법을 이해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뿐이다.”


현대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다음 라틴어 격언만큼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어울리는 말도 없다고 주장한다.

“FATA REGUNT ORBEM! CERTA STANT OMNIA LEGE”(불확실한 것은 운명이 지배하는 영역. 확실한 것은 인간의 재주가 관할하는 영역)


티베리우스가 손질한 각 군단은 국경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이 안심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국경의 안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족과의 관계


이제부터 이야기할 에피소드는 모두 서기 26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타키투스는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도미티아스 아프로라는 사람이 티베리우스의 출신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클라우디아 풀크루스를 간통죄로 고발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클라우디아가 아그리피나의 사촌이자 측근이었던 게 문제였다. 제단 앞에 엎드려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달려간 아그리피나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증오를 터뜨렸다.


제단 앞에서 일어난 티베리우스는 평소의 울분이 폭발한 듯 말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아그리피나의 팔을 꽉 움켜잡고 그리스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통치를 허락받지 못한 데 있다.” 클라우디아 풀크루스와 그녀의 간통 상대였던 플루니우스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물론 이로써 아그리피나의 분노는 더욱 맹렬히 불타오르게 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클라우디아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일어났다. 병으로 쓰러진 아그리피나를 티베리우스가 문병했다. 병상에서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티베리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밖으로 나왔고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 번째 사건은 가족끼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베리우스는 접시에서 과일 하나를 집어, 싱싱하니까 먹어보는 게 어떠냐면서 아그리피나에게 내밀었다. 아그리피나는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티베리우스는 며느리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어머니 리비아에게 말했다. “내가 독살하려 한다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이래서는 내가 아그리피나를 냉정하게 대한 것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황제 일가족의 분위기였다. 게다가 70세가 다 된 티베리우스는 가정 밖에서도 만족감을 얻을 곳이 없었다. 그의 출신계급을 생각하면 원로원 역시 그의 집안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지만, 원로원도 그에게 만족을 주는 곳은 아니었다.


원로원과의 관계


로마 황제는 단독으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제 통달이나 황제 칙령이라고 번역되는 ‘긴급조치령’이고, 그것을 로마인들이 말하는 ‘법률’(렉스)로 만들어 항구적인 정책으로 바꾸려면 ‘원로원 권고’(세나투스 콘술툼)라는 이름의 원로원 의결을 거쳐야 했다.


티베리우스는 두 전임자처럼 무력으로 원로원을 이겼다는 이점은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전임자들의 피를 이어받지도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주도 체제의 로마에서 계속 주류를 차지해온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이다. 이런 티베리우스가 ‘제일인자’와 원로원은 서로 협력하여 국가 경영을 담당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이 생각을 현실화할 때 성심성의를 다했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들에게 승인을 요청할 때나 반론을 제기할 때도 티베리우스의 말투는 언제나 엄격했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의원들은 발언 내용에는 찬성하더라도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티베리우스에게 부족한 것은 유머의 재능이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발언이 가장 신랄해지는 것은 의원들이 국책결정기관인 원로원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하려는 의도를 보일 때였다. 그럴 때면 티베리우스는 칼처럼 날카로운 말로 그들을 베기라도 하려는 듯 원로원의 권위와 책무를 자각하라고 신랄하게 요구했다.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원로원을 제국 통치의 의미있는 파트너로 규정하고 원로원 의원 중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돈을 흔쾌히 지급하고 여러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그는 먼저 손을 내밀면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고, 늘 원로원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공화정 시대때 원로원 위상을 생각해 그들의 책임과 권한도 보장하고 이관시켜줬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진 카프리 섬 시절에도 수동적인 그들에게 가이드라인까지 잡아줬다. 그러나 이때마다 원로원은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거나 황제 눈치만 봤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는 분통이 터져서 원로원에게 "노예가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일갈을 날리고, 자기 눈치를 보지 말라면서 연설과 토론의 자유까지 계속 보장해주고 세야누스파가 숙청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런 이유로 보통은 보복도 안했다. [출처: 나무위키]


티베리우스는 집 안에서도 피곤하고 집 밖에서도 피곤한 일뿐이었다. 서기 27년, 68세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여러 해 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 게 분명한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수도를 떠나 나폴리만에 떠 있는 작은 섬 카프리에 틀어박혀버린 것이다.


