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높은 황제들 - 티베리우스 황제
제1부 티베리우스 황제
(서기 14년~서기 37년)
티베리우스는 가식과 체면치레를 지나치게 싫어한 나머지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언플능력과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그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체질적으로 정치질과 아예 담쌓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반박의 의도가 좋아도 언행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직설적이어서 툭하면 대놓고 면박을 주곤 했다. 티베리우스의 달 건이나 도미누스 호칭 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리우스(7월) 달과 아우구스투스 (8월) 달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에게는 '그럼 역대 제일인자가 열두명을 넘어가면 그땐 어쩔거냐?'라고 따졌고, 자신을 도미누스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나는 같은 공화국 시민인데 왜 노예처럼 비굴하게 도미누스라고 부르느냐?'고 화를 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분명 좋은 의도로 말을 하고도, 뒤에서는 오히려 위선적인 폭군이라고 씹혔다. [출처: 나무위키]
(1) 20년간의 복무를 끝낸 자에게는 즉시 제대를 허락한다.
(2) 16년간의 복무를 끝낸 자는 예비역으로 돌려,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요격전에 나서는 것 외에는 모든 임무에서 해방된다.
(3)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은 두 배로 지급한다.
카메오 파리 국립도서관에 ‘프랑스의 카메오’(보석이나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드는 장신구의 한 종류)라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세로가 31센티미터, 가로가 25.5센티미터나 되고, 서기 17년에 제작되었다. 이 대형 카메오는 상중하로 나뉘어, 맨 위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인 드루수스 등 게르만족과의 관계에서 선구자가 된 인물들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중간은 게르만족을 제패한 당사자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와 그 가족들의 초상으로 메워져 있고, 맨 밑에는 정복당한 게르만족의 군상이 새겨져 있는 구도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지금도 서기 17년 봄에 게르마니쿠스를 맞아 거행된 개선식으로 로마의 게르만족 제패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해가 로마군이 게르마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해가 되었다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Gemma Augustus)도 역시 고대 로마 시대에 제작된 유명한 카메오지만, 이 작품은 정확하게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서기 6년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옆에 서있는 여신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시민관(corona civica)을 씌워주는 모습으로 카메오를 제작하였다.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번에 국민 여러분이 보여준 것과 같은 격렬한 애도는 받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비탄은 아버지인 나를 비롯한 고인의 가족 모두에게 대단한 명예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절도를 지킬 필요가 있다. (......) 지도자 개개인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불멸의 존재는 국가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각자 자신의 직무로 돌아가자. 로마 시민이 낙으로 삼고 기다리는 대지의 여신 축제일도 다가왔다. 일상생활은 직무와 즐거움의 두 가지로 성립되는 법이다.”
첫째,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4개 군단 병사들에게 방종한 행위를 허락한 것.
둘째, 동맹국 왕들에게 횡포를 부린 것. 이로써 오리엔트 전역의 최고책임자인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이들(동맹국 왕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고, 군단 내부는 무질서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피소는 군단 내부의 불량분자들한테는 군단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지만, 선량한 병사들한테는 경멸당하게 되었다고 탄핵한 것이다.
셋째, 마법과 독약을 사용하여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 고발자들이 강조한 것은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가 동양의 마법에 빠져, 주술을 부리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피소가 군단병을 사주하여 조국에 대해 활시위를 당길 작정이었다고 주장했다.
(1) 피소의 이름을 공식 기록에서 말살한다.
(2) 피소의 재산 가운데 절반은 몰수하여 국고에 집어넣고, 나머지는 로마에 있어서 사건과는 관계가 없었던 피소의 맏아들 그나이우스에게 남긴다.
(3) 시리아에 부임한 아버지와 동행한 둘째 아들 마르쿠스는 원로원 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아버지의 재산에서 50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받고 수도 로마에서 10년 동안 추방된다.
(4) 아내 플랑키나는 국모 리비아의 탄원도 있었기 때문에 죄를 불문에 부친다.
(1) 긴급원조와 사회간접자본 설비를 재건하기 위해 1억 세스테르티우스를 국고에서 지출한다.
(2) 피해자에게는 5년 동안 속주세를 면제한다.