카프리 은둔


가출이라면 티베리우스에게는 이미 ‘전과’가 있었다. 36세 때인 기원전 6년부터 7년 동안 지위도 가정도 모두 버리고 로도스섬에 틀어박혀버린 것이다. 그 경우에는 은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아우구스투스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33년 뒤의 두 번째 ‘가출’ 때는 제국 통치를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아직 후계자들이 20세와 19세에 불과하다. 또한 티베리우스 자신에게도 그 직무를 내팽개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게 아닐까.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타키투스가 내린 악평에 오랫동안 영향을 받은 서구에서 무려 1,600년 뒤에 처음으로 티베리우스를 옹호한 볼테르와 로마사 연구에서는 최고 권위자인 역사가 몸젠을 비롯하여 티베리우스 복권을 위해 노력한 연구자들은 수없이 많지만, 이들 대다수는 카프리 은둔이야말로 티베리우스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책이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해 있다.


타키투스는 바로 이런 점을 싫어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에 틀어박힐 때 가족한테도 알리지 않고 원로원에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선황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곳(놀라)에 세워진 신전 봉헌식에 참석하러 간다고만 말하고 로마를 떠났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그 후 10년 동안이나 수도를 비우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프리에서의 신속한 대응


하지만 정보수집과 명령전달 체계만 확립하면, 이론적으로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섬에 틀어박힌 직후 대사건이 두 건이나 일어났다. 거기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신속정확한 대응은 볼 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서 살라리아 가도를 따라 북쪽으로 10킬로미터쯤 가면 피데네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검투사 시합이 열렸는데, 목조 관람석이 무너지는 바람에 5천 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검투사 시합은 선거운동이 아니라 흥행이 목적이었던 모양이지만, 수용인원이 1만 명 정도인데 그 두 배나 되는 관람객을 받아들인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로마 피데네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사고 소식을 접한 티베리우스가 즉각 내린 명령에 따라, 수도 로마와 그 주변 도시에서 의사가 총동원되어 부상자를 치료했다. 또한 피데네만이 아니라 그 주변 도시와 마을에 있는 모든 집에는 부상자를 수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망자의 장례비도 공금에서 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 다음 두 가지 항목을 의결(법제화)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한 시합을 주최한 사람은 추방되었다.


(1) 검투사 시합을 주최하는 자의 자격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자산을 가진 자로 제한할 것.
(2) 관람석은 목조라도 그 토대가 되는 토지는 충분히 조성되어야 하고, 조성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관람석을 짓는 것은 불허할 것.


이 사고의 기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수도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카일리우스(오늘날의 첼리오) 언덕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언덕에는 공공건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곳이 몽땅 타버렸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주택을 잃었다는 뜻이다. 이 소식을 들은 티베리우스는 당장 성금을 보냈고, 수도 주민들도 황제를 본받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에, 집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이재민들도 빨리 재기할 수 있었다.

[로마의 첼리오 언덕 출처 구글 이미지]

티베리우스의 대응이 신속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황제가 수도에 없는 것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차츰 잠잠해졌고,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신속정확한 조치에 감사한다는 결의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서한을 보내 의결을 요구하는 방식이 계속되자 원로원은 불만뿐만 아니라 굴욕감까지 맛보게 된다. 시민 중의 ‘제일인자’로서 정치를 하는 데 지쳐버린 티베리우스가 이제는 시민이나 원로원 의원보다 지위가 높은 명실상부한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실’(實)만 황제가 아니라, ‘명’(名)까지도 황제가 되기로 한 것이다.


황제가 수도에 없어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원로원이 본래의 존재이유를 상실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부재 통치가 순조롭게 굴러갈수록, 원로원의 존재이유 상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은 없다. 이리하여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원로원은 또 원로원대로, 각기 나름의 이유로 티베리우스에 대한 감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카프리섬에는 수도에 사는 것과 다름없이 쾌적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하인들 외에는 10명도 채 안 되는 친구가 동행했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여자는 한 사람도 없다. 애인으로 따라온 여자도 없고, 친구의 아내도 없다. 원로원 의원도 딱 한 사람뿐이다. 인종도 다른 이들 동행자의 유일한 공통점은 티베리우스가 좋아한 천문학이나 그리스 문학에 정통하다는 것뿐이었다.


테오도어 몸젠이 지은 『로마 제국의 속주들』에는 로마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한 사람이 티베리우스였다고 한다. 그것은 서기 1년이었고, 4년마다 개최된 올림피아 대회가 195회를 기록한 해였다. 올림피아 대회 우승자 명단에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기 전에 사용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라는 이름도 있다는 것이다. 참가 종목은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다. 티베리우스가 41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로마 전차 경주 출처 구글 이미지]

공무를 완전히 해내려면 많은 ‘수족’이 필요했다. 그리고 수족은 다른 사람보다 우수하고 유능하지만, 그에 비례하여 야심도 크다는 결함을 갖기 쉽다. 또한 임무가 중요할수록 그 임무를 맡은 인물의 권력도 커진다. 카프리섬에 은둔한 뒤, 티베리우스의 수족 가운데 우두머리는 근위대장 세야누스였다.


세야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Lucius Aelius Sejanus). 그는 로마 사회의 제2계급인 ‘기사계급’ 출신이다. 티베리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에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근위대장으로 발탁했다. 이어서 이듬해인 서기 15년에는 세야누스의 아버지가 이집트 장관으로 승진하여 알렉산드리아로 떠났고, 세야누스가 유일한 근위대장이 되었다. 근위대장으로는 이례적으로 젊은 34세의 나이였다.



[루키우스 세야누스 주화 출처 구글 이미지]

티베리우스가 ‘가출’한 뒤, 이제 황제 일가족의 주도권은 아그리피나가 쥐게 되었다. 집안의 안주인 격인 리비아는 80대 중반의 고령이고, 티베리우스에게 아내가 없는 이상, 40대에 접어든 아그리피나가 주도권을 잡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자 카프리섬에 은둔한 뒤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앞세워 ‘아그리피나파’ 소탕작전을 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것을 며느리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증오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는 법체계의 창시자인 만큼, 세야누스가 사용할 수 있었던 ‘무기’는 9천 명의 근위대보다는 법률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가반역죄와 간통죄를 다스리는 두 가지 법률이 주요 무기가 되었다. 시민 공동체인 국가의 안전과 질서를 파괴하는 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반역죄 처벌법은 공화정 시대부터 있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확증이 없는 고발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잡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친밀한 태도로 상대를 안심시키고, 마음을 놓은 상대가 저도 모르게 평소의 생각을 털어놓으면, 벽 너머에 있는 하인에게 그 말을 듣게 하고, 그 하인을 증인으로 출두시키는 함정수사를 활용했다. 그리고 원고 측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언제나 원로원 의원을 고발자로 내세웠다.


이리하여 아그리피나의 주변 인물들은 국가반역죄나 간통죄로 하나씩 배제되었다. 로마 상류층 사람들은 모두 다 공포에 떨었다. 세야누스는 아그리피나의 맏아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이간질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의 황제 계승을 미끼로 사용했다. 20대 초반으로 생각도 얕고, 화려한 사교생활에 탐닉할 줄밖에 모르는 두 젊은이에게 경쟁심을 심어주는 것은 간단했다.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와 황실에 개입하는 것의 선례를 만든 첫 번째 황제였다.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를 한데 모아 수도 로마를 억압하는 강대한 군대로 재편성했다. 전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수도 로마에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카드로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근위대를 이용한 정치를 했다. 이는 근위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쉽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반대파 숙청과 황실의 위험분자 숙청(특히 대 아그리피나와 관련된 일파들)을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근위대를 이용한 쿠데타까지 기도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근위대의 정치 개입과 쿠데타 기도의 선례를 처음 만들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하나의 전통과 관례와도 같은 현상이 되어버린다.


리비아의 죽음


이 즈음인 서기 29년, 리비아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였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섬에 은둔한 지 2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티베리우스도 수도로 돌아올 거라고 사람들은 확신했다. 상류층만이 아니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믿었다.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의 친어머니일 뿐 아니라, 선황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기도 했다.