“나 자신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하는 일도 모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높은 지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평가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전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남을 조상(彫像)이다. 후세의 평가가 좋지 않으면, 대리석에 새겨진 석상조차도 묘소를 짓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의 소망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들이 계속 나에게 마음의 평정과 함께 인간의 법을 이해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뿐이다.”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원로원을 제국 통치의 의미있는 파트너로 규정하고 원로원 의원 중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돈을 흔쾌히 지급하고 여러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그는 먼저 손을 내밀면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고, 늘 원로원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공화정 시대때 원로원 위상을 생각해 그들의 책임과 권한도 보장하고 이관시켜줬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진 카프리 섬 시절에도 수동적인 그들에게 가이드라인까지 잡아줬다. 그러나 이때마다 원로원은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거나 황제 눈치만 봤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는 분통이 터져서 원로원에게 "노예가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일갈을 날리고, 자기 눈치를 보지 말라면서 연설과 토론의 자유까지 계속 보장해주고 세야누스파가 숙청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런 이유로 보통은 보복도 안했다. [출처: 나무위키]
(1) 검투사 시합을 주최하는 자의 자격을 40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자산을 가진 자로 제한할 것.
(2) 관람석은 목조라도 그 토대가 되는 토지는 충분히 조성되어야 하고, 조성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관람석을 짓는 것은 불허할 것.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와 황실에 개입하는 것의 선례를 만든 첫 번째 황제였다.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를 한데 모아 수도 로마를 억압하는 강대한 군대로 재편성했다. 전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수도 로마에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카드로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근위대를 이용한 정치를 했다. 이는 근위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쉽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반대파 숙청과 황실의 위험분자 숙청(특히 대 아그리피나와 관련된 일파들)을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근위대를 이용한 쿠데타까지 기도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근위대의 정치 개입과 쿠데타 기도의 선례를 처음 만들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하나의 전통과 관례와도 같은 현상이 되어버린다.
로마 역사에서 반역법(마이에스타스)는 공화정 초기부터 내려온 법률로, 이 법률이 국가 최고 원수들의 무기로 정례화된 것은 마리우스와 술라가 아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국가의 존엄을 위협하는 모든 범죄로 포괄돼 "로마의 적국과 내통하거나, 정무관에게 신체적인 해를 입히는 등 국가 안전을 침해하는 모든 범죄는 반역법에 따라 다룬다"고 명시됐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개정해 통과시킨 이 법의 문구 중 "~등"에, 자신과 그 일가 남녀황족에 대한 대역죄와 오만, 신성모독, 관직 남용행위를 통한 재산취득, 간통, 불륜, 강간, 살인에 이르는 중범죄까지 모두 반역법에 포함시켜 이를 판결과 조상들부터 내려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시켰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이래, 반역법은 카이사르의 의도와 달리 황제 본인이 마음대로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아우구스투스는 40년이 넘는 긴 치세 기간동안 엿가락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게 설계한 반역법을, 자신이 만든 <율리우스 간통법>과 함께 정적 숙청도구로 적극 사용했다. 이런 부분에서 본다면 티베리우스가 없던 방법을 개발해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마냥 비난하긴 어렵다. 되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의 평처럼, 후대 황제들의 반역법 사용과 애매모호한 유죄 선고는 평화와 내전의 종식을 가져다줬다는 명분 아래 원로원과 민회를 좌지우지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후대 로마인들에게 티베리우스가 비난받은 진짜 이유는, 그가 이 법률을 무기삼아 휘두르면서 델라토르 제도를 관행화해주고, 이를 또 다른 무기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반역죄 재판에서 기소된 이들이 유죄판결을 받을 시, 고발자들이 피고의 재산 중 4분의 1을 받도록 허용하고 이를 조상들부터 이어진 관행, 즉 로마 공화정 수립 전부터 있던 자국의 불문 헌법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반대파는 이런 티베리우스에게 악감정을 품었는데, 이때 그는 특유의 정치술과 자신의 벗 네르바 같은 최고 법률가까지 활용해 법적 시비까지 틀어 막았다. 당연한 말인데, 고발인은 세야누스, 마크로 등과 같은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및 부대원들이 많았고, 기소 접수는 황제가 추천해 꽃은 법무관들이 전담했다. 이렇게 되니,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재산 대부분은 당연히 티베리우스 손아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이는 그가 악랄하다고 비난받고, 제정이 공화주의자들에게 비판받는 근본적 이유가 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델라토르들이 거짓밀고를 한다면 그대로 기소 내용을 파기해주고 역으로 거짓고발자들을 파멸수준으로 처형 또는 영구추방시킬 정도로 거짓밀고자에 대한 처벌도 엄격히 가져갔다. 여기에 더해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건처럼 재조사 후 피고가 무죄로 밝혀지면 거짓밀고자를 끝까지 추적해 그 죄까지 혹독히 처벌할 정도로, 그는 상당히 엄격하게 델라토르 제도를 활용했다. [출처: 나무위키]