[리비아 드루실라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에서 편지 한 통을 원로원에 보내왔을 뿐이다. 이 편지에서 티베리우스는 고인의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르라고 요구하고, 사후에 추증되는 수많은 명예도 되도록 줄이고, 하물며 신격화는 어머니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 서한의 마지막에서 그는 잠시도 손을 뗄 수 없는 국사가 많아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티베리우스는 친어머니한테도 무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민의 일치된 평가였다. 그리고 남에게 이해받지 못한 티베리우스도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그리피나 일파 소탕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보낸 서한이 회의장에서 낭독된 것은 리비아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였다. 그 편지에는 아그리피나와 그 맏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아그리피나가 자기한테 집요한 적개심을 보인다고 말하고, 23세인 네로 카이사르의 방탕한 생활과 소년을 상대로 한 남색 취미를 개탄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한 심의를 원로원에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불만을 토로한 편지에 불과했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혼돈스러워 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군중이 원로원 회의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회의장을 에워싸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비난은 황제의 참뜻이 아니라고 입을 모아 외쳐댔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티베리우스는 다시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우선 원로원에 압력을 가하는 폭도의 행동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고, 황제 칙령으로 시위를 금지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비난을 되풀이하고, 여기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내릴 책무를 회피하려 드는 원로원은 황제의 권위를 손상시켰다고 엄격하게 비난했다.


서기 29년 말에 아그리피나 모자는 유죄가 확정되었다. 아그리피나는 판다타리아 섬(오늘날의 벤토테네)에, 아들 네로 카이사르는 폰티아이 섬(오늘날의 폰차)에 각각 유배형을 받았다. 국가의 안정을 어지럽힌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둘 다 ‘국가의 적’으로 단죄된 것이다

[벤토테네와 폰차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세간은 이 판결에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 논쟁에 무관심한 일반 시민들은 이 재판을 육친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증오가 낳은 결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집안의 가장이 며느리와 손자를 탄핵하는 것은, 가족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건전한 구성요소라고 믿고 있는 로마인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유배형을 선고받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가 각자 유배지로 떠난 이듬해인 서기 30년, 세야누스는 아그리피나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원로원에서 내려진 판결은 유죄. 드루수스 카이사르 역시 ‘국가의 적’이 된 것이다. 이번에도 사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섬에 격리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 안에 있다는 지하실에 유폐되었다.


아그리피나 일파에 대한 소탕작전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도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대 입장을 항상 분명히 해온 아시니우스 갈루스도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집정관 저택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폰차섬에 유배된 네로 카이사르가 죽었다. 경비병에게 반항하다가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고, 절망하여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세야누스의 몰락


아그리피나 일파에 대한 소탕작전을 진두지휘한 세야누스의 권세는 이제 절정에 이른 것 같았다. 이듬해인 기원전 31년을 담당할 집정관에 다름아닌 티베리우스와 함께 취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15년 동안이나 측근에 둔 것은 그가 유능하고 충실한 수족이었기 때문이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을 게 분명하다. 세야누스도 그런 티베리우스의 가슴 속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세야누스의 야심이 ‘수족’의 분수를 넘어서기 시작한 조짐은 5년 전에 이미 나타났다. 그때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2년 전에 과부가 된 리비아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인 드루수스의 아내였고 게르마니쿠스의 누이동생이니까, 이중으로 황실에 속하는 여자였다. 티베리우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지도 않았다. 세야누스에게 희망을 갖게 한 채 내버려두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서기 31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집정관 직무에 세야누스가 의욕적으로 매달린 것도 당연하다. 동료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황제는 여전히 카프리섬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에, 수도 로마에서는 그가 유일한 최고위 공직자다. 게다가 9천 명의 정예를 지휘하는 근위대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야누스는 수족이라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렸다.


집정관 세야누스는 ‘가까운 에스파냐’(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총독인 루키우스 아렌티우스를 티베리우스와 상의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고발한 것이다. 고발 이유는 속주 총독의 직권을 남용하여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속주 근무자의 부정을 특히 엄하게 다스린 티베리우스를 의식한 고발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티베리우스 자신이 반격을 가해왔다.


티베리우스는 임기 중에 총독을 고발할 수 없다는 것을 제국 경영의 정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을 법제화해달라는 요청까지 덧붙였다. 세야누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의원은 많았고, 티베리우스가 든 이유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임기 중에 속주 총독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률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성립되었다. 이것이 세야누스를 처음으로 불안에 빠뜨렸다.


72세가 되었어도 티베리우스는, 영국의 어느 연구자의 말을 빌리면 ‘테러블’(무서운),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로는 ‘테리빌리스’한 존재였다. 1월 1일부터 1년 동안 계속되는 집정관 임기가 절반쯤 지났을 때 스스로 집정관을 사임한 것이다. 두 명의 집정관은 거취를 같이하는 것이 관례다. 티베리우스가 사임하면 세야누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임한 두 사람을 대신하여 ‘예정 집정관’(콘술 수펙투스)에 선출되어 있던 다른 두 사람이 집정관을 맡았다.


티베리우스는 이미 로마에 있던 칼리굴라를 카프리섬으로 불러들였고, 그의 형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필요하면 유폐되어 있는 황궁 지하실에서 석방하라는 밀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세야누스를 은밀히 근위대장에서 해임하고, 마크로를 새로운 근위대장에 임명하여 로마로 보냈다.


10월 17일 밤, 수도로 잠입한 마크로는 우선 로마 북동부에 있는 근위대 병영으로 갔다. 거기서 대대장 9명을 모두 소집하여 티베리우스의 임명장을 보여주고, 지금부터는 자기가 근위대 책임자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마크로는 집정관 레굴루스를 찾아가 봉인된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전해주고, 이것을 내일 아침 원로원 회의석상에서 낭독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길로 세야누스를 찾아갔다. 세야누스에게는 우선 자기가 근위대장에 임명된 것을 알린 다음, 세야누스의 반응을 가로막듯 얼른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원로원 회의석상에서 집정관이 낭독할 서한에는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주라는 티베리우스의 요청이 적혀 있다고. 이 말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세야누스는 근위대장에서 해임된 의미를 잊어버렸다.


다음날 두 집정관이 입장하자 원로원 회의가 시작되었다.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인 레굴루스가 어젯밤부터 맡아둔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뜯어 낭독했다. 의원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은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파인 두 의원을 엄격하게 비난했을 때였다. 곧이어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의원들 머리 위로, 세야누스 본인을 무자비하게 단죄하는 티베리우스의 말이 쏟아져 내렸다.


세야누스의 죄목은 국가반역죄였다. 국가 전복 음모를 꾸몄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 황제의 고발 이유였다. 황제는 직접 고발자가 되어 구체적인 증거까지 나열했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주모자 세야누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집행할 것을 원로원에 요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세야누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의원이 많았던 원로원은 그 사이에 재빨리 사형 판결을 내리고 사형 집행까지 가결해버렸다.


포로 로마노의 감옥으로 끌려간 세야누스는 그날로 당장 참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중은 환호성을 지르고, 전에 폼페이우스 극장을 수리한 공으로 그 극장 한편에 세워진 세야누스의 입상을 끌어내어 산산조각을 내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다.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세야누스의 맏아들을 비롯한 세야누스파 몇 명이 공모자라는 이유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로마 역사에서 반역법(마이에스타스)는 공화정 초기부터 내려온 법률로, 이 법률이 국가 최고 원수들의 무기로 정례화된 것은 마리우스와 술라가 아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국가의 존엄을 위협하는 모든 범죄로 포괄돼 "로마의 적국과 내통하거나, 정무관에게 신체적인 해를 입히는 등 국가 안전을 침해하는 모든 범죄는 반역법에 따라 다룬다"고 명시됐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개정해 통과시킨 이 법의 문구 중 "~등"에, 자신과 그 일가 남녀황족에 대한 대역죄와 오만, 신성모독, 관직 남용행위를 통한 재산취득, 간통, 불륜, 강간, 살인에 이르는 중범죄까지 모두 반역법에 포함시켜 이를 판결과 조상들부터 내려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시켰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반역법은 카이사르의 의도와 달리 황제 본인이 마음대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이 넘는 긴 치세 기간동안 엿가락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게 설계한 반역법을, 자신이 만든 <율리우스 간통법>과 함께 정적 숙청도구로 적극 사용했다. 이런 부분에서 본다면 티베리우스가 없던 방법을 개발해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마냥 비난하긴 어렵다. 되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의 평처럼, 후대 황제들의 반역법 사용과 애매모호한 유죄 선고는 평화와 내전의 종식을 가져다줬다는 명분 아래 원로원과 민회를 좌지우지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후대 로마인들에게 티베리우스가 비난받은 진짜 이유는, 그가 이 법률을 무기삼아 휘두르면서 델라토르 제도를 관행화해주고, 이를 또 다른 무기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반역죄 재판에서 기소된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을 시, 고발자들이 피고의 재산 중 4분의 1을 받도록 허용하고 이를 조상들부터 이어진 관행, 즉 로마 공화정 수립 전부터 있던 자국의 불문 헌법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반대파는 이런 티베리우스에게 악감정을 품었는데, 이때 그는 특유의 정치술과 자신의 벗 네르바 같은 최고 법률가까지 활용해 법적 시비까지 틀어 막았다. 당연한 말인데, 고발인은 세야누스, 마크로 등과 같은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및 부대원들이 많았고, 기소 접수는 황제가 추천해 꽃은 법무관들이 전담했다. 이렇게 되니,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재산 대부분은 당연히 티베리우스 손아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이는 그가 악랄하다고 비난받고, 제정이 공화주의자들에게 비판받는 근본적 이유가 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델라토르들이 거짓밀고를 한다면 그대로 기소 내용을 파기해주고 역으로 거짓고발자들을 파멸수준으로 처형 또는 영구추방시킬 정도로 거짓밀고자에 대한 처벌도 엄격히 가져갔다. 여기에 더해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건처럼 재조사 후 피고가 무죄로 밝혀지면 거짓밀고자를 끝까지 추적해 그 죄까지 혹독히 처벌할 정도로, 그는 상당히 엄격하게 델라토르 제도를 활용했다. [출처: 나무위키]


이후 티베리우스는 두 달 동안 침묵을 지킨 뒤, 서기 31년 말에 다시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왔다. 티베리우스의 분노는 세야누스 일가족을 몰살한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세야누스 일파로 지목된 원로원 의원들까지도 모조리 피의 제물로 바치지 않는 한, 그의 분노는 폭발을 멈추지 않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에는 이들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집행이 온당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정력적으로 재판에 개입했지만, 이제는 수수방관하는 태도였고, 형집행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1년 뒤, 벤토테네섬에서는 유배당한 아그리피나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는 유폐된 그녀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잇달아 사망했다. 이것도 티베리우스의 무관심이 경비병들한테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뜬소문


카프리섬의 벼랑 위에 우뚝 솟은 백악의 별장에서 살고 있는 늙은 최고권력자의 일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의 일상을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극히 적었다. 비밀의 베일에 가려져 있을수록 환상이 끼여들 여지는 그만큼 커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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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타키투스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섬에 끌려간 소년들에 대한 음행”이라고밖에 쓰지 않았지만, 이런 ‘뉴스’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서술은 훨씬 자세하다. 그의 『황제열전』에는 카프리섬에서 티베리우스가 저지른 ‘악행’이 열거되어 있다.


근대와 현대의 로마사 연구자들 대다수는 이런 ‘악행’을 일소에 부치고 있다. 티베리우스를 언급한 고대 역사가는 모두 열 명인데, 티베리우스에게 호의적인 로마의 역사가 파테르쿨루스와 유대인인 필로는 제쳐놓는다 해도, 나머지 역사가들 가운데 그의 악덕을 상세히 언급한 것은 수에토니우스 한 사람뿐이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죽은 지 30여 년 뒤에야 태어났고, 글을 쓴 시기는 티베리우스가 죽은 지 100년이 다 되었을 때였다. 타키투스는 항간의 소문을 전하는 형식으로 몇 줄 언급했을 뿐이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현대의 ‘옐로 페이퍼’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았다.


금융 위기


티베리우스가 74세의 고령이 된 서기 33년에 로마를 덮친 금융 위기에 대처할 때도 그는 냉철함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그해에 일어난 금융 위기는 이제 같은 패끼리의 싸움터가 되어버린 원로원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 의원이 고발당한 데서 시작되었다.


고발 이유는 연리 12퍼센트가 상한선인 법정 금리를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법에 따르면, 금융업자는 누구나 자기 자금 가운데 일정 비율을 본국 이탈리아에 융자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받은 티베리우스는 금융업자들에게 1년 반으로 기한을 정하고, 그 기한 안에 일정 비율을 맞출 수 있도록 자산을 조정하라고 명령했다. 일정 비율을 채워야 하는 금융업자들은 일제히 채권 회수에 나섰다. 동시에 신규 융자를 중지했다. 결과는 본국에서의 통화량 부족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서서히 내려가던 본국의 땅값까지도 이를 계기로 폭락했다. 부채 상환을 독촉받은 채무자들이 땅을 팔아서 빚을 갚으려 했기 때문이다. 땅값 하락으로 파산자가 속출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완전한 위기 상황이다. 결국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돈을 국가가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적자금 투입’이었다. 이 ‘공적자금’은 특별히 설치된 ‘공적’인 위원회를 통해 ‘사적’인 채무자들에게 직접 투입되었다. 이 융자금은 3년 기한으로 무이자였지만, 융자금의 두 배가 되는 부동산을 담보로 잡혀야 했다.


이리하여 서기 33년의 금융 불안에서 생긴 위기는 일단 해소되었다. ‘일정 비율’을 채울 수 있게 되었는지, 아니면 안전한 융자 대상을 잃어버리는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금융업자들이 다시 융자를 재개했기 때문이다.


동방 문제


금융 위기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티베리우스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 오리엔트에서 재발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서기 18년에 취임한 아르탁시아스 이후 줄곧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파르티아가 자국의 왕족을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혀, 아르메니아를 로마한테서 떼어놓으려 했다.


파르티아의 움직임을 알자마자 그는 (루키우스) 비텔리우스(8대 황제 비텔리우스의 아버지)를 오리엔트로 파견했다. 비텔리우스는 시리아 속주의 4개 군단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파르티아를 비롯한 오리엔트의 군주국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부지리로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일을 해낸 비텔리우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관저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리고 10년 동안 유대 장관을 지낸 본디오 빌라도(로마식 이름은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해임하여 이탈리아로 송환하였다. 유대 지방 장관으로서의 직무 수행 능력이 너무 미흡하여, 마땅히 고발할 만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서기 36년,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아벤티노 언덕에서 대화재가 일어났다. 대경기장 관람석 밑에 모여 있던 가게 가운데 하나가 발화점이었다. 불은 늘어서 있는 가게들을 다 태운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대경기장의 목조부로 옮겨붙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불어온 세찬 북풍을 타고 아벤티노까지 번져갔다.


이때도 티베리우스의 조치는 재빠르고 철저했다. 1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의연금을 즉석에서 전달하고, 다섯 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그 중 네 명은 티베리우스가 임명하고, 나머지 한 명은 집정관이 임명했다. 이런 조치는 ‘티베리우스가 우리를 저버렸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잊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나날들


서기 36년부터 37년에 걸친 겨울, 77세의 티베리우스는 북서풍이 몰아치는 카프리섬을 피해 나폴리만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곶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잔병 한번 앓은 적이 없는 티베리우스는 의사의 충고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마침내 한계에 이른 것을 누구보다도 잘 깨닫고 있었다.


죽음은 서기 37년 3월 16일 찾아왔다. 한 세기 후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무서운 티베리우스’의 죽음에 어울리도록 베개에 질식당해 죽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티베리우스가 죽은 해에 10대 소년이었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노쇠에 따른 죽음으로 보고 있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제3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연령순으로 열거하면 45세의 클라우디우스, 24세의 칼리굴라,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직계 손자인 16세의 게멜루스였다. 티베리우스는 나이로는 가장 적임자인 클라우디우스를 맨 먼저 후보에서 제외했을 것이다. 그는 율리우스 씨족의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티베리우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를 계승할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티베리우스의 다음 차례로 정해놓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로서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는 게멜루스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은 타키투스 같은 공화정 동조자가 뭐라고 비판하든 간에 카이사르가 기획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처럼 다져놓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베리우스가 새로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새로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수수한 노력은 남의 평가를 받기 어렵다. 또한 그에게는 변명할 수 없는 성격상의 결함이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안 수도 로마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티베리우스를 테베레강에 던져라!”고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온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 연구자들이 티베리우스를 복권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1,800년이나 지난 뒤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고학이 발전한 덕택이다. 종래에는 고대 역사가의 저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로마 제국 전역에서 발굴된 수많은 금석문과 그밖의 사료들도 참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독일인답게 철저히 실행한 사람이 19세기의 역사가 몸젠이었다. 몸젠은 역사 저술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이 몸젠이 티베리우스에 대해 내린 평가는 “로마가 가졌던 가장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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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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